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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한중록

by 도생(道生) 2016. 10. 19.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대왕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헌경왕후와 헌경의황후로 추존)가 쓴 한중록

 

 

 

 

 

 

 

 

 

 

 

 

 

 

 

조선 21대 왕 영조대왕 이금은 비천한 무수리(숙빈 최씨)의 몸에서 태어났으나 노론의 지지를 받고 왕으로 즉위하였다.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대왕 이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노론의 영수다.

 

 

홍봉한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고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좌의정을 지냈다.

영조가 탕평책으로 노론과 소론을 조정에 고르게 등용하였지만, 국정은 노론이 주도하고 있었다.

 

 

 

 

1728년(영조 4)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인좌의 난은 소론과 남인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1744년(영조 20) 영조대왕 이금과 후궁 영빈 이씨 사에서 태어난 왕세자 이선(사도세자, 1735~1762)이 홍봉한의 딸 풍산 홍씨(1735~1816)와 10살에 가례를 올린다.

 

 

1749년(영조 25) 56세의 영조는 15세의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지만 실제 영조가 모든 것을 좌우하였다.

14년 동안 대리청정을 하였던 사도세자는 정국을 주도한 노론 중심에서 소론도 등용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1750년(영조 26) 사도세자와 혜경군 홍씨 사이에서 큰아들 이정(의소세자, 1750~1752))가 태어났으나 3살에 요절하고 만다.

1752년(영조 28)에 혜경궁 홍씨는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정조대왕 이산(1752~1800)을 낳는다.

 

 

1755년(영조 31)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나주벽서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가 숙청된다.

나주벽서 사건을 계기로 영조의 탕평책은 균형이 무너지고 노론이 정국을 주도한다.

 

1759년(영조 35) 왕세자 이선(사도세자)과 세자빈(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 이산(정조)이 왕세손으로 책봉된다.

  

 

 

 

 

1762년(영조 38) 영조대왕 이금의 아들 왕세자 이선이 폐서인 되어 28살 젊은 나이에 뒤주 속에 갇혀 죽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대왕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1760년(영조 36) 초부터 정신병이 심해져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하였다.

 

 

『한중록』에 기록된 내용은 혜경궁 홍씨가 친정을 위한 변명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비록 야사지만 당시의 치열했던 정치상황을 잘 기록한 궁중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폐하는 장면을 기록한 『영조실록』에 쓰여있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의 정신병(광증)과 기행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사도세자와 장인 홍봉한(혜경궁 황씨 아버지)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사도세자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고 좋은 약을 장인이 보내달라는 내용이 있다. 사도세자는 자신의 병세도 알고 있었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영조가 나경언 사건(1761년, 영조 37)으로 사도세자를 폐하기로 하고 고민 중이다가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가 밀고하여 세자를 폐하였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악행을 밀고하고 아버지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고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남편을 정신병자로 몰았다.

 

 

 

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 99권(1762년 윤 5월 13일)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무인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한번 나경언(羅景彦)이 고변(告變)한 후부터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 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 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인륜과 천륜은 근본이다.

 

자연(천리天理)과 인간의 질서, 윤리와 도덕적 가치를 근간으로 한 성리학은 조선의 통치이념이다.

그런데 조선의 최고통치자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죽여 천륜을 끊어버린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주장은 많지만, 어느 것이 사실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여 정치적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는 설,

사도세자가 『한중록』에 쓰여진 것처럼 비행을 알삼는 파렴치한이며 정신병이 있어 100여 명을 죽인 살인마였다는 설,

치열한 당쟁 경쟁에 희생되었다는 설, 사도세자가 역모를 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사도세자에게 과도한 기대와 경계심을 가졌고 왕권을 강했던 영조와 정국을 주도한 노론 세력은 사도세자와 마찰이 심했고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갔다.

당시 경주 김씨(정순왕후)와 풍산 홍씨(혜경궁 홍씨) 외척 세력과 노론과 소론, 남인과 소북 등 당쟁 경쟁이 치열했다. 

 

 

 

실록에는 사도세자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서인 시켜 뒤주 속에 가둬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이 죽자마자 생각 사(思), 슬퍼할 도(悼),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려 복권을 명하였다.

