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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해남도(하이난섬) 조선인 천인갱 학살사건

by 도생(道生) 2017. 8. 27.

2차 세계대전이 종전(終戰)된 후 비전시(非戰時, 평상시) 상태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대학살 만행

일본군의 해남도(하이난섬) 조선인 천인갱 학살사건

 

 

 

 

 

 

 

 

 

 

 

 

20세기 초부터 제국주의 열강들은 해남도(하이난섬)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해남도(하이난섬)는 지리적 요건과 함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원이 풍부했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중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비행기로 중국 본토 공격과 동남아를 집어삼키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해남도(하이난섬)를 선택했다. 일본군에게 해남도(하이난섬)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을 위해 남중국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서 일본군과 함께 점령지에 반드시 동행하는 것이 전범 기업 진출이다. 

일본군은 1940년부터 민간기업 전문가를 동행하여 풍부한 철광석과 주석, 석회 등 다양한 자원 실사에 나섰고, 해남도(하이난 섬) 개발하기 시작했다.

 

 

1943년 3월 조선총독부는 일본군이 해남도(하이난섬) 개발에 필요한 인력 요청을 받아들여 서울, 대구, 광주, 대전, 원산, 해주, 신의주, 청주, 평양 등 조선 각지의 형무소(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조선인을 '남방파견보국대(조선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한다.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으로 조선인을 강제노역과 일본군, 군무원,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대거 강제동원하면서 인력이 부족해지자, 교도소에 수감된 제소자까지 해남도(하이난섬)에 강제 동원한 것이다.

 

 

약 2천여 명의 조선인 강제징용자가 해남도(하이난 섬)에 끌려갔고, 해남도파견보국대로 초기에 갔던 조선인 110여 명이 가출옥(가석방)하고 총 7백여 명이 귀환하여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해남도(하이난섬) 원주민들은 강제동원된 조선인 2천여 명 가운데 나머지 1300여 명이 일본군의 잔학한 대학살 만행 아래 생매장됐다고 증언했다. 해남도 천인갱(千人坑)은 일본군의 총칼 아래 학살된 조선인 강제징용자가 묻힌 곳을 말한다.

 

 

해남도(하이난 섬)는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일본군 비행장, 군사기지, 발전용 댐, 도로, 철로, 군수공장 등을 건설하는 데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중국 본토에서 중국인을 강제동원하고 연합군 포로들과 해남도(하이난섬) 원주민도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일본군과 일본 전범 기업이 조선인 및 중국인과 포로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할 때는 지역을 가리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노예와 짐승보다 못한 대우, 구타와 폭언 등의 학대와 차별, 하루 12시간이 넘는 중노동, 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식량 배급, 다치거나 병이 들면 치료 없이 무조건 죽여버리는 인간 이하의 짓을 했다.

 

 

일본군은 일본이 패망하자 조선인 강제징용자를 끌고 와 갱도를 파게 하고 그곳에 조선인을 생매장했다.

일본군이 조선인 강제징용자 1,300여 명을 생매장한 곳이 바로 천인갱(千人坑)이다.

 

 

 

 

 

 

 

 

 

 

중국 하이난성(해남성)이 1995년 발행한 철제하적성풍혈우(鐵蹄下的腥風血雨) 철 발굽 아래의 피비린내 나는 비바람(부제: 일군해남성침공실록日軍海南省侵攻實錄)이 세상에 나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8년 조선일보가 보도하면서 우리에게도 일본군의 조선인 생매장 사건, 해남도(하이난 섬) 천인갱 사건이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강제로 끌고 온 조선인 강제징용자를 총과 칼로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불태우고 휘발유로 불을 붙이고, 생매장하는 등 대학살 만행을 저질렀다.

 

 

해남도(하이난섬) 삼아시(三亞市) 남정촌(南丁村)에 살던 리(黎)족이 일본군의 조선인 대학살 만행을 겪은 후 천인갱이 있던 지역을 조선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해남도에도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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