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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고산 윤선도 오우가 어부사시사

by 도생(道生) 2017. 1. 20.

조선 시조 문학의 대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오우가(五友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조선왕조 시조 문학의 대가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는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1536~1593)과 함께 조선왕조시대 시가(詩歌) 사상의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 여러 작품을 보면 학자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정치가로서의 모습이 더 크게 비친다.

 

 

 

 

한양에서 태어난 고산 윤선도는 백부 윤유기가 후사가 없자 양자로 들어갔다.

백부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전라도 해남 윤유기의 집으로 내려갔다.

고산 윤선도의 집안은 동인(東人)이었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면서 남인 계열이 되었다.

 

 

고산 윤선도는 18세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양어머니와 친어머니가 연속해서 돌아가시면서 상을 치렀다.

광해군 4년(1612) 증광시(진사)에 급제하면서 성균관에 들어갔다.

 

광해군 재위 때는 북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광해군 8년(1616)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김제남, 김개시 등을 비판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리고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간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1623년)으로 유배에서 풀려났다.

의금부도사 임명되고 3개월 만에 사직, 찰방 직을 고사하고 전라도 해남으로 내려갔다.

 

42세가 되던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된다.

47세가 되던 1633년(인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정랑, 공조좌랑, 사헌부지평 등을 겸직했고, 같은 해 성산 현감으로 좌천됐다가 1634년 탄핵당하여 해남으로 내려간다.

 

 

 

 

1637(인조 15)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자 비통한 마음으로 완도의 보길도로 들어가 버렸다.

1638년(인조 16) 탄핵을 받아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52년(효종 3)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면직을 청하였고, 그해 예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다시 탄핵을 받아 사직한다.

71세가 되던 1657년(효종 8) 동부승지로 임명되었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공격을 받고 파면된다.

 

 

 

1658년(효종 9)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탄핵당하여 파직되었다.

1659(현종 즉위년) 효종의 능지를 선정하는 부호군이 되었으나 서인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인조의 계비 정렬왕후 복제(예송)문제로 상소를 올려 노론과 대립하다가 함경도 삼수로 유배된다.

 

함경도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 되었다가 81세가 되던 1667년(현종 8) 유배에서 풀려났다.

해남과 부용동을 오가며 지내다 1671년(현종 12) 완도 보길도에서 85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1617년(광해군 9) 31세에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첫 번째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약 50년의 관직 생활 중 약 20년 유배생활, 약 20년 은거 생활, 나머지 약 10년간만 관직에 있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세력 서인과 맞선 고산 윤선도는 힘없는 남인이었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무장한 윤선도는 어렵고 힘든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쳤다. 

조선왕조 인물 중 고산 윤선도는 찾아보기 힘든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된 관직생활을 했다.

 

 

 

 

윤산도의 작품은 상당수가 은거와 유배생활 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56세가 되던 1642년(인조 20) 전라도 해남의 금쇄동에서 지은 오우가(五友歌)를 지었다.

오우가는 변치 않는 다섯 벗, 즉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이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는 말 그대로 다섯 벗이다. 자연의 다섯 벗을 의인화(擬人化)했다. 

 

 

깨끗하고도 끊어지지 않는 물의 영원성을 부단(不斷), 초목은 계절에 따라 변하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바위의 생명성을 불변(不變), 눈과 서리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의 늘 푸르름은 불굴(不屈), 곧게 뻗으면서도 속이 텅 빈 대나무의 불욕(不欲), 세상을 밝게 비추며 모든 것을 보고 있음에도 말하지 않는 달의 침묵 불언(不言)을 노래했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는 오우가와 함께 고산 윤선도의 대표작품이다.

1651년(효종 2) 보길도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어부사시가는 제목 그대로 어부의 생활과 사시(四時,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를 노래한 것이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어부가(漁父歌)를 이현보(1467~1555) 어부사로 개작했고, 고산 윤선도가 계절별로 10수씩 시조를 넣어 40수의 어부사시사로 완성한 것이다.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대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부의 삶을 노래한 것이지만, 사실 어부는 조선의 사대부를 의미한다.

전라도 완도의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통해 자연과 함께하며 세월을 노래하였다.

 

 

 

 

 

 

 

 

 

 

 

 

정치는 비정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졸기(卒記)는 당대 영향력 있던 인물의 업적 등 생애를 평가하는 글이다.

사망한 인물의 정치적 성향과 실록을 편찬한 세력에 의해 혹평과 호평으로 달라진다.  

 

현종실록은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되었고,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은 현종개수실록을 편찬하면서 현종실록에 없는 고산 윤선도의 졸기를 썼고, '윤선도사(尹善道死)'라 하여 무시해 버렸다. 숙종실록 역시 노론의 주도로 편찬됐다.

 

 

 

『현종개수실록』 24권, 현종 12년 6월 30일(1671년)

윤선도가 죽었다.

 

 

 

『숙종실록』 8권, 숙종 5년 8월 2일(1679년)

윤선도에게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윤 8월 10일(1680년)

명하여 윤선도의 관작과 추증한 시호를 추후해서 삭탈하게 하였으니, 전일에 이사명이 상소하여 논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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