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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3대 악녀(요부) 장녹수 정난정 김개시(장희빈)

by 도생(道生) 2016. 10. 20.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조선 3대 악녀(요부) 장녹수, 정난정, 김개시(김상궁),

조선 19대 왕 숙종의 왕비였으며 조선 20대 왕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장옥정)

 

 

 

 

 

 

 

 

 

 

 

 

 

 

 

우리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불행한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잘못된 원인을 살펴보고 역사적 교훈을 상기하면서 미래를 열어간.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행하고 참담한 역사는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집불통, 독불장군식 독재를 일삼는 최고통치자와 그 옆에 빌붙은 권력 실세들이 권력을 전횡한 역사는 지금 이 순간도 시대만 달리할 뿐 똑같이 자행되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왕과 왕비의 권력을 등에 업고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3대 악녀(요부妖婦)로 장녹수와 정난정, 김개시(김상궁)와 장희빈(장옥정)을 꼽는다. 장녹수와 정난정, 김개시(김상궁)는 노비출신이다.

 

 

조선의 3대 악녀(요부)를 장녹수, 정난정, 김개시(김상궁) 3명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고, 장희빈(장옥정), 장녹수, 김개시(김상궁) 3명으로 분류하는 사람도 있고, 장녹수, 정난정, 장희빈(장옥정)이 조선 3대 악녀(요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4명의 여인 중에서 희빈 장씨만이 유일하게 중인신분에서 조선의 국모, 왕비까지 오른 인물이며 장희빈은 조선의 20대 왕 경종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래서 혹자는 희빈 장씨(장희빈)를 조선 왕비 중 권력을 전횡한 문정왕후, 정순왕후 등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이 붕어하거나 폐위되고 나서 쓰인 기록이다.

조선왕조의 실록은 승정원일기,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실록청에서 쓰였다. 

 

 

실록은 무엇보다 집권 세력에 의해 쓰였고 일부 수정본과 개수본도 있다. 

또 실록에 사관들의 논평인 사론(史論)이 있다. 사론은 주관적인 견해임도 분명하다. 

 

 

 

 

 

조선왕조에서 세종대왕과 함께 가장 위대한 대왕으로 꼽히는 정조대왕 이산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을 「승정원일기」에서 삭제했다. 그래서 영조실록에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특히 연산군일기광해군일기승자가 기록한 역사다.

중종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은 7일 만에 중종의 왕비(단경왕후)를 폐위시키고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피 터지게 싸운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도 조선에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크나큰 선물?을 안겨줬고, 이들도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피 터지게 싸웠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은 자신들의 반정 명분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을 폄하하고 과장하여 기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의 3대 악녀(요부)로 분류되는 여성 중에 장옥정은 희빈에서 왕비(무품계)로 올랐다 다시 희빈(정1품)으로 강등된 여인이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후궁(종3품)이었고, 김개시는 선조와 광해군 때 상궁(정5품)이었다.

정난정은 노비에서 외명부 정1품 정경부인까지 오른 여인이다.

 

 

 

 

왕비는 조선의 국모로 무품계로 내명부(궁중 여인)와 외명부(궁궐 밖 여인)를 통솔한다.

 

외명부는 왕비의 어머니와 왕족, 문무 신료들의 부인 등 정1품에서 종9품까지 봉호를 받은 여인들이다. 

내명부에 속한 임금의 후궁은 정1품 빈에서부터 종4품 숙원까지 있으며, 상궁의 품계는 정5품부터 종9품까지 있고, 품계가 없는 일반궁녀도 있다.

 

 

 

 

조선의 3대 악녀(요부)로 아직도 회자하고 있는 장녹수, 정난정, 김개시(김상궁), 장희빈(장옥정)의 악행은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지만, 권력을 전횡한 것은 사실이다.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출생연도 미상~1506)

 

장녹수는 노비에서 연산군의 후궁이 된 여인이다.

 

장녹수는 조선 8대 왕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제2계비) 사이에서 태어난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기녀가 된 장녹수는 춤과 노래에 능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후궁이 되어 종4품 숙원(淑媛)에서 종3품 숙용(淑容)을 거쳐 정3품 소용(昭容)에까지 올랐다.

장녹수의 언니 가족은 양인이 되었고 형부 김효손은 함경도 전향 별감이 되었다.

 

 

 

권력을 전횡했다는 장녹수가 정3품의 소용까지 밖에 못 올라갔고, 형부도 지방의 미관말직인 별감까지 밖에 못 올라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장녹수를 시집도 여러번 가고 몸을 팔아서 생활한 요사스럽고 거만하고 탐욕에 눈먼 요부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연산군과 장녹수를 폐위시키고 죽인 중종반정세력들도 권력을 전횡했다.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출생연도 미상 ~1565)

 

 

정난정은 노비에서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첩실에서 정1품의 정경부인이 되었다.

명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든 문정왕후와 권력을 전횡한 윤원형의 부인이다.

