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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의 명필 서화가 추사 김정희

by 도생 2017. 1. 24.

조선의 명필 서화가, 금석학자이며 실학자 추사 김정희

 

 

 

 

 

 

 

 

 

 

 

 

명필(名筆), 최고의 서화가(書畵家),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金石學者), 실사구시를 추구한 실학자,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 등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이름 앞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어려서부터 명필이란 소리를 들으며 자란 추사 김정희는 왕실의 외척이면서 문벌(文閥) 가문 출신으로 정치적으로 보면 노론에 속했다.

 

추사 김정희의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이고, 증조부는 월성위 김한신으로 조선 21대 왕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순옹주가 증조모다. 정조대왕의 치적을 파괴한 정순왕후(영조의 계비)는 김노경의 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과 김한구(정순왕후 아버지)는 10촌 형제간이다.

 

 

 

 

 

 

 

 

 

 

 

 

조부는 형조판서를 지낸 김이주, 아버지는 김노경으로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난 추사 김정희는 큰아버지(양아버지) 김노영이 후사가 없자 양자가 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양어머니(큰어머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과 이종사촌 간이다.

이런 인연으로 훗날 추사 김정희가 흥선대원군에게 난초 그림을 가르키게 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서자출신의 천재학자 초정 박제가(1750~1815)의 문인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박제가는 1778년(정조 2) 북학의(北學議)를 썼다. 김정희는 실학자 박제가로부터 학문을 배우며 학문의 지평을 넓힌다.

 

1810(순조 10) 사신으로 가는 친아버지 김노경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당대의 석학 옹방강(1733~1818), 완원(1764~1849) 등을 만나고 돌아온다. 청나라 유학자에게 '경술문장 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 '해동제일통유'라는 호칭을 듣는다.

 

 

 

 

 

 

 

 

 

 

 

 

추사 김정희가 관직에 나갈 때는 안동 김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세력이 세도정치가 활개를 치고 있을 때다.

천재 문인, 천재 예술가, 대학자 추사 김정희는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암울한 시대의 중심에 있었다.

 

 

 

1819년(순조 19)에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나갔다.

규장각대교, 암행어사, 예조참의, 시강원보덕(소현세자 사부),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을 역임한다.

 

1840년(헌종 6)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서 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이때 추사체가 완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1851년(철종 2)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여가 지난 뒤 유배에서 풀려났다.

1856년(철종 7) 추사 김정희는 71세를 일기를 세상을 떠났다.

 

 

 

조선 후기 실학자 추사 김정희는 북학파 거두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의 명필, 서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성리학, 유학, 양명학, 금석학, 불교, 천문, 지리 등 학문적으로 넓고 깊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자(金石學者)로도 유명하다.

금석학(金石學)은 말 그대로 오래전 돌과 쇠 등에 쓰인 글을 판독하는 학문으로 김정희는 북한산의 비석을 판독하여 신라 진흥왕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자로서 화정국사비, 문무왕비, 무장사비 등의 비문을 발견하였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다산 정약용(1762~1836), 초의선사(1786~1866)와 함께 조선 3대 다성(茶聖)으로 불린다.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와는 근 40년 동안 교류하였다.

전라도 고창 선운사의 백파율사(1767~1852)와 선(禪) 논쟁을 벌였던 추사 김정희는 백파율사의 부도비 비문을 짓고 썼다.

 

 

 

미당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질마재 신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추사 김정희는 백파율사에게 석전(石顚), 만암(曼庵) 등의 시호를 써 주었다.

백파율사는 입적하면서 후세에 임자를 있으면 주라고 하였고, 석전은 박한영(1870~1948) 대종사, 송만암(1876~1957) 대종사에게로 갔다.

 

 

 

완당, 예당, 과파, 보담재, 담연재 등 많은 시호를 가지고 있었던 실학자 추사 김정희는 시서화(詩書畵)의 대가로 석봉 한호와 함께 조선의 최고 명필이었으며, 그의 학문과 사상, 예술, 정치 등 폭넓은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과 실력을 갖춘 대학자였다.

 

 

 

 

 

 

 

 

 

 

 

 

『철종실록』 8권, 철종 7년 10월 10일(1856년)

전 참판 김정희가 졸하였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金石文)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혹시 거리낌이 없는 바를 행했으나, 사람들이 자황(雌黃, 시문의 첨삭)하지 못하였다. 그의 중제 김명희와 더불어 훈지 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히 당세의 대가가 되었다.

 

조세(早歲, 약관)에는 영명(英名, 뛰어난 명성)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서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나라의 소식(蘇軾, 소동파)에 견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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