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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30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정승 태종 이방원과 위대한 임금 세종대왕이 중용(重用)한 조선의 명재상 황희정승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정승은 24년간 정승 자리에 있었고, 18년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고 조선의 명재상으로 알려진 방촌 황희정승도 예외는 아니다. 태종 이방원(1367~1422)과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1397~1450)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 정승(1363~1452) 역시 90평생 동안 많은 공과가 있다. 그러나 방촌 황희정승의 90년 인생 중 관리로서 개인의 사리사욕보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 쌓은 공(功)이 과(過)보다 월등히 크고 많아서 당대와 후대에 조선의 명재상으로 보고 있다. 방촌 황희가 고려 조정에 출사할 때는 고려가 망국으로 .. 2016. 11. 30.
만고역적이 된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 복권되지 못하고 만고역적이 된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 하늘이 낸 괴물, 천지 사이의 한 괴물, 역적 괴수, 개혁 사상가, 개혁적 정치인, 천재 문인이며 학자, 혁명적 지식인, 인본주의자, 실패한 혁명가, 조선의 이단아, 실학의 선구자,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 시대를 앞서 간 비운의 천재, 시대를 앞서 간 진보적 사상가, 자유주의자, 시대의 풍운아 등은 교산 허균을 지칭하는 말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의 천재 허균(1569~1618)은 1618년(광해군 10) 모반을 획책했다고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당했다. 1910년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끝내 복권되지 못해 역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만고역적(萬古逆賊) 남아버렸다. 조선의 천재 교산 허균은 어려서 누나 허난설헌과 함께 서자출신.. 2016. 11. 29.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 허난설헌 조선 시대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 16세기 조선 시대 강원도 강릉출신 4명의 남녀가 각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신사임당 신인선(1504~1551)과 율곡 이이(1537~1584) 모자(母子)와 교산 허균(1569~1618)과 허난설헌 허초희(1563~1589) 남매(男妹)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남성은 학자와 정치가였으며, 두 여성은 화가와 문인이었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은 동인의 영수였으며, 20살 아래인 율곡 이이(1537~1584)는 서인이다. 허엽은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사이에서 3남 3녀를 두었고 허균과 허난설헌은 셋째 아들과 셋째 딸이다. 비운의 천재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 외에도 허씨 집안에서 이름을 알려진 형제가 더 있다. 허엽의 첫째 부인 청.. 2016. 11. 28.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허초희)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불리는 허난설헌(허초희)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누나 허난설헌(허초희)의 아버지 초당 허엽(1517~1580)은 사림(선비)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할 때 참여하였고, 후에 동인의 영수가 된다. 허엽은 종2품의 경상도 관찰사와 동지중추부사까지 지냈다. 소금 대신 바닷물을 간수로 하여 만든 초당 두부를 초당 허엽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한다. 허균(1569~1618)과 누나 허난설헌(허초희, 1563~1589)은 허엽의 둘째 부인 강릉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과 셋째 아들이다.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불리는 허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다고 전한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의 천재성은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초당 허엽도 동인의 .. 2016. 11. 27.
허균 홍길동전 조선왕조 최초의 한글(국문) 소설 허균의 『홍길동전』 허균(1569~1618, 선조 2~광해군 10)이 집필한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은 연산군 때 가평과 홍천 일대에서 활동했던 강도 홍길동을 의적 홍길동으로 묘사하였다. 도적 홍길동은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 때 실존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실존인물 홍길동은 일반범법자가 아닌 역모 등 중죄인을 다루는 의금부에서 체포하고 수사받은 국사범(國事犯)이다. 연산군 6년(1500) 10월 22일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홍길동에게 어떠한 처벌이 내려졌는지 기록은 없다. 연산군 6년(1500) 12월 21일 '엄귀손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홍길동과 내통했다고 알려진 당상관 .. 2016. 11. 26.
현모양처 신사임당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며 문인과 화가로 활동한 현모양처의 모범이 된 신(申)사임당 신인선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사대부 아녀자로 당호(堂號)와 이름 석 자가 모두 알려진 여성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조선 시대 여성 중 호(號)와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여성은 현모양처의 상징이 된 신사임당 신인선이다. 사대부 아녀자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인수대비(소혜왕후, 1437~1504)는 훈민정음(언문), 한어(漢語, 중국어), 산스크리트어(범어)에 능했고, 유교의 경전뿐만 아니라 불경에도 조예가 깊은 조선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었다. 인수대비는 청주 한씨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문인으로 화가로 유명해진 신사임당은 평산 신씨로 본명은 신인선(申仁善, 1504~1551)이다. 당호(堂號)는 스스로 .. 2016. 11. 25.
율곡 이이와 이순신장군과 백사(오성) 이항복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리고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 율곡 이이(1536~1584)와 충무공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덕수 이씨이며, 오성대감으로 잘 알려진 백사 이항복(1556~1618)은 경주 이씨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과거에서 아홉 번 급제한 신화의 주인공 율곡 이이는 명종 19년(1564)에 관직에 나갔고, 이조판서(정 2품)직을 마지막으로 선조 17년(1584) 세상을 떠났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선조 9년(1576)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선조 31년(1598) 삼도수군통제사(종 2품)로 임진왜란 끝자락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백사 이항복은 선조 13년(1580)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고, 선조 33년(1600)에 영의정에 .. 2016. 11. 24.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조선왕조실록) 진실일까? 거짓일까?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통해 본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十萬養兵設) 진위(眞僞) 논쟁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 수많은 사건과 인물이 있다. 5백 년 조선왕조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사관(史官)이 일종의 논평 같은 주관적인 견해를 적은 의견으로 사론(史論)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론(사필史筆)은 특별한 서술방식으로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가치 중에 하나다. 때론 임금과 신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필(사론)은 두려움이 대상이기도 했다. 사론은 사건과 인물에 대해 사실에 근거하여 논평을 쓴 예도 있겠지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여론이 아닌 집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한계도 있다. 율곡 이이는 명종 재위 말기에 조정에 출사하여 선조 재위 중기까지.. 2016. 11. 23.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2)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申仁善) - (2) 율곡 이이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에서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한 신화 같은 이야기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의 주인공이 바로 율곡 이이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1501~1561)는 50세에 이르러 음서(蔭舒)로 관직에 나갔다. 남다르게 총명했던 율곡 이이와 현명한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의 가르침 아래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율곡 이이의 성장기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총명하고 영특한 아이라고 해도 부모님 또는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그 영재의 천재성은 묻힐 수도 있다. 율곡 이이의 총명함과 천재성은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조선 시대 과거에.. 2016. 11. 22.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1)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申仁善) -(1)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계 성혼(1535~1598, 중종 30~선조 31), 구봉 송익필(1534~1599, 중종 29~선조 32), 율곡 이이(1537~1584, 중종 32~선조 17) 3명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학문을 논하고 돈독한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 세 사람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35년간 학문적 교류와 우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는 후대에 『삼현수간(三賢手簡)』으로 만들어졌고, 보물 14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모자(母子)는 대한민국 화폐 초상에 함께 등장한다. 율곡 이이는 오천 원짜리 지폐.. 2016.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