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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대학살 만행, 폭발로 위장한 집단살인 사건

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1937년 12월부터 약 6주간 자행된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은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은 중국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1876년 일제와 불평등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인 약 8백만 명이 일제의 잔혹한 만행에 대학살 당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만 해도 약 30만 명의 한국인이 일제의 총칼 아래 죽어갔다.

 

조선의 관군도 동학 농민혁명군 진압에 동원됐지만, 일제가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당시 최신식 연발 기관총 난사해 대학살을 자행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에도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은 계속됐다.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 사건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일제강점기 강제로 끌고온 한국인 강제징용자를 귀국시키지 않았다.

일례로 사할린에서 소련군과 대치하던 일제는 패망 직전 일본군과 자국민을 본국으로 대피시키면서도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철수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미국)의 주도로 일본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송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귀국하는 기쁨을 안고 탄 귀국선이었지만,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으로 말미암아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앞바다에 수장됐다.

 

 

 

 

 

 

 

 

 

 

 

 

일본은 1945년 8월 18일 갑자기 노역에 강제동원했던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들은 일본 본토 북동부의 아오모리현, 도호구와 홋카이도 지역에서 일제의 군사시설, 군수공장, 탄광 등에서 강제노역하던 사람들이다.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4730톤의 우키시마호는 목적지였던 부산항으로 곧장 항해하지 않는다.

부산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동해로 나가야 하는데, 일본 서쪽 연안을 따라 내려가던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교토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간다.

 

해안에서 300m가량 떨어진 시모사바 앞바다에 우키시마호가 멈춰섰고 잠시 후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나 침몰한다.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본다면 우키시마호에 실제 승선 인원은 일본군과 한국인 강제징용자를 포함하여 최소 7천 5백 명에서 최대 1만 2천 명에 이르고, 생존자를 제외한 대다수 한국인이 사망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일본군이 저지른 한국인 집단 대학살이란 결론이 나온다.

 

 

 

일본은 우키시마호에 약 3천7백여 명이 승선했고, 일본 해군 25명과 한국인 강제징용자를 포함하여 총 550여 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실종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일본은 미국이 설치한 기뢰가 수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키시마호가 폭발했다고 주장했다.

 

 

 

 

 

 

 

 

 

 

 

 

1992년 일본인 사이토 사쿠지는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때 살아나온 100여 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생존자를 직접 찾아 증언을 수집해 쓴 책이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4,730톤의 우키시마호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마치 콩나물 시루 같았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던 일본군 승무원들의 증언도 엇갈린다.

목적지가 도쿄 마이즈루만이라고 한 증언과 부산항이라고 한 증언이 나왔다.

 

일본 해군 생존자의 우키시마호 목적지 증언이 엇갈리는 것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했다는 것으로, 우키시마호 폭침 바로 직전 일본 해군 승무원 250명 중 대다수가 탈출하고 25명의 사망자 밖에 안 나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증언한 한국과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미국이 설치한 기뢰와 부딛혀 일어난 기뢰 폭발설이나 일부 일본군의 항명 파동에 의한 자폭설이 아니다.

우키시마호 일본군 승무원 생존자 일부가 우키시마호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 발생하고 10년이 지난 1954년 10월 일본 오사카의 국제신문은 인양한 우키시마호 밑바닥 철판에 생긴 구멍이 안쪽에서 밖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당시 폭발음이 3~4회가량 연속해서 났다고 모두 증언했는데 기뢰 폭발로 생기는 물기둥도 없었고, 기뢰 폭발은 연속해서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우키시마호에는 부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줄 바다의 지도, 즉 해도(海圖)도 없었고, 불과 3일 전 패전국이 된 우키시마호 승선 일본 해군이 부산항에 입항하면 전쟁포로가 될 수 있다고 동요했다는 것과 우키시마호 연료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한국인 강제징용자 수송에 투입된 우키시마호에 360톤가량의 돌이 실려있었다는 사실은 일제가 계획적으로 대학살 만행을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우키시마호가 침몰할 때 바로 인근에 일본군 해군 기지가 있었지만, 일본 해군은 생사의 경계에서 발버둥 치는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들을 구조하지 않았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에서 생존한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의 민간 어선만이 자발적으로 구조에 나섰다고 한다.

 

 

 

 

 

 

 

 

 

 

남경대학살은 약 2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경을 공격하고 점령한 약 2달 동안 최대 30만 명의 중국인을 대학살 한 잔혹한 만행이며 대참극이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아주 짧은 시간에 최소 5천 명에서 최대 1만 명에 이르는 우키시마호 승선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을 몰살시키다시피 한 일제의 대학살 만행 사건이다.

 

 

 

 

우키시마호가 침몰하고 5년이 지난 1950년 만들어진 일본 외무성 기록문서 '함정조난표류관계잡건'에는 우키시마호에 8천 명이 승선한 것으로 나와 있고, 또 다른 문서 '수송함 우키시마호에 관한 자료'에는 한국인 3,735명이 승선한 것으로 나온다.

 

70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지금 우키시마호 승선 인원이 3천 7백여 명인지, 8천 명인지, 1만 2천 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본이 1950년에 일본이 만든 기록을 보면 우키시마호에 한국인 강제징용자기가 최소 8천 명이 승선했다는 사실을 내부적이지만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인정한 기록이다.

