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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대학살 만행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by 도생(道生) 2017. 8. 20.

일제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대학살 만행, 폭발로 위장한 집단살인 사건

돌아오지 못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1937년 12월부터 약 6주간 자행된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은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은 중국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1876년 일제와 불평등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인 약 8백만 명이 일제의 잔혹한 만행에 대학살 당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만 해도 약 30만 명의 한국인이 일제의 총칼 아래 죽어갔다.

 

조선의 관군도 동학 농민혁명군 진압에 동원됐지만, 일제가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당시 최신식 연발 기관총 난사해 대학살을 자행했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에도 일제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은 계속됐다.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대학살 만행 사건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일제강점기 강제로 끌고온 한국인 강제징용자를 귀국시키지 않았다.

일례로 사할린에서 소련군과 대치하던 일제는 패망 직전 일본군과 자국민을 본국으로 대피시키면서도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철수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미국)의 주도로 일본의 한국인 강제징용자 송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귀국하는 기쁨을 안고 탄 귀국선이었지만,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으로 말미암아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앞바다에 수장됐다.

 

 

 

 

 

 

 

 

 

 

 

 

일본은 1945년 8월 18일 갑자기 노역에 강제동원했던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을 부산으로 송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일본 해군 수송선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들은 일본 본토 북동부의 아오모리현, 도호구와 홋카이도 지역에서 일제의 군사시설, 군수공장, 탄광 등에서 강제노역하던 사람들이다.

 

 

 

1945년 8월 22일 아오모리현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4730톤의 우키시마호는 목적지였던 부산항으로 곧장 항해하지 않는다.

부산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동해로 나가야 하는데, 일본 서쪽 연안을 따라 내려가던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교토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간다.

 

해안에서 300m가량 떨어진 시모사바 앞바다에 우키시마호가 멈춰섰고 잠시 후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나 침몰한다.

 

 

 

 

 

 

 

 

 

 

 

 

우키시마호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본다면 우키시마호에 실제 승선 인원은 일본군과 한국인 강제징용자를 포함하여 최소 7천 5백 명에서 최대 1만 2천 명에 이르고, 생존자를 제외한 대다수 한국인이 사망한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일본군이 저지른 한국인 집단 대학살이란 결론이 나온다.

 

 

 

일본은 우키시마호에 약 3천7백여 명이 승선했고, 일본 해군 25명과 한국인 강제징용자를 포함하여 총 550여 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실종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일본은 미국이 설치한 기뢰가 수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키시마호가 폭발했다고 주장했다.

 

 

 

 

 

 

 

 

 

 

 

 

1992년 일본인 사이토 사쿠지는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때 살아나온 100여 명의 한국인 강제징용 생존자를 직접 찾아 증언을 수집해 쓴 책이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됐다.

 

4,730톤의 우키시마호에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마치 콩나물 시루 같았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던 일본군 승무원들의 증언도 엇갈린다.

목적지가 도쿄 마이즈루만이라고 한 증언과 부산항이라고 한 증언이 나왔다.

 

일본 해군 생존자의 우키시마호 목적지 증언이 엇갈리는 것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했다는 것으로, 우키시마호 폭침 바로 직전 일본 해군 승무원 250명 중 대다수가 탈출하고 25명의 사망자 밖에 안 나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을 증언한 한국과 일본군 생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미국이 설치한 기뢰와 부딛혀 일어난 기뢰 폭발설이나 일부 일본군의 항명 파동에 의한 자폭설이 아니다.

우키시마호 일본군 승무원 생존자 일부가 우키시마호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 발생하고 10년이 지난 1954년 10월 일본 오사카의 국제신문은 인양한 우키시마호 밑바닥 철판에 생긴 구멍이 안쪽에서 밖으로 향하고 있었으며, 당시 폭발음이 3~4회가량 연속해서 났다고 모두 증언했는데 기뢰 폭발로 생기는 물기둥도 없었고, 기뢰 폭발은 연속해서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우키시마호에는 부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줄 바다의 지도, 즉 해도(海圖)도 없었고, 불과 3일 전 패전국이 된 우키시마호 승선 일본 해군이 부산항에 입항하면 전쟁포로가 될 수 있다고 동요했다는 것과 우키시마호 연료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한국인 강제징용자 수송에 투입된 우키시마호에 360톤가량의 돌이 실려있었다는 사실은 일제가 계획적으로 대학살 만행을 준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우키시마호가 침몰할 때 바로 인근에 일본군 해군 기지가 있었지만, 일본 해군은 생사의 경계에서 발버둥 치는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들을 구조하지 않았고,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에서 생존한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의 민간 어선만이 자발적으로 구조에 나섰다고 한다.

 

 

 

 

 

 

 

 

 

 

남경대학살은 약 2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남경을 공격하고 점령한 약 2달 동안 최대 30만 명의 중국인을 대학살 한 잔혹한 만행이며 대참극이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아주 짧은 시간에 최소 5천 명에서 최대 1만 명에 이르는 우키시마호 승선 한국인 강제징용자와 그 가족을 몰살시키다시피 한 일제의 대학살 만행 사건이다.

 

 

 

 

우키시마호가 침몰하고 5년이 지난 1950년 만들어진 일본 외무성 기록문서 '함정조난표류관계잡건'에는 우키시마호에 8천 명이 승선한 것으로 나와 있고, 또 다른 문서 '수송함 우키시마호에 관한 자료'에는 한국인 3,735명이 승선한 것으로 나온다.

 

70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지금 우키시마호 승선 인원이 3천 7백여 명인지, 8천 명인지, 1만 2천 명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본이 1950년에 일본이 만든 기록을 보면 우키시마호에 한국인 강제징용자기가 최소 8천 명이 승선했다는 사실을 내부적이지만 일본 정부 차원에서 인정한 기록이다.

 

 

 

 

우키시마 폭침 사건은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선박 승무원의 운항 실수, 기뢰 폭발로 인한 침몰, 배의 결함으로 말미암아 침몰한 사건이 절대 아니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일제의 전쟁범죄는 더더욱 아니며, 패전국 일제가 자국의 전쟁범죄와 진실을 감추거나 없애기 위해 비전시(非戰時) 상태에서 저지른 잔혹한 민간인 대학살 만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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