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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by 도생(道生) 2016. 12. 6.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조선 7대 왕 세조, 예종, 성종 재위 시 많은 정승이 있었지만, 수양대군(1417~1468)이 계유정난부터 보위에 오르까지 최측근에서 맹활약하여 재상(정승)까지 오른 3인방이 있다.

 

세조의 장자방 한명회(1415~1487), 위징 신숙주(1417~1475), 좌장 권람(1416~1465)은 세조(1417~1468)의 3대 권신(權臣)으로 불린다.

 

 

 

세조는 한명회를 장자방(장량)이라고 치켜세웠다.

장자방(장량)은 한나라 고조 유방의 책사로 한나라 창업에 일등공신이다.

장량(장자방)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한고조 유방의 곁을 떠나버렸다.

 

 

세조는 신숙주를 자신에게 당나라 명재상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다.

위징은 당나라 태종에게 직언하는 충직한 신하다.

당태종은 위징이 죽자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을 잃었다.'라고 하며 슬퍼했다.

 

 

권람은 세조의 좌장(座長, 우두머리)격으로 수양대군에게 책사 한명회를 소개하고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한명회, 신숙주, 권람은 단종대왕에게는 역적이지만, 세조에게는 충직한 신하다.

 

 

 

 

 

 

 

 

 

 

 

 

 

 

세조의 최측근 3인방 위징 신숙주, 좌장 권람, 장자방(장량) 한명회는 모두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승지직을 거쳤다.

세조의 최측근 3인방 권람, 신숙주, 한명회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관직에 함께 제수된 적이 있었다.

 

 

 

세조의 위징 신숙주는 1462년(세조 8) 5월 20일에 영의정 관직에 제수된다.

세조의 좌장 권람은 1462년(세조 8) 5월 20일에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차한다.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는 1466년(세조 12) 10월 19일에 영의정 관직에 제수된다.

신숙주와 한명회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자리에 올랐지만, 권람만 유일하게 영의정에 오르지 못했다.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 5월 20일(1462년)

신숙주를 영의정으로, 권남을 좌의정으로, 한명회를 우의정으로 삼았다.

 

 

수양대군(세조)과 권람의 만남은 권람이 1450년(문종 즉위년) 집현전 교리로 있을 때였다. 

세종 때부터 시작하여 1456년(세조 2)에 간행역대병요』를 편찬하는데 같이 참여하면서 알게 됐다.

중국의 고대부터 조선 태조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전쟁사를 다룬 책이 역대병요歷代兵要다. 

 

 

 

 

 

 

 

 

 

 

 

 

 

 

 

 

세조와 한명회의 만남은 1452년에 권람이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를 추천하면서부터다.

한명회의 친구인 권람은 경덕궁(태조 이성계의 잠저) 지기였던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수양대군(세조)과 한명회는 권람의 소개로 만난 지 1년 2개월여 만에 계유정난(1453년 10월 10일)을 일으켰다.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7월 28일(1542년)

권남이 말하기를

"한명회는 어려서부터 기개가 범상하지 않고, 포부도 작지 않으나, 명(命)이 맞지 않아 지위가 낮아서 사람들이 아는 자가 없습니다. 공(公)이 만일 발난(拔亂)할 뜻이 있으시면 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영웅은 또한 둔건(屯蹇, 세상이 험악하여 처세하기 어려움)함이 많으니 지위가 낮은들 무엇이 해롭겠냐?

내가 비록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제 논하는 바를 들으니 참으로 국사(國士)로다. 내가 마땅히 대면하여 상의하겠다."

 

 

 

 

 

 

권람의 사위가 28세에 병조판서에 올라 역모죄로 죽은 남이 장군이다.

권람은 문무를 겸비했고 대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계유정난을 주도하고 공신이 되어 정치인의 걸어갔다.

 

 

세조의 장자방(장량) 한명회는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였다고 하니 학자로서의 자질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기획하고, 두 딸을 왕비로 만들어 자신의 부귀영화만 탐한 사람인 것을 보면 비상한 머리를 가진 전형적인 책사(策士, 모사)로 평가다. 연산군 때 폐비 윤씨 폐출 사건을 막지 않은 죄를 물어 부관참시를 당한다.

 

 

 

 

 

 

 

 

 

 

 

 

 

 

수양대군(세조)과 신숙주의 첫 만남은 알 수 없고, 두 사람의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의 대화를 하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8월 10일(1452년)

세조가 신숙주를 불러 그 마음을 떠보다

 

정수충(鄭守忠)이 세조의 집에 가니,

세조가 그와 더불어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침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申叔舟)가 문 앞으로 지나갔다.

세조가 부르기를, "신 수찬(申修撰)!" 하니, 신숙주가 곧 말에서 내려 뵈었다.

 

세조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 하는가?"하고,

이끌고 들어가서 함께 술을 마시면서 농담으로 말하기를,

"옛 친구를 어찌 찾아와 보지 않는가? 이야기하고 싶은지 오래였다. 사람이 비록 죽지 않을지라도 사직에는 죽을 일이다."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기를,

"장부가 편안히 아녀자(兒女子)의 수중(手中)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재가부지(在家不知)’라고 할 만하겠습니다." 하므로,

세조가 즉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중국으로나 가라." 하였다.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 9월 10일(1452년)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국정에 참여하지 아니하고 또 여러 재상이 있으니, 비록 두어 달 원행을 하더라고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물며 임금이 어리신데 종실 대신이 명을 받아 분주히 간다면 중국 조정에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체통이 있음을 알 것입니다."

 

 

 

 

1452년 9월 10일 수양대군은 명나라 사은사를 자청하였고,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는 사은사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함께 다녀왔다. 

 

세조가 신숙주는 자신에게 위징과 같은 존재라고 칭찬했지만, 신숙주는 변절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숙주는 집현전 출신의 천재 학자답게 8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전하며, 국조보감,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요절, 동국정운, 영모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 여러 서적 편찬과 교정, 찬수에 참여하였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3월 15일(1457년)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세조실록 31권, 세조 9년 10월 11일(1463년)

신숙주에게 명하여 술을 올리게 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과 신하로서는 당나라 태종이 위징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 없었다. 경은 나의 위징이다."

 

 

 

성종실록 209권, 성종 18년 11월 14일(1487년)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명회는 나의 자방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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