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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서애 유성룡 임진왜란 7년 기록 징비록

by 도생(道生) 2017. 1. 16.

동인과 남인의 영수 유성룡과 임진왜란 7년의 기록 징비록(懲毖錄)

 

 

 

 

 

 

 

 

 

 

 

 

 

 

서애 유성룡(1542~1607)은 퇴계 이황(1502~1570)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75년(선조 8) 사림 세력이 동서로 분당 할 때 퇴계 이황(남명 조식) 계열은 동인(東人)이 되고, 율곡 이이(우계 성혼)의 계열은 서인(西人)이 되었다. 사림 세력은 정치적으로는 동인과 서인, 학문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와 율곡 이이의 기호학파로 나뉘었다.

 

 

 

서애 유성룡은 1542년(중종 37) 아버지 유중영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564년(명종 19) 생원시와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1566년(명종 21) 별시에 각각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다.

 

 

정언, 병조좌랑, 부교리에 이어 1573년(선조 6) 정6품의 이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직제학, 부제학,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정여립 모반사건이 발단이 되어 1589년(선조 22) 조선왕조 5백 년 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기축옥사가 시작된다.

서인 송강 정철이 우의정에 제수되고 추국청 위관을 맡으면서 동인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다.

 

 

서인 세력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옮긴 정여립이 역모 사건을 준비했다고 하였고, 서애 유성룡은 동인임에도 화를 면하고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1590년(선조 23) 5월 29일에 서애 유성룡은 이조판서에서 우의정, 1591년(선조 24) 좌의정으로 승진한다. 동인이 몰락하는 기축옥사의 과정에서 서애 유성룡이 공신첩을 받고 정승으로 올랐다.

 

 

 

 

 

기축옥사가 끝나고 송강 정철은 선조에게 세자책봉의 건저문제를 말했다가 삭탈관직 되어 유배된다.

혹자는 동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와 유성룡이 모의하여 서인의 영수 송강 정철이 건저문제(광해군 세자 책봉 문제)를 선조에게 아뢰게 하여 임금의 분노를 사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기축옥사 당시 가장 먼저 정철이 추국청 위관으로 정여립 역모 사건을 3년간의 기축옥사로 확대하였고, 3년 동안 이양원과 유성룡 등이 죄인을 심문하는 추국청 책임자 위관을 맡았었다.

 

 

 

 

 

 

 

 

 

 

 

 

선조와 후대 왕, 그리고 정치세력 간에 기축옥사 당시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이 죽을 때 추국청 위관이 누구였느냐를 두고 동인과 서인의 당쟁 간 보복이냐, 아니면 역모 사건의 관련자 처벌이냐 하는 진실문제가 결정된다는 것인데,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하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기축옥사로 말미암아 동인과 서인의 골은 더 깊어졌고, 엄청난 희생자가 나온 동인은 강경파 북인와 온건파 남인으로 분열된다.

동인은 퇴계 이황, 남명 조식 등의 문인들로 유성룡, 이산해, 정인홍 등이 동인이었다.

 

동인에서 온건파 유성룡, 김성일, 이덕형 등은 남인, 강경파 이산해, 정인홍 등은 북인이 되었다.

학문적으로 남인은 퇴계 이황 계열이며 북인은 남명 조식 계열이다.

 

 

 

 

 

 

 

 

 

 

 

 

1592년(선조 25) 왜가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 7년의 기록인 『징비록』에서 이순신 장군을 자신이 천거했다고 하였다.

 

종6품인 정읍 현감으로 있던 이순신 장군은 1591년(선조 24) 종4품 진도군수로 임명되자마자 곧바로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건너뛰며 승진하였는데 가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유성룡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을 보필하고 다녔다.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선조 26) 서애 유성룡은 영의정에 제수된다.

 

서애 유성룡은 약 7년간의 임진왜란 중 5년간 도체찰사와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다.

전란 중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으나 선조가 반려하였다.