아무리 폐위와 복위가 왕의 직권이라지만 큰 죄를 지어 죽인 죄인을 불과 며칠 만에 시호를 내려 복권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다.

 

  

 

 

 

 

 

 

 

1774년(영조 50) 왕세손 이산이 할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한다.

1776년(정조 즉위년) 정조대왕 이산은 즉위와 함께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의 시호를 올린다.

 

 

조선 26대 왕 고종은 사도세자를 장종대왕으로 추존하였고, 대한제국 선포 후 장조의황제로 추존하였다.

혜경궁 홍씨도 사도세자가 왕과 황제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와 헌경의황후로 추존되었다.

왕이 되지 못한 사도세자와 왕비가 되지 못한 세자빈 혜경궁 홍씨는 사후 황제와 황후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논란이 많은 책이다.

야사(野史, 개인이 쓴 역사서) 한중록의 저자 혜경궁 홍씨(1735~1816)는 노론의 영수 풍산 홍홍봉한과 한산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며느리로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자신의 출생부터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궁궐에 들어와 겪은 약 60여 년의 생활을 기록한 책으로 개인의 회고록이며 야사(野史)다.

 

 

 

 

 

 

 

 

 

 

 

 

 

『한중록』은 여러 차례에 나누어 쓰였다.

친정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1795년(정조 19) 남편 사도세자의 회갑연 때 쓰였고(61세), 67세가 되던 1801년(순조 1), 68세가 되던 1802년(순조 2), 71세가 되던 1805년(순조 5년)에 각기 쓰였다.

 

 

 

사도세자의 부인이며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처음(1795년, 정조 19) 『한중록』을 쓸 때는 사도세자를 비방한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정조대왕 이산이 승하하고 나서 아들 순조가 재위 중 일때 쓰인 『한중록』에는 시아버지 영조와 남편 사도세자에 대한 온갖 비방이 나온다.

 

 

 

 

시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만들고 죽인 장본인이며, 남편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이고 자신의 친정 식구는 아무런 죄가 없다는 내용이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이며 외할아버지인 홍봉한과 동생 홍인한 형제를 역적으로 지목하여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관직에서 파하 작은아버지 홍인한은 유배 보내 사사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1권(정조 즉위년, 1776년 3월 27일)

 

우리 전하께서 저이(儲貳)의 자리에 계시며 인효(仁孝)하다는 소문이 현저했었는데, 저 홍봉한이 가까운 친척으로서 지척(咫尺)의 면전에서 방자하게 흉악한 말을 발하였습니다.

 

하물며 전하께서 지키시는 바는 의리의 올바른 것이었고, 홍봉한이 말하는 바는 괴귀(怪鬼)한 것이었는데, 그가 감히 자신의 계책이 쓰이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며 원망하여 그런 더없이 패악한 난언(亂言)을 했었으니, 이는 그가 평소에 무군(無君)의 마음을 가슴 속에 두고 있다가 외부에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홍인한(洪麟漢)이 대저 청정을 방해하였던 것도 또한 형제간이 함께 죄악을 저질러 간 것인데, 지금 그대로 버젓이 도성(都城)에 살고 있으면서 사당(死黨)을 배치해 놓았으므로, 백성들의 마음이 의구하게 되고 세도(世道)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깊은 구중 궁궐에 계시는 전하께서 어떻게 이처럼 경황없는 실상을 모두 통촉하실 수 있겠습니까?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하나의 평범한 임금이었습니다만, 박소(薄昭)의 죄가 흉악한 반역에 이르지는 않았는데도 오히려 능히 은혜를 끊고서 의리로 결단을 했었습니다.홍봉한은 곧 임오년의 역적이고 전하의 역적입니다. 어찌 척속(戚屬)의 정의(情誼)에 얽매어 삼척(三尺)의 형률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시급히 홍봉한의 죄를 바로잡게 하소서."

 

 

 

 

『한중록』이 사실이라면 아무 죄 없는 홍봉한을 내쫓고 홍인한을 죽여 역적을 만든 정조는 사적으로 보면 천하의 불효자이며 집안의 원수다. 

 

 『한중록』을 학자라는 사람들이 볼 때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시아버지, 남편, 아들 3대가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친정 식구를 죽인 장본인으로 지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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