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소론의 영수 백의정승 명재 윤증

by 도생(道生) 2017. 1. 21.

소론의 영수 백의정승(白衣政丞)으로 불린 명재(明齋) 윤증(尹拯)

 

 

 

 

 

 

 

 

 

 

 

 

 

조선 19대 왕 숙종이 환국(換局) 정치를 하면서 잠시 남인이 정국을 주도한 것을 빼면 인조반정 이후 서인(西人)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서인(西人) 천하에서 우암 송시열의 노론과 명재 윤증의 소론으로 분열된다.

 

 

 

 

조선왕조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 즉 문벌(문벌)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가 우계 성혼이다.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을 백의정승(白衣政丞), 또는 백의재상(白衣宰相)이라 부른다.

백의정승이나 백의재상은 같은 의미로 뛰어난 학문과 훌륭한 인품을 겸비하여 덕망이 있는 선비(유생)가 단번에 정승(재상)의 반열에 올랐다거나, 야인이지만 정승(재상)과 같은 대우를 받는 인물을 뜻한다.

 

 

 

서인 세력은 내적으로 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와 우계 성혼의 우계학파가 형성되었다.

우계 성혼의 우계학파는 정치적 학문적으로 더 성공한 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1629~1714)은 학문적 스승이 많다.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하여 시남 유계(1607~1664),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신독재 김집(1574~1656), 우암 송시열 등 여러 사람에게 학문을 배웠다.

 

 

 

스승 우암 송시열과 제자 명재 윤증이 갈라선 계기는 해묵은 아버지와 스승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명재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1610~1669)와 스승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김집의 문하생으로 오랜 벗이다.

결과적으로 정적이송시열(1607~1689), 윤휴(1617~1680), 윤선거(1610~1669)는 오랫동안 친분을 갖고 학문적 교류를 하며 지낸 온 사이다.

 

 

 

 

1635년(인조 13) 우암 송시열은 10살이나 어린 백호 윤휴와 충청도 속리산에서 사상적 토론을 했다.

송시열은 자신의 학문에 절대 뒤지지 않는 윤휴의 뛰어난 학문적 깊이에 매우 놀랐다.

그러나 훗날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남인의 영수 백호 윤휴는 예송논쟁 등으로 정치적으로 대립한다.

 

 

더욱이 윤휴가 경전 해석에서 주자와 견해를 달리했다는 이유로 우암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했다.

명재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서인(西人)임에도 윤휴를 학문적으로 높이 평가하였고, 예송논쟁 당시에도 윤휴의 주장에 동조했다.

 

 

 

 

 

 

 

 

 

 

 

 

 

명재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 갔다.

청나라군대가 김포와 강화도로 밀고 들어올 때 윤선거의 친구들과 어머니와 부인이 자결하였는데 윤선거는 몰래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이때 윤증은 9살이었다. 우암 송시열은 이 문제를 두고 윤선거를 크게 비난했다.

 

 

 

 

명재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돌아가시자 묘지명(墓誌銘)을 써달라고 스승 우암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선거의 지난날 허물과 들먹이고 그를 높게 평가해주지 않자 윤증은 감정이 상하게 된다.

급기야 윤증이 스승 우암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 두 사람은 우암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명재 윤증을 따르는 소론으로 갈라서게 된다.

 

 

 

명재 윤증은 스승 우암 송시열의 노론과 대립하는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윤증이 평생 조정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상소를 통해 자기의 주장을 피력했고, 소론이란 정치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어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711년(숙종 41) 편찬된 가례원류(家禮源流)』는 본래 시남 유계(1607~1664)가 자료를 모아 분류해 놓은 것이다.

시남 유계는 죽기 전에 가례원류를 간행해 달라고 제자 윤증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명재 윤증은 가례원류를 간행하지 않고 있다가, 후일에 가례원류마치 신의 집안에서 만든 것처럼려 했다는 이유로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치열한 당쟁이 벌어진다.

 

 

 

특히 당시 노론세력은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우암 송시열과 등을 돌리고, 시남 유계의 유지를 받들지 않고 스승의 업적을 가로채려 했다는 이유로 윤증신자로 비난했다.

 

 

 

명재 윤증은 문벌(文閥)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고 한다.

과거를 보지 않았지만, 뛰어난 학문과 사상으로 소론의 영수가 되었고, 수십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숙종 때는 야인으로 우의정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으나 역시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명재 윤증을 백의재상, 백의정승이라 부른다.

 

 

 

 

 

 

 

 

 

 

 

 

 

숙종실록 47권, 숙종 35년 1월 16일(1709년)

윤증을 우의정으로 제배(除拜)하고....

 

 

 

숙종실록 55권, 숙종 40년 1월 30일(1714년)

행 판중추부사 윤증이 졸하니, 나이 86세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함이 지극하였고, 뒤에 문성이란 시호를 내렸다.

윤증은 이미 송시열을 배반하여 사림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가 편수한 예서(禮書, 례원류)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윤증은 젊어서 일찍이 유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증이 전후로 두 어진 스승을 배반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숙종실록보궐정오 55권, 숙종 40년 1월 30일(1714년)

판중추부사 윤증이 졸하니, 수는 86세였다.

부음을 알리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윤 판부사는 산림(山林)에서 덕을 길러 일찍이 중망이 있었으니, 과인이 존숭하여 신임함과 사림이 존경하고 본받음이 그 어떠하였겠는가? 정승에 오름에 미쳐 돈소함이 더욱 간절했지만, 다만 정성이 부족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했으니, 결연한 생각이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질병이 고질이 되어 갑자기 흄음이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 대개 용모와 자태가 청수하고 위연 하였으며 기상이 높고도 깊어서 그 앉은 모습은 소상(塑像)과 같았는데, 접촉하면 봄볕과 같았으니, 그 하늘에서 품부한 바가 이미 빼어났고 성경(誠敬)으로 함양한 탓으로 용모에 나타나는 바가 자연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 진실한 심지와 독실한 공부는 이 문순공(퇴계 이황) 이후 오직 한 사람뿐이었으며, 문장은 온후하고 간측하여 중와의 명성이 있었으니, 후세에 덕을 아는 자는 이에서 고증할 바가 있을 것이다....

 

 

 

경종실록 9권, 경종 2년 8월 7일(1722년)

고(故) 유신(儒臣) 윤선거, 윤증의 관작과 시호를 회복하였다.

 

 

 

경종실록 13권, 경종 3년 10월 29일(1723년)

좌의정 윤증에게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렸다.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5월 22일(1776년)

고 집의 윤선거와 고 우의정 윤증의 관작을 추탈하고, 그들의 문집을 훼손시키고 사액을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