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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진리眞理

증산도 진리 - 증산도 도운(道運) 100년 개척사 제2 부흥 역사, 종통과 도통맥) (2)

by 도생(道生) 2013. 4. 2.

증산도(甑山道) 3변(三變) 도운(道運) 100년 개척사

도운시대(長) - 증산도 제2부흥기

 

도통맥(道統脈)과 종통맥(宗統脈)

 

 

1911년~1936년 : 제1변도운(生) = 태모고수부님

1936년~1945년 : 10년휴게기 = 중일전쟁, 2차대전.종교탄압

 

1945년~1954년 : 제2변도운(長) = 안운산 태상종도사님

1954년~1974년 : 말도 귀향 도수(20년 휴게기) = 6.25 전쟁(혼란기)

 

1974년~현 재 : 제3변도운(成) = 안운산 태상종도사님,

                                          안경전 종도사님

 

 

내 일은 삼변성도(三變成道)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5:356)

 

"삼천(三遷)이라야 내 일이 이루어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6:64)

 

제1변 도운의 종통과 도통의 주역이셨던 태모 고수부님께서 선화하시고(1935년) , 1936년 보천교의 교주인 차경석 성도가 죽자 교단은 크게 와해되었다. 세계정세는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운으로 접어들고,도운은 일제에 의한 민족종교 탄압으로 10년간의 휴게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변 도운(道運)에서 2변 도운으로의 실제적인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결정적인 요인은 일제의 격렬한 탄압이었다.

 

당시 일본은 증산상제님을 신앙하는 신도들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조직으로 규정하여 1936년 4월에 조선총독부에서 증산계 모든 교단에 대해 해체 명령을 발표하고 포교와 일체의 신앙행위를 금지시키면서 철저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모든 교단은 해산되었으나 당시의 신도들은 지하로 모여들어 수십 명, 수백 명이 무리를 지어 은밀한 신앙생활을 해 나갔는데, 이 때 체포되어 옥사를 당하거나 온갖 혹독한 고문으로 죽음을 당한 신도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이는 일본이 물러가는 1945년까지 10년 간 계속되었다.

 

 

<대두목이 강세하는 때>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대인의 행차에 삼초(三招)가 있느니라.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일초가 되었고, 갑진(甲辰 : 道紀 34, 1904)년에 이초가 되었고, 손병희(孫秉熙)는 삼초를 맡았나니 삼초 끝에는 대인이 나오리라.” 하시고 손병희의 만사(輓詞)를 지어 불사르시니 이러하니라.

(증산도 도전 6:122)

 

잠자던 개가 일어나면 산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 있나니

태인 숙구지(宿狗地) 공사일을 돌리리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공신에게 글 한 수를 읽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孤忠一代無雙士니 獻納三更獨啓人이라
고충일대무쌍사 헌납삼경독계인
평생의 외로운 충절은 필적할 선비가 없으니

삼경까지 충언을 올리는 사람 오직 그 혼자뿐이네.

(증산도 도전 6:75)

 

때가 오면 한 사람이 먼저 도통을 받나니

이는 만도(萬道)가 귀일(歸一)하는 천명이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도통줄은 대두목에게 주어 보내리라.

법방(法方)만 일러 주면 되나니 내가 어찌 홀로 맡아 행하리오.

(증산도 도전 6:129)

이제 잠든 개를 깨웠으니 염려는 없다.”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1:215)

 

<용봉을 그려 종통 도맥을 전하심>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계실 때 천지에서 신도가 크게 내리매 여러 차례 용봉(龍鳳)을 그려 깃대에 매달아 놓으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용화동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 다시 용봉기(龍鳳旗)를 꽂아 두시고 이상호에게 이르시기를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하시고 “용봉기를 꼭 꽂아 두라.” 하시며 다짐을 받으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용화동은 동요동(東堯洞)이요, 건곤(乾坤)의 사당(祠堂) 자리이니 미륵이 다시 서니라.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나니 법은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것 아니더냐.

앞으로 태전(太田)이 서울이 되느니라.” 하시고

사람 욕심 내지 마라. 올바른 줄 하나 치켜들면 다 오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11:365)

 

상제님께서는 1922년 임술년에 대인이 출세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손병희는 1922년 임술년 5월에 死).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대인은 대두목(大頭目) 이외에는 해당되는 사람이 없다.

1922년생이면 1936년에 15살에 해당하니 아직 상제님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어리다. 그리고 또한 국권을 빼앗긴 시대이므로 상제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기간이요, 국권을 회복하여 새로운 도운의 터전을 마련하는 시간대인 것이다.

 

 

증산도 100년 도운(道運) 개척사

도운시대(長) - 증산도 제2부흥기

 

수부는 선천 세상에 맺히고 쌓인 여자의 원(寃)과 한(恨)을 풀어 정음정양의 새 천지를 여시기 위해 세우신 뭇 여성의 머리인간과 신명의 어머니시니라.

