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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 걸프 전쟁(페르시아만 전쟁, 1차 걸프전) 미국 참전

 

 

 

 

 

 

 

 

 

 

 

 

 

1968년 이라크에서 발생한 군사 쿠데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사담 후세인은 정치적 기반을 굳혀가며 이라크 내에서 제2인자로 자리 잡았다. 1977년 이라크 부통령에서 1979년 바크르 대통령이 사임하자 제5대 이라크 대통령이 되었다.

 

 

이라크의 후세인이 1980년 이란을 침공하면서 8년 동안 이란-이라크 전쟁을 벌어진다.

이란은 1979년 팔레비 왕조의 입헌 군주제를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으로 시아파 지도자 사이이드 루홀라 호메이니가 집권하고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표면적으로는 1975년 이란과 이라크 두 나라 간에 체결된 국경협정(알제협정)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전쟁이 발발하였다고 하지만, 사실 이라크의 소수 종파인 수니파 출신의 후세인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신정(神政)체제가 중동지역으로 전파되는 것을 막고 페르시아만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이란을 침공한 것이다.

 

 

 

 

1970년대 이란에 무기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남겼던 미국은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팔레비 왕의 미국 입국을 허가한다. 이 문제로 이란의 일부 강경파가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였고, 미국 외교관 등 70여 명이 인질이 된다.

 

미국은 즉각 이란에 대한 제재를 가하였고, 미군 특공대의 인질구출작전 실패, 수차례의 협상 결렬 등이 이어지다가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서로가 타협점을 찾아 미국대사관 점거 인질이 석방되었다.

 

 

 

 

 

 

 

 

 

 

 

 

이란과 이라크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으로 끝이 났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 영국과 프랑스 등은 100만 명 이상이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막대한 무기를 팔아 돈을 벌었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최신무기를 수입하여 이란-이라크전쟁에 사용하였고, 이란과 감정이 좋지 않았던 미국 역시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한다. 이라크 후세인이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쿠르드 반군 수만 명이 희생될 때도 미국은 그냥 묵인하였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자본주의 국가가 판매한 무기를 구매하고 군사적 도움을 받은 이라크는 이란-이라크 전쟁을 통해 중동의 군사대국이 된다. 이라크는 상비군과 예비군을 포함하여 약 150만에서 200만 명에 가까운 군사와 서방 자본주의 국가가 판매한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침공한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른바 걸프 전쟁(페르시아만 전쟁)의 명분은 쿠웨이트가 원유를 과잉공급하여 국제유가를 하락시켰다는 것이었다.

 

이라크의 불법적인 쿠웨이트 침공에 유엔 안보리는 이라크 제재에 들어갔고, 미국이 주도한 34개 다국적 연합군이 편성되어 이라크에 반격하였다.

 

 

 

 

 

 

 

 

 

 

 

 

 

미국은 걸프 전쟁 중에 약 54만 명이 병력을 동원하며 참전하였고, 최첨단 무기로 무장하였다.

 

미국은 걸프 전쟁(페르시아만 전쟁) 참전 초기 쿠웨이트와 국경이 인접한 친미국가 사우디아라비아 방어와 미국 군사시설 구축의 '사막의 방패'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후 이라크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의 '사막의 폭풍 작전'을 감행한다.

 

 

 

 

 

 

 

 

 

 

 

 

유엔 안보리는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1월 17일부터 다국적군은 약 한 달간 이라크군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습을 하였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와 전쟁 중에 쿠웨이트 유정(油井) 700여 개가 불에 타 환경오염으로 한동안 큰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1년 2월 28일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걸프 전쟁(페르시아만 전쟁, 1차 걸프전쟁)은 끝이 난다.

이라크는 피해보상 및 유엔 안보리 결의안 등 5개 요구조건을 수용한다. 

 

 

 

 

 

 

 

 

 

 

 

 

다국적군의 전쟁 비용은 약 6백억 달러에 달하였고, 절반 이상을 사우디아라비아가 충당하였다.

