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혼을 가진 참 군인의 표상이며 한韓민족의 불멸의 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동방에서는 예로부터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생사화복과 깨달음, 불로장생과 부귀영화와 함께 사람이 죽은 사후(死後, 영혼)의 삶까지를 주관하는 별로 우주의 주재자(상제님), 하나님이 계신 별 북두칠성을 극진하게 섬겨왔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순흥(順興) 안(安)씨 26대손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백천 조씨 사이에서 장남(3남 1녀)으로 태어난 어린 안중근의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北斗七星)의 흑점이 있었다.
집안에서는 북두칠성의 기운이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안중근의 아명을 안응칠(安應七)이라 지어 불렀다.
안중근 의사는 1894 갑오년 김아려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며, 당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아버지 안태훈을 도와 진압하기도 했다. 이때 동학접주로 있던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만남은 우리 항일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19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을 하게 된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아버지 안태훈 마저 돌아가시자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를 설립해 문무쌍전에 입각한 민족 교육을 하는 한편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초대 조선 통감으로 있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 고종황제(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며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강제 점령하기 위한 예비 조치 정미(정미) 7조약을 맺게 된다.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와 부인, 첫째와 둘째, 그리고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안중근 의사의 당시 심정을 대변하며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누가 처자를 어여삐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열사가 나라를 위함에는 가족까지 희생하는 법이니, 나라 사랑과 아내 사랑은 서로 같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간도를 지나 연해주로 온 안중근 의사는 의인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부대를 창설해 300여 명을 지휘하는 참모중장이 되어 의병들의 훈련과 사상교육을 하며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인간 안중근에서 위대한 영혼을 가진 참 군인의 표상으로 대한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염원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한민족 불멸의 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동의회 부대는 수차례의 전투 끝에 회령군 영산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를 당하며 러시아 엔치아(노우키에프스크) 피신하게 된다.
생사를 같이하며 조국독립 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11명이 단지동맹(斷指同盟, 정천동맹正天同盟)을 한다.
단군기원 4242년 음력 2월 7일, 서력 1909년 기유년 2월 26일, 러시아 엔치아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로 자신의 외손 무명지를 자르고 태극기 위에 피로 혈서를 썼다. 단지동맹은 일본군에 의해 패배로 떨어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과 동지들의 위상 회복과 국권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등박문이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열렬히 외치는 환영 인파에서 나와 발사한 총에서는 일곱 발의 총성이 울렸다.
특별열차를 타고 나온 이등박문의 가슴에 네 발을 발사하여 세 발이 이등박문에 명중하고 나머지 세 발은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주 철도 이사를 쏘았다. 나머지 한 발은 다음 전쟁을 위해 남겨 놓았으며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라고 세 번을 외친 후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순순히 잡힌다.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 하기전 이미 7월 6일에 일본 각의에서는 대한제국 병탄을 의결하고 일왕의 재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와 중국(청나라)의 양해를 받기 위해 방문하였던 것이며, 몽골에 대한 지배권도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하려고 했었다.
참 군인의 표상이며 위대한 영혼을 가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사형집행일에 그동안 경비를 섰던 일본군 헌병 도시치가 휘호를 부탁한 일이 생각나서 즉석에서 책상 위에 비단 천을 펴놓고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한 뒤 글을 썼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흰 명주 저고리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우리 대한제국이 독립해야 동양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한민족 불멸의 혼이 되어 순국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한남아로서의 기개와 당당함을 잃지 않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심과 의기로 소중한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
동양의 평화를 넘어 세계평화와 인류의 평화 행복을 추구한 인간 안중근!
진정으로 위대한 영혼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참 군인의 표상이다.
안중근 장군이 동생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겠다는 장군의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든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의 유해는 순국한지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였으며, 광복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장군의 주인없는 가묘만 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열사(烈士)와 의사(義士)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열사(烈士): 맨몸으로써 정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
의사(義士):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표준한국어국어사전에서는 열사와 의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열사(烈士):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의사(義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재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의로운 사람
안중근 의사는 순국하는 그날까지 시종일관 자신을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등박문을 처단하면서 만국공법에 의해 전쟁포로의 자격으로 대우받기를 원했고 순국하는 그날까지 대한의군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의 수괴를 처단했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이 뒤를 이어 극렬한 무장 투쟁이 있었다.
이에 대한제국의 무력은 의병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그 선봉에 안중근 장군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안중근 장군이 일제와 전쟁을 벌였던 대한제국 장교의 신분으로 이등박문을 처단했기 때문에 '의사'나 '열사' 보다는 '장군'이란 호칭이 도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처럼...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1910년 경술 2월 15일 사형선고 이튿날 작성한 유언)
남아유지출양외
男兒有志出洋外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사불입모난처신
事不入謨難處身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망수동포서유혈
望須同胞誓流血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막작세간무의신
莫作世間無義神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회령군 영산 전투에서 참패한 후 안중근 장군이 상심한 대원들을 격려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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