대두목(大頭目)은 상제님의 대행자요, 대개벽기 광구창생의 추수자이시니

상제님의 계승자인 고수부님께서 개척하신 무극대도 창업의 추수운을 열어 선천 인류문화를 결실하고 후천 선경세계를 건설하시는 대사부(大師父)이시니라.
(증산도 도전 6:2)

 

<내 일을 할 사람은 다시 나온다>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나하고 일할 사람이 없느니라.

내 일을 할 사람은 뒤에 다시 나오느니라.

이제 나와 같은 사람이 나온다. 뛰어나는 사람이 있다.

알려고 힘쓰지 말고 시대가 돌아가며 가르치는 시기를 봐라. 이제 곧 돌아오느니라.

썩은 고목에서 새순이 돋아나서 내 일을 이루느니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형렬을 부르시더니 “늦게 오는 자를 상등 손님으로 삼으리라.” 하시니라.

<도운 개척기 대사부(大師父)의 고난 도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초막(草幕)에서 성인이 나오느니라.

삼천(三遷)이라야 내 일이 이루어지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6:64)


<큰스승은 따로 있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이 아무리 별스러워도 나를 따르는 자들의 선생밖에는 못 되느니라.

나의 일은 판밖에 있나니 뒤에 큰스승이 나와 천하창생을 가르치리라.” 하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내 일은 꼭 된다. 물샐틈없이 꼭 된다.”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6:65)

 

<대사부는 개척의 첫발을 용화동에서>

하루는 공우를 데리고 용화동(龍華洞)을 지나며 이르시기를 “이곳이 곧 용화도장이라.

이 뒤에 이곳에서 사람이 나서거든 부디 정분을 두고 지내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6:66)

 

 

 

                                   

 

 

 

<전라도 김제 용화동에서의 제2변 도운>

 

제2변의 도운은 상제님과 태모님의 말씀처럼 용화동에서 새 인물을 중심으로 부흥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4대 자유가 보장되는 새 시대가 도래하였고, 이러한 시운을 타고 사해(四海)를 주유(周遊)하시며 때를 기다려 오시던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 기두(起頭)하셔서 1945년 음력 8월 15일 추석절에 상제님의 이념을 새로이 선포하시고 포교(布敎)에 진력을 다하셨다.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이 때 증산교(甑山敎)라는 교단의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태모님께서 1변 도운시 2변 도운을 여실 인사의 주인을 천지공사로써 미리 준비하셨다.

 

태모님께서 용화동에 계실 때 천지에서 신도가 크게 내리매 여러 차례 용봉(龍鳳)을 그려 깃대에 매달아 놓으시고 공사를 행하시더니

용화동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 다시 용봉기(龍鳳旗)를 꽂아 두시고 이상호에게 이르시기를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하시고 “용봉기를 꼭 꽂아 두라.

 (증산도 도전 11:365)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 제2변 도운을 용화동에서 시작하심으로써 태모님의 용봉기 공사가 실현되었다.

 

2변 도운의 대표는 이상호(李祥昊)였으나 그는 청맹과니(靑盲,맹인)로서 포교의 일선에 나설 수가 없었고,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인사(人事)의 대권(大權)은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이 가지고 계셨다.

(수십만 신도의 총사수(뿌리)가 안운산 태상종도사님 이셨다.)

당시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최일선에서 포교에 몸소 뛰어드시어 황무지와 다름없던 당시의 교운(도운)을 거의 혼잣몸으로 부흥시키셨던 것이다.

 

<2변과 3변 사이의 20년 간 과도기>

2변의 도운은 1950년에 터진 6·25전쟁을 계기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2변의 도운이 문을 닫고 3변의 도운이 열리는 과정을 말도(末島) 공사로 다음과 같이 처결하셨다.

 

<상제님 대행자의 20년 은둔 도수>

“내가 이제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귀양 감이라.

20일 만에 돌아오리니 너희들은 지방을 잘 지키라.” 하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는 대삿갓에 풀대님 차림으로 섬에 들어가시어 20일 동안 차마 겪기 어려운 고생을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6:22)

 

이 공사는 도운의 지도자가 2변 도운과 3변 도운 사이의 20년 간의 은둔의 도수이다.

6·25전쟁 후 전 국토는 황폐화되고 국민들의 생활은 먹고 살기에도 벅찬 시기였다. 따라서 증산도를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켜 역사의 매듭을 짓는 신앙운동으로 성장시키기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2변을 극복하고 도운에서도 진법이 출현할 수 있는 사회의 발전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20년 간의 과도기는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말도 귀양도수는 마지막 도운의 과정을 준비한다는 의미이다.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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