 

 

 

 

우키시마 폭침 사건은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선박 승무원의 운항 실수, 기뢰 폭발로 인한 침몰, 배의 결함으로 말미암아 침몰한 사건이 절대 아니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일제의 전쟁범죄는 더더욱 아니며, 패전국 일제가 자국의 전쟁범죄와 진실을 감추거나 없애기 위해 비전시(非戰時) 상태에서 저지른 잔혹한 민간인 대학살 만행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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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8.20 04: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대학살 만행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관련 근현대사 공부를 하고 갑니다^^ 행복가득 주말되세요

  2. 죽풍 2017.08.20 2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도 기록으로 정리돼 있군요.
    역사는 기록의 산물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사상 최악의 해양 대참사(해난사고)와 폭발 원인과 진상규명이 안 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아프리카 난민과 시리아 난민 보트가 전복되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숨지는 해난사고 소식을 방송을 통해 가끔 접한다.

이런 해양 대참사와 다름없는 해난사고 소식은 단지 가난한 나라, 힘없는 나라의 불법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죽음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금방 잊힌다.

 

 

반면 정치, 경제, 군사 강대국의 국민 수십, 수백 명이 해난 사고로 죽거나 다치면 온 나라, 아니 전 세계가 지나칠 정도로 떠들썩하게 사건을 집중보도하고 희생자를 추모한다.

 

인간 생명의 가치는 본질에서 같지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된 이 시대는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전쟁 중에 민간 소유의 배와 국가 소유의 전함 등이 항해 중 고장과 파손 등의 내부적인 문제와 태풍, 충돌, 항공기와 군함, 어뢰 등의 공격을 받아 난파, 전복, 침몰하는 외부적인 문제로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의 규모에 따라 해난사고, 해양대참사라고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때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3만 2,600톤 규모의 미군 군함 애리조나호가 일본군의 폭격으로 침몰했다.

 

일본군 폭탄이 애리조나호 화약고에 명중하면서 거대한 전함이 침몰했고, 1,100여 명의 일거에 수장됐다.

애리조나호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전함이지만, 항해 중이 아니고 정박 중에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이라 애리조나호 침몰 사건을 해난사고, 해양 대참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구촌 근현대사에서 사상 최악의 해난사고라고 알려진 해양 대참사가 있다.

해양대참사의 해난사고는 전시(戰時)와 평상시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 해양대참사하면 타이타닉호를 떠올린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는 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가 아니다.

 

1912년 4월 14일 빙산과 충돌한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는 1,5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낸 해양대참사가 맞지만, 타이나닉호 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해난 사고 건수가 많다.

 

1948년 12월 4일 중국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때 상하이 북방의 황푸강 하구에서 피난민 4천여 명을 태우고 가던 키앙야호가 과거 일본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뢰와 부딪쳐 폭발하면서 약 4천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987년 12월 20일 승선 인원을 3배나 초과한 필리핀 도나파즈호와 유조선 백터호가 충돌했다.

도나파즈호에 승선했던 4,300여 명이 목숨을 잃어 중국 키앙야호와 타이타닉호 참사를 뛰어넘는 평상시(비전시非戰時) 사상 최악의 해양대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해난사고가 발생하면 배의 승선 인원을 정확하게 기록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는 대부분 독일과 소련의 부상병과 피난민을 수송하다 발생한 해양대참사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은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부상병과 피난민 등 승선 인원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일부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사망자를 추정한 경우가 대다수다.

 

 

 

1941년 11월 7일 소련의 병원선 아르메니아호가 독일군 비행기 포격으로 침몰했다.

초기에는 약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조사가 다시 이루어지면서 자료와 생존자 증언 등을 토대로 최대 약 7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혹자는 아르메니아호 사망자가 약 1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 말기였던 1945년 1월 30일 소련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2만 5천 톤독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침몰한 사건이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는 500여 명의 군인과 승무원 외에 부상병과 난민 등 최대 1만 명 남짓이 승선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한겨울 소련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은 배는 침몰했고, 1,200여 명이 구조되고 나머지는 사망 또는 행방불명됐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고 사망자의 정확한 통계는 없고, 최소 5천여 명에서 최대 9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5년 2월 9일 1만 4천톤의 독일 슈토이벤호 역시 소련 잠수정의 공격을 받아 4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1945년 4월 16일 독일 고야호가 소련 잠수정의 공격을 받아 7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과 소련 배에는 독일군과 소련군도 승선하고 있었지만, 부상병과 피난민 수송이 주목적이었던 배였다.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종전됐다.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또는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라고 불리는 해양대참사(해난사고)가 발생한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 약 1만 명이 일본 앞바다에 수장되는 사건으로 7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키시마호 침몰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우키시마호 침몰 생존자의 증언대로라면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사상 최악의 해난사고, 사상 최악의 해양대참사 사건이다.

 

 

 

 

일본은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로 약 5백여 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실종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가 폭발하여 침몰할 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한국과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소 5천여 명에서 최대 1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된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가족이 탑승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침몰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진행형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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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7.08.19 0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은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는 공식적인 발표와는 다르게 당시 사건때 탈출에 성공한 한국과 일본의 생존자들 증언에 의하면 최소 5천여명~ 최대 1만 명의 사망자 났다고 증언한 것으로보아.. 밝혀진 것 말고 정말 더 피해가 컸을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일본은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고 하니 먼가 이유가 있지 않나 의심되기도 합니다...

  2. *저녁노을* 2017.08.19 05: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갑니다.

    행복한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3. 청결원 2017.08.19 07: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양 대참사 글 잘 보고 가네요

  4. 죽풍 2017.08.19 2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상 최악의 해난 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것 같습니다.
    1만여 명의 영혼은 아직도 바다를 떠돌아 다닐지도 모를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