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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작은 거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

by 도생 2013. 8. 10.

미국의 작은 거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

 

‘변방정치가’로서 준비가 모자라나 정상에 올라 배우며 결단하여 업적을 쌓는다. 권력을 물려받은 콤플렉스로 ‘권위’에 매달려 강수를 두고 입지를 잃는다.

 

1884년 미국 중서부의 미주리의 농가에서 태어난 트루먼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서 열세 살 때 마을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한다.

중학생 시절부터 돈 벌며 공부한 그는 대학에 가기 어려워 사관학교를 지망한다. 그러나 눈이 나빠 좌절되자 철도회사에 들어간다.

그 후 할머니 소유 농장을 맡아 일하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전장에서 돌아와 사업에 손댔다가 실패하고는 1922년 선출직 지방행정관 격인 지방판사로 뽑힌다. 이후 연임하여 서민대책에 힘쓰던 트루먼은 1934년 연방하원의원 선거에서 출마하려다 좌절하나 뜻밖에 연방상원의원 민주당 후보공천을 얻어 당선된다.

 

트루먼은 1944년 말 루즈벨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된다. 대통령에 네 번 뽑힌 루즈벨트는 임기도중에 죽어 신화가 된다.

그의 죽음으로 부통령 82일 만에 트루먼은 대통령에 오른다. 루즈벨트는 동부의 특권층, 트루먼은 중서부의 서민층 출신이다.

루즈벨트는 최고의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온 데 비해, 트루먼은 고졸이 학력의 전부다.

루즈벨트는 평생이 정상을 향한 준비였던 데 반해 트루먼은 이와는 인연이 먼 변방정치의 산물이다.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그늘에 가릴 처지였다.

강박관념이 컸고 홀로 서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인물로 비칠 줄 알면서도 위상에 집착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역사책과 전기를 즐겨 읽은 트루먼으로서는 역사는 ‘지혜의 보고’다. 그에게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새로운 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역사 속에서 비슷한 형태로 여러 번 나타났던 것이라고 한다.

국가지도자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자기나라뿐 아니라 위대했던 다른 나라들의 역사도 알고 지혜를 얻어야 한다고 본 그는 대통령으로서 일하면서 자주 역사에서 유추하고 현실에 적용한다.

 

트루먼은 국무회의가 대통령을 뽑는 이사회 같은 것이라고 본다. 장관들은 대통령이 좋아하건 말건 조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즈벨트는 몇몇 각료들과만 따로 모이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중요한 문제는 국무회의에 올려 모두의 의견을 듣는다.

서로 다른 다양한 생각과 반응을 얻은 후 자신이 결론을 내린다. 대통령이 권위를 행사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고 믿는 그는 “구사하는 권위가 현명하면 나라를 위해 좋고 현명하지 않으면 나라를 위해 나쁘다. 그래도 행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다.

 

나라의 지도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으며 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각 부처가 중요한 활동을 빼놓지 않고 보고토록 하는 트루먼은 “고삐를 틀어쥐고 그의 정책을 위해 이루어지는 일을 파악해야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이 원폭실험에 성공한 것은 1945년 7월이다. 그때까지는 이 끔찍한 무기를 일본에 떨어뜨릴 계획이 없었다. 효과도 확신하지 못했다.

트루먼은 각료, 군인,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의논케 한다. 그런 가운데 미군은 일본본토 침공을 준비한다.

미군 피해는 50만 정도로 내다본다. 그런데 위원회가 원자폭탄을 일본에 직접 쓰자고 한다. 이것이 비인도적이라며 사막에서 폭발시켜도 시위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현실적이 아니라면서 파괴력을 보여줄 곳을 고르자고 한다. 트루먼도 같은 생각이었다.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에 대해 7월 28일 일본은 계속 싸우겠다고 한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다. 8월 9일 나가사키가 원폭세례를 받는다.

 

흔히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을 ‘역사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대단치 않다’고 한다. 그는 무엇이든 분명히 결정하는 지도자였다.

겉으로 드러나게 고민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한 그는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최선이지만 최악의 결과는 잘못된 결정이 아닌, 결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트루먼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도 없었을 것이다. 1949년 3월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 외곽에 있다”고 한다.

1950년 1월 애치슨 국무장관도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아시아의 대륙에 위치한 곳은 모두 미국의 방어선에서 빠진다”고 한다.

트루먼도 군부의 건의대로 미국을 한국에서 빼낸다. 그런 트루먼이 전쟁에 나선 것이다. 남침을 뒷받침해 준 소련에게서 침략주의 나치의 망령을 본 탓인지 모른다. 평화를 위한다며 히틀러를 구슬리려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이루어진 역사다.

 

한국전쟁이 오늘의 북한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 국제관계를 보는 미국의 눈은 전체주의 국가들의 그것과 달랐다. 트루먼은 한국을 지키자며 ‘미국적 가치와 보편적 원칙의 수호’를 국민에게 호소했다. 이를 두고 키신저는 그가 동서대립을 ‘영향력을 둘러 싼 다툼’이 아닌 ‘선과 악의 싸움’으로 여겼으며 이런 신념이 미국정책의 뿌리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이 이렇게 ‘도덕률’을 들고 나온 이상 ‘거래에 의한 타협’은 불가능했고 소련이 그 목표를 바꾸거나, 소련이 무너지거나, 아니면 두 가지 모두 이루어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고 한다.

 

트루먼은 “역사에서 성공한 지도자는 드물다”고 했다. 누구도 트루먼이 좋은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평생 쫓아다녀 지도자가 된 사람들보다 나은 자질을 보였다. 스스로를 남보다 낫다고 믿기 어려운 젊은이들에게 “트루먼이라면 나도 따라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결단을 겁내지 않는 대담성이 돋보였다. 외교에 어둡고 한수 배울 기회마저 잃었으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서 냉전의 시작에 이르는 격변기를 잘 넘겼다. 인권에 관한 링컨 이래의 업적도 있었다.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유리상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공직자의 본분’도 지켰다.

 

지도자의 성공 실패를 가늠할 때 재임당시의 인기를 그 척도로 삼지 않는다. 순간의 느낌, 인상, 이해관계의 산물에 불과한 인기는 그저 흘러가 사라지는 강물 정도로 다루어진다. 다음과 같은 것들로 잰다. 정작 결단이 필요할 때 위험부담을 떠안고 결단했는가, 추구한 가치는 일관되었는가, 시운을 잘 타고 났는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었는가, 삶의 역정이 시대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인가, 대의만을 좇았는가 아니면 영화를 향한 욕망이 끼어들었는가? 이렇게 보면 트루먼은 분명히 성공한 지도자다.

 

 

 

대장부 일을 도모함에 마땅히 마음을 크고 정대히 가져 ‘내가 죽어도 한번 해 보리라.’ 하고 목숨을 생각지 말아야 할지니

작은 일에 연연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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