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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申仁善) - (2)

 

 

 

 

 

 

 

 

 

 

 

 

 

 

 

 

율곡 이이는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남다른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조선 왕조 5백 년 역사에서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한 신화 같은 이야기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의 주인공이 바로 율곡 이이다.

 

 

 

 

율곡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1501~1561)는 50세에 이르러 음서(蔭舒)로 관직에 나갔다.

남다르게 총명했던 율곡 이이와 현명한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의 가르침 아래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율곡 이이의 성장기다.

 

예나 지금이나 아무리 총명하고 영특한 아이라고 해도 부모님 또는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그 영재의 천재성은 묻힐 수도 있다.

 

 

 

 

 

 

 

 

 

 

 

 

 

 

율곡 이이의 총명함과 천재성은 능력 있는 인재를 발탁하는 조선 시대 과거에서 그 빛을 발한다.

13세에서 29세까지 소과(생원과, 진사과)와 대과, 별시 등에서 모두 9차례 급제를 한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조선왕조 국가 고시를 아홉 번이나 급제한 인물이란 의미다.

 

 

 

율곡 이이는 왜? 굳이 과거를 아홉번이나 치렀을까?

자신의 총명함과 천재성을 뽐내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학문적 성찰과 학문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과거를 계속 본 것일까?

아니면 때를 기다린 것일까?

 

 

율곡 이이 본인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9번이 과거 급제에서 분명한 것은 굳이 안 봐도 되는 과거까지 보았다는 점이다.

 

 

율곡 이이는 13살이 되던 1548년(명종 3) 처음 과거를 보았고 진사시(進士試, 초시)에 합격했다.

1564년(명종 19) 8월에 아홉 번째 과거 식년시(式年試, 초시 복시 전시)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간다.

 

 

 

 

명종은 1545년에서 1567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22년의 재위 중 20년 동안은 문정왕후(1501~1565)와 소윤의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전횡하던 시기다.

1565년 4월에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윤원형과 정난정 등 권력을 전횡했던 인사들이 죽으면서 혼란했던 조정은 안정을 찾는다.

 

 

 

 

 

 

 

 

 

 

 

 

 

 

율곡 이이가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요인 중에 가정사도 영향이 있었지만, 율곡 이이의 조정 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는 할 수 없다.

 

 

16살이 되던 1551년(명종 6)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경기도 파주에서 시묘살이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가에 귀의하여 1년간 승려생활을 하였다. 이때 공부한 불교와 도교 사상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으로 심적인 방황과 더 큰 공부를 위해 승려를 했던 이력은 자신과 사상이 사림(선비)에 의해 공격받는 빌미가 되었다. 22살이 되던 1577년(명종 12) 성주 목사 노성린의 딸 곡산 노씨와 혼례를 올린다.

 

23살의 율곡 이이는 58살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우주의 질서와 인간의 문제 등 서로의 사상을 갖고 사흘 동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퇴계 이황은 남명 조식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이었다.

 

 

 

 

 

율곡 이이가 26살이 되던 1561년(명종 16) 사헌부 감찰을 지낸 아버지 이원수마저 돌아가셨다.   

3년 상을 마친 율곡 이이는 29살이 되던 1564년(명종 19) 급제하여 관직에 출사한다.

 

 

1572년(선조 5)부터 1581년(선조 14)까지 관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관직에 나가기를 몇 차례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후학을 양성하고 성학집요, 격몽요결, 기자실기 등을 저술하였다.

 

 

1575년(선조 8)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사림(선비)세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완화하고 서로 화합시키기 위해 동인과 서인 양쪽 모두 옳고 그를 수 있다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전개하면서, 동인과 서인을 통합하는 조제론(調劑)을 주장하자 동인이 율곡 이이를 비판한다.

 

 

 

1581년(선조 14) 사헌부 대사헌, 1582년(선조 15) 이조판서,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로 있다가,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난다.

 

1584년(선조 17) 율곡 이이는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율곡 이이는 목숨을 내놓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조선의 각종 병폐를 개혁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직언하였다.

 

율곡 이이는 1574년(선조 7) 만언봉사(萬言奉事), 1582년(선조 15) 진시폐소(陳時弊疏), 1583년(선조 16) 6조계(六條啓, 시무 6조) 등 조선 개국 이래 200년 동안 누적되어온 조선의 적폐(積弊),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청산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추진했던 개혁 정치, 즉 경장(更張)은 우유부단한 선조와 동인과 서인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무산되고 만다.

 

 

율곡 이이의 사상과 철학은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기, 윤증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를 형성한다.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소과(생원과 진사과)의 초시와 복시, 대과의 초시와 복시와 전시 총 다섯 단계다.

소과(小科, 생원과와 진사과의 초시 복시), 대과(大科, 초시 복시 전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식년시(式年試)다.

별시(別試, 초시 복시)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나 인재가 필요한 때 실시하는 과거 제도다. 

