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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퇴계 이황 위기지학과 율곡 이이 위인지학

by 도생(道生) 2017. 1. 13.

조선의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동인(남인과 북인)의 종주 퇴계(退溪) 이황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서인(노론과 소론)의 종주 율곡(栗谷) 이이의 위인지학(爲人之學)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7~1584)를 조선 성리학의 거두(巨頭)라 말한다.

두 사람의 학문적 업적과 정치적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사림세력의 학문(사상)은 정치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혹자는 공자의 말씀을 빌려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두고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우인지학(爲人之學)으로 구분한다. 

 

 

퇴계와 율곡도 뛰어난 학자였지만, 학문적으로 두 사람에 버금가는 성리학자도 있었다.

이황과 이이, 그리고 그들의 후학들이 정치적, 학문적으로 조선 중후기를 좌지우지하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조선 성리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남아 있다.

 

 

 

 

 

영남의 양대산맥으로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실천적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이 있었다.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남명 조식의 북인계열은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숙청당해 몰락하였다.

성호 이익(1681~1763)은 "퇴계 이황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남명 조식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라고 하였다.

 

 

 

 

기대승(1527~1572)은 1558년(명종 13) 32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하였다.

관직에 들어기대승은 경상좌도의 거학(巨學) 58세의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하여 학문적 가르침을 받는다.

이후 전라도 광주의 고봉 기대승과 경상도 안동의 퇴계 이황은 8년 동안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토론인 사단칠정 논쟁을 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이며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은 칠정(七情)이다.

사단 칠정은 이기론(理氣論) 논쟁이며, 형이상과 형이하, 현상과 본질, 원리와 운동, 원칙과 현실 등에 대한 토론으로 퇴계와 기대승은 서로의 주장을 어느 정도 수용하게 된다.

 

사단칠정 논쟁은 순수 학문과 현실 정치 등에 대한 토론으로 성리학적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이 당시 정치세력 간의 다툼으로 엄청난 풍파를 겪는 등 시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조선 성리학은 진일보하게 된다.

스승 퇴계와 학문적 토론을 벌였던 기대승의 이기일원론은 율곡 이이에게 영향을 주었다.

 

 

 

 

 

 

 

 

 

 

 

 

혹자는 퇴계 이황은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만 몰두하고, 율곡 이이는 학문을 현실정치에 적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전혀 다른 것을 간과한 말이다.

 

율곡 이이가 퇴계 이황의 시대에서 자신이 활약한 것처럼 하였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퇴계 이황이 정치일선에 있었던 중종 후반기와 인종과 명종 때는 윤원형과 윤임 등 척세력이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사림(선비 세력)의 동서분당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그러나 후학에 의해 동인의 종주로 받들어졌고, 인조반정 이전까지 퇴계 이황 계열의 동인(남인, 북인, 대북) 세력이 임진왜란 이전 몇 년 간을 제외하면 정치를 주도했다. 이는 퇴계 이황의 학문이 단순히 자신의 수양을 위해서 학문 연구만 몰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퇴계 이황은 70세가 되던 선조 3년(1570) 세상을 떠났다.

율곡 이이는 선비가 정치하기 좋은 시절이었던 선조 때 주로 활동했다.

 

 

 

조선 11대 왕 중종(재위 1506~1544), 12대 왕 인종(재위 1544~1545), 

조선 13대 왕 명종(재위 1545~1567), 조선 14대 왕 선조(재위 1567~1608)

 

 

 

36살의 나이 차가 나는 퇴계와 율곡은 만남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없고 한두 차례의 만남과 여러 차례의 서신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퇴계 이황이 조정에 들어왔을 때는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로 훈구세력과 외척세력이 권력 주도권 다툼을 하고 있었다.

또, 인종과 명종 때는 외척세력이 권력을 전횡하던 시기였으며,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로 퇴계의 형이 탄핵당하면서 연좌된다. 퇴계 이황은 사림(士林)으로서 정치적 활동에 제약을 받을 수 받게 없었고, 여러 차례 탄핵을 당했고 관직을 고사했다.

 

 

 

 

 

 

 

 

 

 

 

 

율곡 이이가 조정에 들어온 시기는 외척세력의 권력 전횡이 막을 내렸고, 바야흐로 사림(선비)세력이 권력의 주도권을 잡을 때였다.

 

 

퇴계 이황은 중종 후반기에서 명종 중반기까지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퇴계 이황은 27살이던 1528년(중종 23)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치가로서 파직과 사직을 수십 차례하며 지냈다. 말년에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정진과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다.

퇴계 이황이 관직에 있을 때는 훈구세력과 외척세력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다.

 

 

 

 

율곡 이이는 명종 재위 말기에서 선조 대에 활동하였다.