다른 전쟁에서도 그랬지만 걸프 전쟁(페르시아만 전쟁)에서도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지구촌의 다른 지역은 제외하더라도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던 중동의 국가들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걸프 전쟁(1990~1991)을 겪으며 현재까지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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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나우저 2016.08.29 01: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쟁이 있을 때마다 무기 팔아먹는 국가들이 막대한 부를 챙기게 되었군요! 도생님 행복한 한 주 되세요 ㅎ

미국이 전쟁에서 최초로 패전한 베트남 전쟁(월남전쟁) - 미국 참전(한국군 파병)

 

 

 

 

 

 

 

 

 

 

 

 

 

 

6·25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한민족이 타의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됐고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3년여의 전쟁을 겼었다.

한국전쟁에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국은 승전도 패전도 아닌 휴전(정전)협정을 맺었다. 

 

전쟁으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안겨준 한국전쟁은 냉전 시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이념 대결의 장이기도 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했다.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 전쟁(월남전) 역시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 간의 이념 대결의 장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북한은 공산주의 북베트남을 무기와 군수물자를 지원했고,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남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맞붙은 면에서 혹자는 제2의 한국전쟁이라고도 한다.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은 미국과 프랑스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본주의 체제 남베트남 정부와 소련과 중국의 무기와 군사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체제 북베트남의 한판 전쟁으로 공산주의 진영이 자본주의 진영에게 승리한 전쟁이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나서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베트남과 프랑스와의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른 끝에 베트남은 북쪽은 공산주의 체제로 남쪽은 자본주의 체제로 남북이 분단된다.

 

미국은 인도차이나 전쟁 중에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분과 자국의 국익을 위해 미국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고 있었다.

 

 

 

 

 

 

 

 

 

 

 

 

 

 

1964년 8월 2일 북베트남 어뢰정 3척이 통킹만에 있던 미국 구축함 매독스 호를 공격했다는 일명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다.

미국은 이를 빌미로 1965년 2월부터 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에 전격적으로 참전한다.

  

 

남베트남에는 미국, 호주, 뉴질랜드, 한국, 태국 등 자본주의 진영과 북베트남에는 소련과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진영이 각기 지원을 한 베트남 내전이 인도차이나 국제전쟁으로 커졌다.

 

 

 

 

 

 

 

 

 

 

 

 

 

 

 

민간인 학살로 인한 국제사회의 비난과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한 전쟁, 미국의 피해 증가와 미국 사회와 국제사회의 반전 여론에 존슨 미국 대통령은 1968년 급기야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지를 선언한다.

 

그리고 베트남전 미군 철수를 공약한 닉슨이 1969년 미국 대통령이 된다. 전쟁을 끝낸다는 닉슨 대통령은 공약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미국 대통령을 사임하기 한 해 전에야 가서 이루어진다. 

 

 

 

 

 

 

 

 

 

 

 

 

 

 

 

존슨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요청에 대한민국은 1964년 9월 11일 선발대가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22일 베트남 사이공에 도착했다.

 

1966년 3월 7일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에 한국군 파병을 전제로 한 대한민국과 미국은 '브라운 각서'를 체결하며 대한민국은 경제적 이득을 얻는다.

 

 

 

의무 장교, 간호 장교, 의무병, 태권도 교관 등이 1차로 파병되었고, 이후 비둘기부대, 십자성부대와 같은 공병 등 군수 지원 부대, 그리고 청룡부대(해병대), 맹호부대(육군), 백마부대(육군) 등의 전투 부대가 파병되었다.

 

한국이 국군 파병을 시작한 1965년부터 한국군이 철수한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 중 총 32만 명의 한국군이 파병되었고, 한국군 전사자는 약 5천 명, 부상자 약 1만여 명이 발생하였다.

 

 

미국이 무차별적으로 뿌린 고엽제로 인해 고엽제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한 희생자와 피해자, 그리고 고엽제 후유증이 유전된 후손들은 수는 정확한 집계조차 어렵다.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그리고 미국 사이에 전쟁 종결의 평화협정이 조인된다.