 

 

중종의 제2계비(왕비)이며 명종의 어머니 파평 윤씨 문정왕후와 동생 윤원형과 요부 정난정

http://gdlsg.tistory.com/1552

 

 

 

 

 

 

 

 

 

 

 

 

 

 

 

선조와 광해군 때 상궁 김개시(출생연도 미상 ~ 1623)

 

승자의 역사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에는 김개시(김상궁)가 선조를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김개시를 흉악하고 천하의 탕녀(蕩女, 음탕한 여자), 천하에 나쁜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김개시는 노비에서 궁녀로 들어와 선조의 승은을 입고 승은 상궁이 되었다.

궁녀가 임금에게 승은을 입었다 하더라도 후궁이 되지 않은 이상 상궁은 정5품 이상의 품계를 받을 수 없다.

  

 

 

 

실록에서는 선조의 승은을 입은 김상궁(김개시)이 광해군의 사랑도 받았으며, 조카사위 정몽필과 정을 통하고 궁중으로 불러들이기도 하였다며 왕실을 농락 요부로 말하고 있다. 아버지 선조의 여자 김상궁(김개시)을 광해군은 자신의 후궁으로 삼은 천하의 패륜아로 만들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왔으며 인조반정의 명분이었던 페모살제(廢母殺弟), 즉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의 죽음에도 관여했다. 온갖 구실로 뇌물을 받아 부정 축재하였으며 매관매직을 일삼았고 이이첨과 결탁하여 권력을 전횡했다.

정업원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을 알고 민가에 숨어 있다 잡혀 참수되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

http://gdlsg.tistory.com/1534

 

 

 

 

 

 

 

 

 

 

 

 

 

19대 왕 숙종의 왕비, 20대 왕 경종의 어머니 장옥정(장희빈, 1659~1701)

 

장희빈(장옥정)은 궁녀에서 숙종의 아들 경종을 낳고 왕비가 되었다.

 

역관의 딸로 태어난 장옥정(장희빈)은 궁녀로 입궁하였다가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출궁 된다.

명성왕후가 승하하고 숙종이 장옥정(장희빈)을 다시 입궁시켜 총애하였고 정4품 숙원으로 봉하면서 후궁을 만든다.

이후 정2품 소의(昭儀), 정1품 빈(嬪)으로 올라갔다.

 

 

 

정품 빈(嬪)까지 올라간 장희빈(장옥정)은 1688년 조선 20대 왕 경종을 낳는다.

1689년 숙종이 인원왕후를 폐하고 원자(경종)의 생모 장희빈(장옥정)을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인다.

장옥정은 5년 간 왕비로 재위하다 1694년 후궁으로 강등된다.

 

 

 

경종과 영조 이전에는 양인도 궁녀가 될 수 있었지만, 이후에는 제도적으로 양인은 궁녀가 될 수 없도록 하였다.

 

 

 

장희빈은 역관의 딸로 궁녀가 되어 숙종의 총애를 받고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왕비가 되었다.

숙종은 1701년 질투와 모해(謨害, 꾀를 써서 남을 해침)의 죄를 물어 장희빈에게 자진하라고 한다.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와 복위, 장희빈의 폐위는 환국 정치와 연결되어 있다.

변죽이 죽 끓듯 하는 조변석개(朝變夕改)의 숙종에 의해 왕비가 되었다가 희빈으로 강등되어 사사된다.

 

 

 

조선 19대 왕 숙종의 제2계비(왕비) 희빈 장씨(장희빈, 장옥정)

http://gdlsg.tistory.com/1538

 

 

조선 20대 왕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

http://gdlsg.tistory.com/1539

 

 

 

 

 

 

 

 

 

 

 

 

 

 

연산군의 후궁 장녹수와 선조와 광해군 때 상군 김개시에 대한 일기(실록) 내용 일부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25일(1502년) - 장녹수

 

장녹수는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가비(家婢)였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의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寵愛)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얼굴은 중인(中人) 정도를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사(巧詐)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으므로, 왕이 혹하여 상사(賞賜)가 거만(鉅萬)이었다. 부고(府庫)의 재물을 기울여 모두 그 집으로 보내었고, 금은 주옥(金銀珠玉)을 다 주어 그 마음을 기쁘게 해서, 노비·전답·가옥도 또한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광해군일기』 69권 광해 5년 8월 11일(1613년) - 김상궁(김개시)

 

김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 춘궁의 옛 시녀로서 왕비를 통하여 나아가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인하여 비방(祕方)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으므로 후궁들도 더불어 무리가 되는 이가 없었으며, 드디어 왕비와 틈이 생겼다.

 

 

『인조실록』 3권 인조1년 9월 14일(1623년)

 

궁첩의 폐해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을까마는 폐조 때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김씨는 곧 이른바 김 상궁인데 일찍이 선조의 후궁으로 있다가 뒤에 폐주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무신년067) 선조의 승하 당시 약밥에다 독약을 넣었다는 말도 있었다.

 

적신 이이첨이 김씨에게 빌붙어 흉모 비계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내외의 크고 작은 벼슬이 모두 김씨와의 협의를 거친 뒤에야 낙점을 받았으므로 권세가 온 나라를 기울였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대부로서 빌붙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이이첨·성진선(成晉善)의 부자·박홍도(朴弘道) 등인데, 김씨가 이들의 집을 무상 출입하였는가 하면 추한 소문이 파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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