외척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선비)세력이 권력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였다.

1575년(선조 8) 사림세력 간에 정치적, 학문적 대립과 이해관계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서며 붕당정치가 만들어진다.

 

율곡 이이는 28살까지 학문에 몰두하여 홉 번의 과거에서 급제하였다.

1564년(명종 19)부터 1583년(선조 16)까지 20년간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였다.

 

 

 

 

 

 

 

 

 

 

 

 

퇴계 이황을 동인의 종주라 한다.

이황은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후학들에 의해 동인의 종주(宗主)가 된다.

 

 

율곡 이이를 서인의 종장(宗長)이라 한다.

사림세력의 동서분당을 막으려 하였다고는 하나 서인의 종장이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노론과 소론)이 권력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율곡 이이를 낳은 어머니, 일명 '신사임당'은 성모(聖母)에 준하는 찬양의 대상이 된다. 

 

 

 

혹자는 퇴계 이황은 자신의 인격 수양, 즉 참된 나를 밝히는 수신(修身) 목적의 학문 위기지학(爲己之學),

율곡 이이는 학문의 목적은 세상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위인지학(爲人之學)의 길을 걸어갔다고 말한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는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을 모두 실천했던 학자이며 정치가다.

 

 

 

 

 

남명 조식(1510~1572)은 그 후학들이 명맥이 끊겨 잊힌 유학자가 되었지만,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절대 뒤지지 않는 대학자였다. 남명 조식은 불교의 어떤 고승 못지않게 언제나 깨어있는 정신으로 자기성찰의 길을 걸어갔다.

 

퇴계 이황과 동시대를 살았던 남명 조식의 남명학파는 퇴계학파와 함께 영남 유림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으며, 위기지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남명 조식은 유학자로서 위기지학의 길을 걸었지만, 남명 조식의 자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맹활약하였으며,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활동하며 위인지학을 실천하였다.

 

 

 

 

 

퇴계 이황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율곡 이이의 위인지학(爲人之學)의 출처

논어(論語) -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공자가 이르기를 옛날의 학자는 자기를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는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선조실록』 2권, 선조 1년 12월 6일(1568년) - 광해군 때 북인 주도로 편찬됨

기대승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판부사 이황을 보건대, 이와 같은 사람은 지금 시대에 드물 것입니다....

전일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서신으로 묻기도 하여 서로 만나지는 못해도 뜻을 통한 지는 이미 오래였습니다.

 

그가 올라온 뒤에 늙고 병든 몸이 너무 고적하게 지낼 듯하여 때때로 찾아가 방문도 하고 평소에 의문 나던 것을 질문도 해보았는데 우매한 신의 견해로서는 도저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의 소견으로는 그가 범연한 인물이 아닌 듯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나이가 이미 70세이고 식견이 고매한데도 자기의 소견을 주장하지 않고 어진 사람이 한 말이라도 반드시 헤아려 봅니다....

 

그의 심덕은 겸손하고도 공손하여 조금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저기의 주장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좋은 소견을 따르기도 하니 이 점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미매한 신이 자주 상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오랫동안 심복하였기에 지금 이처럼 아뢰는 것입니다....

 

그는 고서를 박람하였고 품성 또한 소탈하고 담담한데다가 젊을 때부터 겸손하고 사양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담이 아뢰기를

"동방의 학문은 전조에 정몽주가 있었고, 권근도 잠시나마 학문을 계승하였지만, 다분히 흠스러운 데가 있었습니다. 그 후로 김굉필에 이르러 학문이 매우 정당하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역시 범연하지 않았는데 이황은 이들을 계승하였으니 그의 학문이 어찌 범연하겠습니까. 상께서 성심으로 학문을 배우시고 치도(治道)를 물으신다면 어찌 진정으로 아뢰지 않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18권, 선조 17년 1월 1일(1584년) - 인조와 효종 때 서인(西人) 세력 주도로 찬됨

 

이조 판서 이이의 졸기

이이의 자는 숙헌이고 호는 율곡이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였고 확연히 큰 뜻이 있었다.

총명하여 지혜가 숙성해 7세에 이미 경서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2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드렸고,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어도 일찍부터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잘못 선학(禪學)에 물이 들어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도(佛道)를 닦았는데,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정학(正學)에 전념하였는데, 스승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도 도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서 정미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청요직을 여러 번 사양하였으며, 그 도를 작게 쓰고자 아니하여 해주의 산중으로 물러가 살면서 강학하며 후학을 교육했다. 이에 은병 정사를 세워 주자(朱子)를 사사하며 정암(靜庵), 퇴계(退溪)를 배향하여 본보기로 삼았는데,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한결같이 옛사람이 하던 대로 하는 것을 규범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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