3월 29일 미국은 닉슨 대통령의 전쟁 종결 선언과 함께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미국의 철수와 함께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점령당하면서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으로 바뀐다.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 남북의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3백 만명이 사망하였다.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에서 미국이 베트남과 인근 인도차이나에 투하한 폭탄은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7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 전역에 매설한 지뢰와 폭탄 불발탄을 제거하는데 약 3백 년이 걸린다고 하니 한마디로 베트남 전쟁은 무자비한 파괴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에 최대 약 55만 명이 동시에 베트남에 투입하며 전쟁에 참전하였고, 5만 8천여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하였고, 수십만 명에 이르는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미국이 치른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전쟁이 베트남전쟁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월남전쟁)에 참전하여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한, 미국 전쟁 역사상 치욕적인 참패를 당한 전쟁으로 기록되었고,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참전희생자와 가족들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미국이 참전하여 최초로 패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이득을 본 건 다름 아닌 미국의 군산복합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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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 않은 전쟁 6·25 한국전쟁- 미국 참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본주의(민주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가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던 동서냉전 시대 초기에 냉전의 상징 국가였던 유럽의 독일이 아니라 아시아의 한반도에서 한 판 전쟁이 붙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유사 이래 가장 작은 땅덩어리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참전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서 해방을 맞은 지 불과 5년 만에 일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한반도는 초토화됐으며, 승자도 패자도 없이 휴전(休戰, 전쟁을 잠시 쉬는) 협정을 맺고 대치 중인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승전국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3·8선을 중심으로 남한과 북한을 분할 점령하였다.

 

 

1945년 9월 8일 미국의 하지 중장이 이끄는 제24군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여 남한을 점령하여 군정(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을 실시한다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하였. 그리고 9월 12일 아치볼드 아놀드 소장이 미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며 정식 군정시대를 맞이한다. 

 

 

한반도를 양분하여 점령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한은 민주주의(자본주의)로 북한은 사회주의(공산주의)로 이념이 갈렸다.

1948년 8월 15일이 남한의 단독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 미 군정은 대한민국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고 1949년 6월에 철수한다.

 

 

 

 

 

 

 

 

 

 

 

 

미국은 북한이 남침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전쟁을 예견하고 있었으나 무시했다.

더욱이 1950년 1월 12일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은 대한민국은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이른바 애치슨라인 발표는 6·25 한국전쟁 발발의 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한반도 삼천리금수강산을 갈기갈기 찢겨 전 국토가 황폐해졌다.

한국전쟁의 참혹한 상황은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 

 

 

 

1950년 6월 25일 선제공격을 감행하며 남진한 북한군 불과 3일 만에 남한의 수도 서울을 점령한다.

국가를 믿고 대통령을 믿었던 국민은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하는 바람에 피난도 못 가고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의 포로가 된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즉각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상임과 비상임이사국 11개 회원국 중 2개 회원국의 기권과 9개 회원국의 찬성으로 안보리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다시 유엔의 군사 지원을 촉구하는 83호, 유엔군 파병의 84호를 통과시키며 한국전쟁에 참전을 결정한다.

 

 

1950년 7월 7일 유엔군이 창설되고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 사령관이며 일본 주둔 미국 극동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가 유엔군 사령관이 되어 7월 18일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작전 지휘권을 받는다.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터키,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캐나다, 콜롬비아, 필리핀, 타이,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16개 나라다.

 

 

 

 

 

 

 

 

 

 

 

 

8월 중순 한반도의 90%를 점령한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전투가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적을 감행하여 적을 허리를 잘라놓았다.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한다.

 

 

 

북진을 계속하던 유엔군38선을 넘어가자 모택동은 중국군(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명령한다. 

 

중국군은 만주에 약 30만 대군, 압록강 변에 약 15만 대군이 대기하고 있다가 유엔군이 중국의 턱밑까지 오자 1950년 10월 25일 전쟁에 개입하며 인해전술 남진한다. 전쟁기간에 투입된 중국군의 숫자는 약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을 빼앗겼다가 다시 탈환하며 일진일퇴하다 현재의 휴전선 인근으로 전선은 굳어지고, 1951년 6월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2년여를 끌다가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정전(停戰, 전쟁을 잠시 멈춘) 협정을 한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전쟁을 하다 정전협정(휴전협정)을 맺으면서 기나긴 휴식에 들어간다.