 

 

율곡 이이의 아홉 번 과거 급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경력

 

1548년(명종 3) 13세 소과(진사시 초시) 급제

1556년(명종 11) 21세 소과 (진사시 복시) 급제

1558년(명종 13) 23세 별시(초시) 급제

1564년(명종 19) 29세 생원시(명경과 초시와 복시) 급제, 진사시(초시) 급제, 대과(초시, 복시, 진시) 급제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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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11.22 06: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사임당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슈나우저 2016.11.22 15: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씨가 많이 쌀쌀하네요 ^ ^ 감기 조심하세요~

조선 중기 대학자 율곡 이이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申仁善) -(1)

 

 

 

 

 

 

 

 

 

 

 

 

 

 

 

 

조선 중기의 대학자 우계 성혼(1535~1598, 중종 30~선조 31), 구봉 송익필(1534~1599, 중종 29~선조 32), 율곡 이이(1537~1584, 중종 32~선조 17) 3명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학문을 논하고 돈독한 우정을 나눈 사이였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 율곡 이이 세 사람이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35년간 학문적 교류와 우정을 담아 주고받은 편지는 후대에 현수간(三賢手簡)』으로 만들어졌고, 보물 14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 모자(母子)는 대한민국 화폐 초상에 함께 등장한다.

율곡 이이는 오천 원짜리 지폐에 초상이 들어 있고, 어머니 신사임당은 오만 원짜리 지폐에 초상이 들어 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1504~1551, 연산군 10~명종 6)은 평산 신씨로 명문가의 후손이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아버지는 신명화, 어머니는 용인 이씨다.

 

 

 

신사임당 신인선은 평산 신씨 시조 신숭겸의 19대손이 된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고조부 신개는 세종대왕 재위 시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신사임당의 증조부 신자승(성균관 대사성)은 정선공주와 남이 장군 사이에서 태어난 큰딸과 혼인했다.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딸 정선공주)

신사임당의 조부 신숙권은 영월군수를 역임했다.

아버지 신명화(1476~1522)가 41살에 소과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외가는 용인 이씨 집안이다.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의 증조부 최치운은 세종대왕 재위 시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조부 최응현은 형조참판을 지냈다.

 

강릉 오죽헌을 지은 사람이 용인 이씨의 외조부 최치운이며, 최치운은 아들 최응현에게, 최응현은 사위 (용인 이씨) 이사온에게, 이사온은 사위 신명화에게 주었다. 

 

신사임당 신인선을 기준으로 하면 아버지는 신명화, 이사온은 외조부, 최응현은 외외증조부, 최치운은 외외고조부가 된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는 덕수 이씨로 사대부 집안이었지만, 신씨 집안에 미치지 못했다.

율곡 이이의 친가보다 외가와 외외가가 더 명문가였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에서 신사임당 신인선이 태어났고,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신인선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이가 바로 율곡 이이다.

 

 

 

 

신사임당 신인선의 외조부 이사온은 식년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영특한 둘째 손녀 신인선을 총애하여 소학을 비롯한 학문과 시, 서 등을 가르쳤고 그림에도 능했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유학 경전을 자주 보고 글을 많이 썼다고 하나 그림만 전할 뿐 글은 전하지 않는다.

신사임당 신인선(1504~1551)이 열아홉 살 되던 1522년(명종 7) 이원수(1501~ 1561)와 강릉에서 혼인하였다.

 

 

 

 

신인선의 호가 사임당(師任堂)이다.

고대 중국의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창업한 문왕의 어머니가 태임(太任)이다.

 

공자는 군주의 이상적인 인물로 '요순우탕주공'을 말하였다.

공자가 말한 7명 중 주나라에만 문왕과 무왕, 그리고 무왕의 동생 주공단 세 명이 있다.

 

 

 

신사임당 신인선이 현숙한 여인의 전형인 태임의 정성스런 태교(胎敎)를 본받으려 한다는 의미에서 사임당(師任堂)이란 호를 스스로 붙였다고 한다. 신인선의 호 사임당에서 자식에 대한 지고한 사랑과 자비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문왕(아들 무왕)은 은나라 폭군 걸주(桀紂)를 폐하고 주나라를 창업한 인물이다.

수많은 역모사건이 일어났고 때론 조작되기도 했던 조선 시대에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가 새로운 나라(역성혁명)를 연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흠모하여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자칫 역모로도 연결될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모양처 신사임당 신인선의 모습은 아들 율곡 이이가 저술한 율곡전서』 의 선비행장行狀,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일대기)이 가장 기초적인 사료다.

 

 

율곡 이이의 선비행장을 토대로 율곡의 제자 김장생과 김장생의 제자 우암 송시열 등 노론 세력에 의해 신사임당은 현재의 현명한 어머니요 어질고 착한 아내의 모습, 덕을 갖춘 여인,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자리 잡으면서 세인의 존경을 받게 된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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