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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by 도생(道生) 2017. 1. 14.

조선의 학자에 의해 추앙받는 인물이 된 신사임당 신인선과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진 허난설헌 허초희

 

 

 

 

 

 

 

 

 

 

 

 

 

신사임당(1504~1551)과 허난설헌(1563~1589)은 모두 조선 중기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반가의 여인이다.

16세기 조선의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의 어머니 신사임당과 만고역적이 된 허균(1569~1618)의 누이 허난설헌의 삶은 비슷하면서도 극명하게 대비된다.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모자(母子),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男妹)는 그 사람들의 자질과 인품 등 각자가 가지고 있던 역량과 당대와 후대에 정치적, 학문적 영향으로 추앙의 대상 또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서인의 종주로 많은 후학을 길러 낸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500년 동안 한국을 빛낸 위인으로 남아 있다.

대역죄인이 되어 죽은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의 작품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고, 은밀하게 전해지다가 70여 년이 지나 세상에 다시 나왔다.

 

 

 

 

 

 

 

 

 

 

 

 

신사임당 하면 떠오르는 것은 효성이 지극한 딸, 글과 그림 등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여인, 덕과 인격을 갖춘 바른 여인, 바르고 착한 부인, 훌륭한 아들을 키워낸 방정하고 어진 어머니의 모습이다.

 

 

율곡 이이가 죽은 어머니의 일대기를 기록한 선비행장에 신사임당은 어려서부터 경전에 통달했고, 문장에 능했다고 했다.

『율곡전서』 권18 「선비행장」은 신사임당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자료이며, 또한 모든 기록이다.

「선비행장」 외에 후대에 쓰인 신사임당의 기록은 「선비행장」에 그들의 상상을 덧붙인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과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과 소론이 권력을 주도하였다.

율곡 이이의 제자 김장생은 「율곡연보」에도 없는 내용을 추가했고, 율곡 이이 학통을 이은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을 같은 반열에 올려놨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영의정을 지낸 정호는 신사임당을 여자 중의 군자라고 극찬했다.

 

 

 

서인의 종주로 받들어진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었고, 우러러보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에서는 심사임당이 마치 현모양처(근현대적 표현)의 표상으로 재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신사임당의 작품은 대다수가 신사임당의 작품이라는 증거는 없고, 전칭작(傳稱作), 즉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어 전해진 작품들이다. 근현대사 현모양처로 대표되는 신사임당 신인선은 일본 제국주의와 군사정권, 그리고 그 추종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포장된 작품이며, 조선 시대 신사임당의 모습은 다소 과장됐다고 볼 수 있다.

 

 

 

 

 

 

 

 

 

 

 

 

허난설헌 허초희도 신사임당과 같이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고 총명했다고 전한다.

허균도 율곡 이이 못지않은 천재로 유명하다.

 

허난설헌 허초희는 동생 허균과 함께 오빠 허봉 친구이며 삼당(三唐)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달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 이달은 백광훈, 최경창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리며 당나라 시풍(詩風)의 최고 대가였다.

 

 

 

 

허난설헌은 27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했지만, 허균은 누나의 작품을 간직한다.

허균은 천재답게 기억을 되살려 누나 허난설헌이 어려서부터 썼던 작품을 글로 써서 가지고 있던 작품에 추가하여 시집을 발간했다. 허균은 1606년(선조 39) 누이의 시집 「난설헌집」을 발간했고, 1608년(광해군 즉위) 중간했다.

 

 

 

 

 

허균은 1608년(광해군 10)에 역모죄로 능지처참 당했다.

대역죄인 허균은 국문(중죄인 신문과정)도 없이 전격적으로 처형됐고,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에서 그 실체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두 개의 역모사건이 있다.

바로 정여립 모반사건과 허균 모반사건으로 두 사람은 복권되지 못하고 대역죄인으로 남았다.

 

 

 

 

 

허난설헌 허초희도 역적의 누이였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은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작품도 공개적으로 볼 수 없었다.

1692년(숙종 18)에 동래부(부산)에서 「난설헌집」이 다시 발간되었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조선과 중국에서 표절과 극찬으로 극명하게 갈린다.

 

 

혹자는 허균이 기억을 되살려 쓴 허난설헌의 작품이 그녀가 어려서부터 연습하여 쓴 습작(習作)이 있을 수도 있고, 또 허난설헌의 스승은 당나라 시풍의 삼당(三唐)시인으로 불렸던 이달이었기에 허난설헌 작품의 특성상 중국(당나라)의 작품과 비슷하여 표절 논란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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