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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세종대왕 업적 민본 애민 위민정치

by 도생(道生) 2017. 1. 11.

위대한 성군(聖君) 세종대왕의 업적 - 민본(民本) 애민(愛民) 위민(爲民)의 사상과 정신과 정치

 

 

 

 

 

 

 

 

 

 

 

 

 

 

 

세종대왕은 정조대왕과 함께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이며,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룬 임금이다.

태종 이방원은 세종대왕이 훈구세력과 외척세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강력한 왕권으로 탄탄하게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애민과 위민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비록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태평성대의 기반 확립해 주기도 했지만, 세종대왕은 남달랐다.

 

 

 

세종대왕은 태평성대를 열어가는 임금이 갖추어야 할 덕목인 탁월한 안목, 뛰어난 지혜와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여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대왕은 민본사상을 바탕에 두고 임금으로서 인(仁)과 덕(德)을 갖추고,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을 위해 애민정신과 위민정신으로 정치를 펼쳐 나가는 것이 참다운 군주가 나아가야 할 임금의 길(王道政治)이라 생각했다.

 

 

 

 

 

 

 

 

 

 

 

 

 

 

세종대왕은 탁월한 지도력으로 자질과 능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부서의 특성에 맞는 인재를 배치하여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쌓은 성군이다.

 

세종대왕은 성리학 이념의 민본사상(民本思想)을 바탕으로 애민(愛民政治)정신으로 위민정치(爲民政治)를 구현하며 32년 동안 많은 업적을 이루어 나갔다. 세종대왕의 애민과 위민의 정신과 정치는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므로 백성이 삶이 편안해국가가 안정된다는 민본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다.

 

 

 

민본사상은 유학의 사서오경(四書五經) 중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민유방본 본고방녕(民惟邦本 本固邦寧),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니,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나라의 근본으로서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것임을 말한다.

 

세종대왕의 민본사상은 나라와 백성은 하나의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동일체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은 세상에 드러난 치적보다 백성과 임금과 나라는 하나라고 생각한 그 마음일 것이다.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의 기저에는 민본과 애민과 위민의 사상과 정치철학이 깔렸다.

세종대왕의 민본사상은 백성이 시간과 날씨, 계절의 변화를 더 자세히 알아 농사짓는 일에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선진화된 기술과 농사법 등을 보급하면서 백성의 삶을 질적이고 양적으로 변화시켜나갔다.

 

 

김종서, 최윤, 이종무 등을 중심으로 국방을 정비하였고, 집현전 학사와 함께 훈민정음을 반포와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다. 정초, 이순지, 김담, 장영실 등이 주축이 되어 천문기기 개발과법 개정하였고, 정초는 백성의 삶과 직결된 농업설명서 『농사직설』을 편찬하였다.

 

맹사성과 박연을 중심으로 향악과 아악 등 예악을 정비하였고, 법제 정비와 함께 공평하고 부정부패를 없애는 조세정책과 이를 위해 『세종실록지리지』 등을 편찬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의적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훈민정음 서문에는 민본사상을 실천한 세종대왕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나라의이 중국과 서로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어도 마침내 제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이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대왕은 세속적인 찬양을 듣기 위해 업적을 쌓지 않았다. 

백성과 함께 울고 웃는 진정한 군사부(君師父)의 길, 그런 임금의 길을 걸어가고자 하였다. 

근현대 사회는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세속적 명리(名利), 그 신기루를 쫓는 권력자가 판을 치고 있다.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12일(1419년)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

요즈음 수한풍박(水旱風雹)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해마다 흉년이 들어 환독(鰥寡孤獨)과 궁핍한 자가 먼저 그 고통을 받으며, 떳떳한 산업을 지닌 백성까지도 역시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너무도 가련하고 민망하였다.

 

호조에 명령하여 창고를 열어 구제하게 하고, 연달아 지인을 보내어 나누어 다니면서 고찰하게 한바 수령으로서 백성의 쓰라림을 돌아보지 않는 자도 간혹 있으므로, 이미 유사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슬프다, 한 많은 백성이 굶어 죽게 된 형상은 부덕한 나로서 두루 알 수 없으니, 감사나 수령으로 무릇 백성과 가까운 관원은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말고 한결같이 그 경내의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려 처소를 잃어버리지 않게 유의할 것이며, 궁벽한 촌락까지도 친히 다니며 살피어 힘껏 구제하도록 하라.

 

나는 장차 다시 조정의 관원을 파견하여, 그에 대한 행정 상황을 조사할 것이며,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써 죄를 논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7월 3일(1423년)

왕지(王旨)하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생민의 주가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무수(撫綏)하는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백성에게 친근한 관원을 신중히 선택하고 출척하는 법을 거듭 단속하였는데도....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 7월 13일(1423년)

사직(社稷)의 기우제 제문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먹을 것이 백성에게 가장 소중하니, 진실로 그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나라가 무엇을 의뢰하겠습니까. 아아, 나 조그만 사람이 큰 왕업을 외람되이 계승하게 되니.... 

 

 

 

『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2월 22일(1425년)

"수령의 임무는 지중(至重)하다. 그런 까닭에 뽑고 가려서 명령하는 것이다.

내가 백성의 일에 대하여 친히 볼 수 없으므로 그대들을 보내어 명령하는 것이니, 수령의 임무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오늘의 가르침을 잊지 말고 힘써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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