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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사상 최악의 해양 대참사(해난사고)와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by 도생(道生) 2017. 8. 19.

사상 최악의 해양 대참사(해난사고)와 폭발 원인과 진상규명이 안 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아프리카 난민과 시리아 난민 보트가 전복되어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숨지는 해난사고 소식을 방송을 통해 가끔 접한다.

이런 해양 대참사와 다름없는 해난사고 소식은 단지 가난한 나라, 힘없는 나라의 불법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죽음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금방 잊힌다.

 

 

반면 정치, 경제, 군사 강대국의 국민 수십, 수백 명이 해난 사고로 죽거나 다치면 온 나라, 아니 전 세계가 지나칠 정도로 떠들썩하게 사건을 집중보도하고 희생자를 추모한다.

 

인간 생명의 가치는 본질에서 같지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훼손된 이 시대는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전쟁 중에 민간 소유의 배와 국가 소유의 전함 등이 항해 중 고장과 파손 등의 내부적인 문제와 태풍, 충돌, 항공기와 군함, 어뢰 등의 공격을 받아 난파, 전복, 침몰하는 외부적인 문제로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건의 규모에 따라 해난사고, 해양대참사라고 말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그때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3만 2,600톤 규모의 미군 군함 애리조나호가 일본군의 폭격으로 침몰했다.

 

일본군 폭탄이 애리조나호 화약고에 명중하면서 거대한 전함이 침몰했고, 1,100여 명의 일거에 수장됐다.

애리조나호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전함이지만, 항해 중이 아니고 정박 중에 공격을 받아 침몰한 사건이라 애리조나호 침몰 사건을 해난사고, 해양 대참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지구촌 근현대사에서 사상 최악의 해난사고라고 알려진 해양 대참사가 있다.

해양대참사의 해난사고는 전시(戰時)와 평상시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 해양대참사하면 타이타닉호를 떠올린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는 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가 아니다.

 

1912년 4월 14일 빙산과 충돌한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는 1,500여 명의 인명 피해를 낸 해양대참사가 맞지만, 타이나닉호 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해난 사고 건수가 많다.

 

1948년 12월 4일 중국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때 상하이 북방의 황푸강 하구에서 피난민 4천여 명을 태우고 가던 키앙야호가 과거 일본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뢰와 부딪쳐 폭발하면서 약 4천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987년 12월 20일 승선 인원을 3배나 초과한 필리핀 도나파즈호와 유조선 백터호가 충돌했다.

도나파즈호에 승선했던 4,300여 명이 목숨을 잃어 중국 키앙야호와 타이타닉호 참사를 뛰어넘는 평상시(비전시非戰時) 사상 최악의 해양대참사로 기록되고 있다.

 

 

 

 

 

 

 

 

 

 

 

 

 

 

해난사고가 발생하면 배의 승선 인원을 정확하게 기록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2차 세계대전 중 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는 대부분 독일과 소련의 부상병과 피난민을 수송하다 발생한 해양대참사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은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 부상병과 피난민 등 승선 인원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에 일부 자료와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사망자를 추정한 경우가 대다수다.

 

 

 

1941년 11월 7일 소련의 병원선 아르메니아호가 독일군 비행기 포격으로 침몰했다.

초기에는 약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조사가 다시 이루어지면서 자료와 생존자 증언 등을 토대로 최대 약 7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혹자는 아르메니아호 사망자가 약 1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2차 세계대전 말기였던 1945년 1월 30일 소련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2만 5천 톤독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침몰한 사건이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는 500여 명의 군인과 승무원 외에 부상병과 난민 등 최대 1만 명 남짓이 승선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한겨울 소련 잠수정의 어뢰 공격을 받은 배는 침몰했고, 1,200여 명이 구조되고 나머지는 사망 또는 행방불명됐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고 사망자의 정확한 통계는 없고, 최소 5천여 명에서 최대 9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5년 2월 9일 1만 4천톤의 독일 슈토이벤호 역시 소련 잠수정의 공격을 받아 4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1945년 4월 16일 독일 고야호가 소련 잠수정의 공격을 받아 7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과 소련 배에는 독일군과 소련군도 승선하고 있었지만, 부상병과 피난민 수송이 주목적이었던 배였다.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종전됐다.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또는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라고 불리는 해양대참사(해난사고)가 발생한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 약 1만 명이 일본 앞바다에 수장되는 사건으로 7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키시마호 침몰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우키시마호 침몰 생존자의 증언대로라면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사상 최악의 해난사고, 사상 최악의 해양대참사 사건이다.

 

 

 

 

일본은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로 약 5백여 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실종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가 폭발하여 침몰할 때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한국과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소 5천여 명에서 최대 1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된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가족이 탑승한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침몰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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