영의정 서애 유성룡은 1598년(선조 31 ) 탄핵을 받고 낙향한다.

 

 

 

 

 

 

 

 

 

 

 

 

서애 유성룡을 벼슬을 그만두고 나서 지난 임진왜란 7년간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서애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원인과 과정, 조선 조정과 백성의 실상을 기록한 『징비록』을 1604년 완성하였고, 1607년(선조 40)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뼈저린 아픔과 부끄러움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은 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이다.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내가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

 

 

 

 

임진왜란 7년간 통한의 기록 『징비록』은 1633년(인조 11)에 『서애집』에 통합되어 간행되었고, 1647년(인조 25) 『징비록』만 독립되어 간행됐다. 흔히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전황을 기록한 『징비록』을 눈물과 회한으로 쓴 기록, 분노와 참회의 기록, 아픈 과거를 반성하는 기록, 훗날을 대비하는 교훈서 등으로 말한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은 한마디로 지난날을 잊지 말고 다시는 이와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후손에게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이 쓴지 32년 후이며, 징비록이 간행된 지 불과 3년 후 임진왜란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 벌어진다. 1636년(인조 14) 일어난 병자호란으로 50만 명의 조선 백성이 끌려가고 삶은 도탄에 빠졌다. 

 

 

 

 

선조실록은 동인에서 분열된 북인(강경파)이 주도하여 편찬한 실록이다.(광해군 재위시 편찬)

선조수정실록은 서인이 주도하여 편찬한 실록이다.(인조와 효종 재위시 편찬)

서애 유성룡은 동인에서 분열된 남인(온건파)였기에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모두 서애 유성룡을 혹평한다.

 

 

 

 

 

 

 

 

 

 

 

 

 

『선조수정실록』 24권, 선조 23년 3월 1일(1590년)

우의정 심수경이 사면(辭免) 하자 유성룡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선조수정실록』 25권, 선조 24년 2월 1일(1591년)

좌의정 정철을 체직시켜 영돈녕부사로 삼고, 찬성 이양원을 우의정을 삼고, 유성룡을 좌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 12월 4일(1592년)

비변사가 아뢰기를

"풍원부원군 유성룡이 안주에 주재하고 있어 이미 군사업무를 겸해 살피도록 했는데 명호(名號)가 없어 방해되는 일이 많습니다. 도체찰사(都體察使)란 칭호를 주어 그로 하여금 각 군의 일을 총독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43권, 선조 26년 10월 27일(1593년)

풍원부원군 유성룡을 의정부 영의정에 제수하였다.

 

 

 

『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 5월 13일(1607년)

전 의정부 영의정 풍원부원군 유성룡이 졸하였다.

 

사신(사관)은 논한다.

유성룡은 경상도 안동 풍산현 사람이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하였다....

 

기축년(정여립의 역모사건, 기축옥사)의 변에 권간이 화를 요행으로 여겨 역옥으로 함정을 만들어 무고한 사람을 얽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일망타진하여 산림의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마디 말을 하거나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군신이 들판에서 자고 백성들이 고생하며 두 능(陵)이 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불에 탔으니 하늘까지 닿는 원수는 영원토록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도 계획이 굳세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아 화의(和議)를 극력 주장하며 통신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구하여서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에 한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하고 언자(言者)들이 말을 하였다....

 

'유성룡은 역시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마는 재보(宰輔)의 기국이 부족하고 대신(大臣)의 풍력(風力)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정확한 논의이다.

 

 

 

 

『선조수정실록』 41권, 선조 40년 5월 1일(1607년)

풍원부원군 유성룡이 졸하였다.

성룡은 안동 출신으로 호는 서애이며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일찍부터 중망(重望)이 있었다.....

국량이 협소하고 지론이 넓지 못하여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또한 감히 대항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여 대신(大臣)다운 풍절이 없었다.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되었다.

그러나 식자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을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譏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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