 

 

6·25 한국전쟁은 유엔군(국제 연합)이 참전한 최초의 전쟁이며, 자본주의(민주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들이 갈려서 맞붙은 최초의 전쟁이다.

 

 

 

 

 

 

 

 

 

 

 

 

6·25 한국전쟁에 참여한 나라는 파병 16개국, 물자지원 40개국, 의무지원 5개국, 전후 복구 6개국으로 총 67개국에 이른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단일 연합군(유엔)으로 참전하여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유엔과 전쟁을 한 나라는 북한, 중국, 소련 3개국이다.

 

 

동북아시아의 작은 한반도 땅덩어리에서 벌어진 전쟁은 가히 제3차 세계대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6·25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국은 단연 미국과 일본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던 일본 경제에 활로를 열어주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한국전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민주주의(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와의 한 판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막대한 희생만 치른 채 휴전 66년이 지나고 있다.

6·25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언제든지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며 북한의 핵무기로 촉발된 긴장으로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민족상잔의 6·25 한국전쟁은 한민족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크나큰 상처와 비극을 남겨 놓았고, 대한민국을 지원한 유엔군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반도는 휴전(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협정을 맺고 대한민국과 북한이 63년째 서로 대치 중이다.

지금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 경제 대국인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등 4대 강국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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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나우저 2016.08.21 16: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이 같이 있으니까 굉장히 암담했을 것 같다는 느낌이 확 드는군요...
    휴전이라는 단어도 다시금 떠올리게 되네요!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유럽 전쟁)- 미국의 참전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승전국 간의 분배문제, 정치와 경제적 이해관계로 반목하고 있었으며, 유럽 각 나라는 정치와 이념이 대립하며 혼란에 휩싸였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의 최대 수혜자다.

이미 중남미의 여러 나라에 군사적 경제적 개입을 하고 있던 미국은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된 후 금융자본과 기업들이 지구촌 곳곳에 진출하며 자본주의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독일이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다.

이러한 독일의 경제회복과 군비확장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준 것이 바로 미국의 기업들이다.

 

 

 

 

 

 

 

 

 

 

 

 

1929년 미국 월가의 주식시장이 붕괴하면서 지구촌은 이른바 세계 대공황으로 들어간다.

재고는 쌓이고, 일자리를 잃고, 기업은 문을 닫고, 은행은 사라져갔다. 미국과 유럽의 국가들은 이른바 고립주의, 보호무역주의로 각자도생의 길을 걸으며 세계 대공황을 헤쳐나갔다.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을 통제하는 전체주의, 즉 나치즘, 군국주의, 파시즘으로 모습을 바꾼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독일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대공황이 불어닥친다. 1933년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가 되었고, 급기야 1933년 11월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독일 총통이 된 히틀러는 세계정복의 야욕을 꿈꾸며 군비확장에 나선다. 

 

 

1936년 독일과 프랑스,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네덜란드 사이에 있던 비무장지대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주둔시키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도 점령하며 침략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1939년 8월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쟁이 시작된다.

이 밖에도 대서양과 인도양 해역,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중동 등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1935년 이탈리아가 아프리카 북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것을 2차 세계대전 발발로 보지는 않고 있다. 

 

 

 

한편,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이 있자 미국은 기존의 중립법을 새롭게 보완한 중립법을 제정한다.

교전국에 무기와 탄약의 수출, 금융거래를 금지하는 등 내용이었으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위기에 처한 영국의 협조 요청에 1941년 무기대여라는 편법으로 전쟁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불어닥친 세계 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다.

뉴딜정책 등 대공황 탈출을 위해 고전하던 미국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주의가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군이 되어 참전한다. 미국은 전쟁 특수를 이용하여 세계 대공황을 탈출하는 돌파구로 삼았다.

 

 

 

지구촌이 불바다가 된 2차 세계대전은 크게 유럽전쟁(유럽과 아프리카 북부)과 중일전쟁(아시아, 태평양 전쟁)으로 구분된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은 1937년 7월 7일 일본 제국주의가 노구교 사건을 빌미삼아 중국을 침략한 중일전쟁으로부터 시작하며,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다.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1945년 5월 7일 독일의 항복으로 2차셰계대전 유럽전쟁은 끝났다. 

