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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의 명필 서예가 한호(한석봉)

by 도생(道生) 2017. 1. 19.

조선의 명필 서예가 한호(韓濩, 한석봉韓石峯)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은 당대 명나라 최고 문인이며 명필가로 유명했고, 서울 균관 '명륜당(明倫堂)' 편액을 썼다고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으로 와 있던 주지번은 교산 허균으로부터 허난설헌의 시를 가져가 명나라에 소개하였다.

주지번은 조선의 명필이며 서예가인 한호(한석봉, 1543~1605)의 글씨를 보고 중국 역사에서 최고의 명필이며 문장가였던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 글씨와 비슷하다고 극찬했다.

 

 

 

 

명필(名筆) 석봉 한호가 조정에 출사한 시기는 사림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시기였고,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된 시기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문인들이 정치세력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한석봉 설화에도 나오듯 황해도 송도(개성)에서 태어난 석봉 한호는 어머니가 떡 장사를 하며 뒷바라지를 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의 집안 사정과 누구에게 보란 듯이 내놓을 만한 문벌(文閥) 집안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한미(寒微)한 집안 출신이다. 

 

 

 

 

 

 

 

 

 

 

 

 

선조 재위 때는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석봉은 동인과 서인의 두 사림(士林) 세력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명필이며 서예가 한석봉이 동인과 서인 중 한쪽에 속했다 하더라도 쟁쟁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더욱이 학문 및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많았던 당시로써는 글씨 하나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한석봉이 영계 신희남(1517~1591)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고 전해지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영계 신희남은 중종 38년(1543)에 과거에 합격하고 선조 14년(1581) 병을 핑계로 전라도 영암으로 낙향하였다.

 

 

석봉 한호는 25세 되던 선조 즉위년(1567년) 식년시(진사시)에 합격하며 조정에 출사하였다.

사헌부 장령, 집의, 판교, 와서별제, 감찰 등을 역임한 한석봉은 종4, 5품의 가평군수와 흡곡 현령을 끝으로 관직에서 내려왔다.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에서 파직당하고, 1695년(선조 38)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조선에 왔던 이여송과 마귀 등 명나라 사람들이 천하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를 얻어갔다.

명나라 대학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왕세정(1526~1590)은 조선의 명필 한석봉의 글씨를 평가하며 "성난 사자가 돌을 깨뜨리는 것과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힘차게 내달리는 것과 같다.'라고 극찬했다.

 

 

 

 

글씨(書)의 한석봉(1543~1605)과 함께 시(詩)의 차천로(1556~1615), 문장(文章)의 최립(1539~1612)은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불렸다. 서인(西人)의 종장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당대 최고 문장가이며 형조참판을 지낸 최립조선의 명필이며 서예가인 석봉 한호의 글씨를 찬탄했다.

 

 

최립은 자신이 저술한 『간이집』에서 조선사회가 사람을 문벌로 평가하고, 자신의 판단보다는 영향력이 있는 다른 사람의 평가만 믿는 등 당시의 세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한마디로 명나라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천하의 명필로서 석봉 한호의 글씨가 조선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한 것이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6일(1592년)

길회를 사헌부 지평에, 한호를 사헌부 감찰에 제수하였다.

 

 

 

선조실록 98권, 선조 31년 3월 9일(1598년)

(명나라) 마(귀) 제독이 리나라의 서적을 구하여 각로와 상서 및 선충병의 요구에 부응하려 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이우의 글씨는 중국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으니 한호(한석봉)에게 쓰도록 해서 보내게 하라."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 4월 23일(1601년)

사헌부가 가평군수 한로를 파직할 것을 아뢰니, 이미 추고 하였다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172권, 선조 37년 3월 8일(1604년)

예조가 아뢰기를

"(일본 대마도주) 평의지와 평경직이 각각 종이 20폭을 보내서 진서 액자와 다른 진서의 행서, 초서로 된 액자를 요구해 왔습니다.....

다른 나라에 전파되는 것인 만큼 졸렬한 필적을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발 빠른 사람을 차출하여 곡현령 한호(한석봉)에게 내려보내 써서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강화(講和)를 허락하기도 전에 적인(賊人)이 요구하는 글을 써 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싶다. 그러나 우선은 서울에 있는 아무에게나 쓰도록 하여 그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179권, 선조 37년 윤9월 15일(1604년)

헌부가 아뢰기를

"흡곡현령 한호는 녹권을 베껴 낼 때 싫어하는 기색을 꺼림 없이 드러내어 고의로 오서함으로써 물력을 낭비하게 하였으니.... 파직시키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202권, 선조 39년 8월 6일(1606년)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글씨 획이 약하고 중국은 필력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글씨에 능통한 사람으로서는 한호(한석봉)만한 사람이 없으나 그도 미진한 점이 많다. 주사(명나라 주지번)가 작은 부채에 난정기를 썼는데 작은 글씨가 매우 정교하였다. 우리나라의 글씨에 능통한 자라도 어찌 그에 미치겠는가. 다만 큰 글씨는 작은 글씨처럼 정묘하지 않았다."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주사(명나라 주지번)가 한호의 글씨를 보고, 이것은 난정기와 흡사하니 비록 옛날 글씨를 잘 쓴 자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을 것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16권, 정조 7년 7월 14일(1783년)

개성부 유수 서유방이 상소하기를

".... 아! 인재의 출생은 비록 고금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견발하는 방법에서는 본시 원근의 구별이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본부(本府)는 곧 경사(京師)의 내복(內服)이고, 승국의 고도입니다.

도학(道學)에 있어서는 서경덕, 문장에서는 차천로, 필법(筆法)에서는 한호(한석봉) 부자, 충의에서는 송상현, 김연광, 유극량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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