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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20대 왕 경종대왕 이윤 - 장희빈의 아들

by 도생(道生) 2016. 9. 24.

근세조선 20대 왕 경종(景宗)대왕 이윤 - 장희빈의 아들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조선의 19대 왕 숙종대왕 이순(1661~1720)이 1720년 승하하자 왕세자 이윤(1688~1724)이 조선의 20대 왕으로 등극한다. 

 

 

조선의 20대 왕 경종대왕 이윤은 숙종대왕과 후궁이었던 숙원 장씨(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난 숙종의 첫째 아들이다.

 

숙종에게 첫 번째 아들을 안겨준 숙원 장씨는 소의(昭儀)로 봉해졌고, 희빈을 거쳐 조선의 국모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경종대왕 이윤은 3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 이윤은 14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 장희빈을 여의는 아픔을 겪는다.

 

 

 

 

1717년(숙종 43) 숙종이 지병이 악화하자 대리청정을 하였다.

1690년(숙종 16)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30년 동안의 왕세자 자리에 있었고, 1720년 33살에 조선의 20대 임금이 되었다.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아버지 숙종과 아직 살아 있는 권력, 서인의 노론 세력은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경종은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사사(자진)된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었다.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미움이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숙종은 승하하기 전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으로 후사로 정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세자(경종)를 폐하지도 않고, 연잉군을 새로운 세자를 세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왕세자 이윤에게 대리청정을 시켰

 

 

노론 세력은 왕세자 이윤을 볼 때마다 폐비 윤씨와 연산군의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장희빈의 아들 왕세자 이윤이 다음 보위를 잇게 할 수 없었다.

 

장희빈의 죽음에 관여했던 노론 세력은 왕세자가 대리청정에서 잘못한 것이 있다면 트집 잡아 세자를 바꿀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소론 세력도 왕세자 이윤을 지키려고 필사적이었다.

 

 

숙종의 강력한 왕권은 당대에 끝났다.

조선의 20대 왕 경종대왕 이윤의 재위 4년간은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오랜 왕세자 생활과 환국 정치와 붕당 정치를 경험한 왕세자 이윤은 무난하게 대리청정을 하였고,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노론 세력은 34살의 경종에게 후사가 없으니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라고 대놓고 요구했다.

 

 

병약한 몸에 마음도 여리고, 때론 무기력하게 인식되어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경종은 노론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소론도 등용한다.

노론(연잉군 지지)과 소론(경종 지지)의 권력 투쟁 속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경종은 세제 연잉군(영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가 다시 친정 체제로 전환하는 등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암투 속에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1721년(경종 1) 소론의 김일경은 노론이 왕권 교체를 위해 모략을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면서 노론 세력이 유배 파직 좌천된다.

 

1722년(경종 2)에 남인 출신 목호룡이 또다시 노론 세력을 탄핵한다.

노론이 환관, 궁녀들과 모의하여 경종을 시해하기 위해 3가지 계책(삼급수三急手)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노론 세력은 수십 명이 죽고 수백 명이 화를 당했다.

 

노론이 정치적 탄압을 당한 신축년(1721, 경종 1, 신축옥사))과 임인년(1722, 경종 2, 임인옥사)에 걸쳐 일어난 두 사건을 '신임옥사(辛壬獄事)'라 한다. 노론을 밀어낸 소론 세력은 권력의 주도권을 잡았다.

 

 

 

 

 

 

 

 

 

 

 

 

 

혹자는 조선의 20대 경종대왕 이윤이 무기력했다기보다는 노론과 소론의 주도권 싸움을 잘 이용한 환국(換局) 정치라고도 한다.

노론과 소론의 주장을 들어주면서 유약한 듯 보였던 경종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는 것이다.

 

 

강력한 왕권을 구사했던 숙종대왕과 요부의 대명사가 된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짧은 재위와 치열한 붕당정치 가운데서 있었고 조선왕조에서 존재감이 미미했던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영조)를 지지하는 노론과의 첨예한 대립 속에 병약하고 고독한 왕 경종은 1724년(경종 4) 3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묘호는 경종(景宗)이며 시호는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이다.

 

 

 

 

소론의 일부에서는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했고 저잣거리에도 경종 독살설에 대한 벽서가 붙는 등 민심이 동요됐다.

영조 때 반란을 일으킨 역적 이인좌는 난을 일으키며 경종의 죽음에 관련하여 독살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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