2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전하여 승전국이 된 미국은 전후에는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세계질서를 주도한다.

미국은 세계평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오직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계경찰 노릇을 시작한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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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08.14 05: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차 세계대전 정보 잘 보고 가네요

  2. 2016.08.14 08: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하늘마법사 2016.08.14 22: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차 세계 대전 알아갑니다.

  4. 슈나우저 2016.08.15 0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계 2차대전 발발 배경을 오랜만에 다시 살펴보네요ㅎ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과정도 궁금하네요!

  5. 비키니짐(VKNY GYM) 2016.08.19 13: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차대전을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 - 제1차 세계대전 - 제국주의 미국 참전

 

 

 

 

 

 

 

 

 

 

 

 

 

20세기가 시작하자마자 벌어진 지구촌 전쟁은 100여 년이 지난 21세기가 되도록 총성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확장 패권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표면적 이유는 1914년 7월 28일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 시청 앞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됐다.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지만, 탐욕으로 가득 찬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은 지난 19세기에 일어났던 수많은 전쟁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최신 기관총, 전차(탱크), 전투기 등 바로 신무기의 등장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유럽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이다.

약 4년 3개월간 벌어진 전쟁으로 약 3천만 명의 사상자와 약 1천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약 13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가공할 살상력을 지닌 신무기의 등장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최악의 참극이라 불린 최대 격전지 솜 전투가 1916년 7월 1일 벌어진다. 전투는 첫날에만 약 5만 8천 명이 사망하고 140일 동안 약 1백만 명이 사망한 제1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쟁 참극이다.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과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불가리아 등)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전쟁을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토확장 야욕이 불러낸 대참사라고도 한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중립을 선언했었다.

그러던 중 1915년 5월 7일 독일 U-보트에 의해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미국과 멕시코와의 분쟁(독일의 치머만 전보 사건)에 끼어든 것이 미국 내 참전 여론이 거세지며 제1차 세계대전 미국의 참전 명분이 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미국 제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을 결정하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은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고 약 2년이 지난 1917년 4월의 일이다.

 

 

1919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승전국과 패전국 사이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패전국에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하게 되며 이는 또 다른 전쟁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승전국이 되면서 세계무대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전 세계 채권의 약 40%를 가진 채권국이 됐다. 이때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1차 세계대전에 군수물자를 보급함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으며 미국이 군사대국,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한다.

 

지구촌의 새로운 강자로 제국주의 패권국가 미국은 유럽에서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의 최고 수혜자이다.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와 평화원칙을 말하며 국제연맹 창설을 주장하였으나,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유럽은 1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계속된 갈등과 분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루시타니아호가 침몰하기 전 독일은 이미 영국 해역을 전쟁 수역으로 공식적으로 선포하였고, 특히 군함 및 군수물자 수송선에 대해서는 격침 시키겠다고 경고하였다. 특별한 것은 민간인 여행객도 위험할 수 있다고 미국 신문에 광고로 알렸다는 사실이다. 

 

 

루시타니아호는 영국의 여객선으로 3만 톤이 넘는 초대형 여객선이었다.

독일 잠수함 U-20의 어뢰 발사로 침몰한 루시타니아호에는 천 이백여 명의 승객과 칠백여 명의 승무원 등 약 2천 명이 승선하고 있었으며 침몰로 1,198명이 사망한다. 그런데 사망자 중 128명이 미국인이었다. 미국은 즉각 항의하였고 독일은 신속하게 유감을 표명하며 배상을 약속한다.

 

 

 

루시타니아호는 대형 여객선이다.

당시 U-보트는 한 발의 어뢰 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단 한 발의 어뢰 맞고 약 10여 분 만에 침몰하였다는 것은 일반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 생존자들은 어뢰 폭발 이후 큰 폭발이 한 번 더 있었고, 두 번째 폭발 이후 루시타니아호가 급격하게 침몰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소속 해운사는 루시타니아호에 다량의 폭발물과 탄약 등이 실려 있었다고 화물목록을 공개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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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라준 2016.08.13 07: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요즘 다시 큰 전쟁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