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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위대한 사상가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by 도생 2017. 1. 25.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위대한 사상가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牧民心書)』

 

 

 

 

 

 

 

 

 

 

 

 

 

조선 중기 권문해, 한백겸, 이수광 등은 조선 실학사상의 문을 열었다.

유형원, 이익, 안정복 등이 실학의 싹을 틔우기(맹아기萌芽期) 시작했으며,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담헌 홍대용, 다산 정약용 등에 이르러 실학이 발전되었다.

 

 

실학(實學)은 말 그대로 실용적인 학문이다.

유학이 관념, 명분, 이론 등에 치우쳤다면, 실학은 사회개혁을 실천하여 백성의 삶을 변화시키고 국가를 부흥하는 한 마디로 현실에 사용하는 학문이다. 혹자는 실학이 근대사상의 맹아(萌芽, 싹이 트기 시작), 자본주의의 맹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은 지방 수령이 지켜야 할 덕목과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목민심서(목민심서)를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조선 후기 위대한 사상가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친가와 외가 집안 모두 정치적으로 남인(南人) 계열에 속한다.

남인의 영수 고산 윤선도(1587~1671)는 다산 정약용의 6대 외조부, 공재 윤두서는 외증조부가 된다.

 

 

 

 

 

 

 

 

 

 

 

 

1762년(영조 38) 경기도 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외증조부 윤두서의 집을 드나들며 공부하였고, 화순, 예천, 진주 등 아버지 정재원의 임지를 따라다녔다.

 

 

매형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고,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 역시 천주교 신자다.

다산 정약용은 이승훈과 이벽을 통해 이가환을 만났는데, 이가환은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종손(從孫)이다.

다산 정약용이 위대한 사상가로 발돋움하는 만남이었다.

 

 

 

 

1783년(정조 7) 증광시(생원시) 합격하고 1789년(정조 13) 식년시(대과=문과) 급제하였다.

1784년(정조 8) 23세의 다산 정약용은 사돈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듣고 천주교 신앙을 한다.

 

 

정조대왕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중용(中庸)』에 관해 질문을 내렸는데, 정약용의 중용 강의를 들은 임금에게 칭찬을 받는다.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 유능한 인재로서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된 다산 정약용은 정조대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

1790년(정조 14)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업무상 실수로 충청도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대왕은 열흘 만에 풀어준다.

 

 

 

 

 

 

 

 

 

 

 

 

전라도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신주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사건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1791년(정조 15) 30세의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천주교 신앙을 그만둔다.

 

 

1792년(정조 16) 정조대왕은 다산 장약용에게 수원 화성의 축성과 설계, 공사 등에 관한 것을 작성하여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아버지 상(喪) 중임에도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었다.

 

 

 

 

수원 화성은 1794년(정조 18) 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10월에 공사를 끝내 34개월 만에 완공됐다.

정조대왕은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날씨가 좋지 않자 백성을 위해 공사를 약 6개월간 중지시켰고, 이 기간을 빼면 불과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본래 10년 예상으로 시작한 수원화성 축조공사는 유형거, 녹로, 거중기 등의 기구를 이용하여 시간을 단축했다.

홍문관수찬,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지 등의 관직을 역임한다.

 

 

 

 

 

 

 

 

 

 

 

 

정약용은 천주교 신앙을 그만두었지만, 일가친척 상당수가 천주교 신앙을 하여 주위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795년(정조 19) 최초의 외국인(중국인) 신부 주문모 입국에 형 정약전이 연루되어 정3품 동부승지에서 정6품 금정찰방으로 좌천된다.

 

 

1797년(정조 21) 황해도 곡산군수로 제수되었고, 백성과 함께 하는 훌륭한 목민관이 된다.

1799년(정조 23) 형조참의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노론 벽파의 탄핵을 받자 사직한다.

1800년(정조 24) 위대한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1801년(순조 1)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박해한다. 이른바 신유박해다.

다산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은 처형됐고, 천주교 신앙을 하지 않은 정약용과 가담 정도가 작은 둘째 형 약전은 유배된다. 다산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포항)로 유배된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산 정약용은 다시 한양 의금부로 끌려간다.

역모죄로 잡힌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 장약현의 사위다.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고, 이곳에서 『목민심서』를 쓴다.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집필했다.

 

 

 

 

 

 

 

 

 

 

 

1818년(순조 18) 18년간의 유배에서 풀려나 관직이 제수됐으나 반대세력의 공격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1836년(헌종 2) 15세에 결혼한 다산 정약용은 풍산 홍씨와 혼인 60년이 되는 회혼(回婚) 잔칫날 아침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의 부인 풍산 홍씨와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 홍국영은 먼 친척 관계가 된다.

 

 

 

조선 후기 위대한 사상가 다산 정약용은 조선왕조에서 쟁쟁한 어느 대학자 못지않게 학문적 지평이 넓고 깊었다.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맹자요의』, 『주역사전』, 『중용강의』, 『대학강의』, 『흠흠신서』, 『의례문답』, 『아언비각』, 『경세유표』, 『대한강역고』, 『마가회통』 등 500권이 넘는 많은 양을 저술했다.

 

 

 

 

 

 

 

 

 

 

 

다산 정약용의 대부분 저서는 유배지에서 쓴 것이다.

정치가로서 유배는 불행한 일이지만, 유배지에서 후학을 기르고 당대 석학과 교류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유교 경전(경학), 천문학, 지리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역사학, 의학, 과학, 예학, 문학, 언어학, 농학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위대한 사상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책을 썼다. 

 

 

 

효명세자가 위독할 때와 순조가 위독할 때 어의(御醫)가 있는 궁에서 다산 정약용을 부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산 정약용이 부름을 받고 입궐 전후(前後)에 미처 손을 써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효명세자와 순조가 세상을 떠났다. 다산 정약용이 의술 분야에서도 어의(御醫) 못지않은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910년(대한제국 순종 4) 8월 20일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26명에게 무더기로 시호가 내려졌다.

다산 정약용에게 내려진 시호는 연암 박지원과 같은 문도(文度)다.

1910년 8월 22일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으로 한일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됐고, 8월 29일(경술국치일) 공표됐다.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 서문 中

성현의 가르침에는 원래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사도(司徒)가 백성을 가르쳐 각각 수신(修身)도록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태학(太學)에서 국가(國子)를 가르쳐 각각 몸을 닦고(수신修) 백성을 다스리도록(치민治民) 하는 것이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목민(牧民)인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반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500여 권의 책 대부분을 저술했는데, 후학을 양성하고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많은 양을 저술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애민(愛民) 정신을 바탕으로 실사구시적 실학사상을 정립하고 실천한 위대한 사상가이며 진정한 조선의 선비다.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 5월 5일(1830년)

약원에서 왕세자(효명세자, 1809~1830)에게 입진하니, 시임 대신, 원임 대신과 각신이 함께 희정당에서 입대하여 자음화담탕을 올리자, 앞서 처방 가운데서 인삼을 1전 줄이게 하였다가 또 앞서의 처방 가운데에서 인삼을 1전 보태게 하여 다시 달여서 들이도록 하였으며, 전 승지 정약용, 감찰 강이문을 의약(議藥)에 동참하게 하였다.

 

 

『순조실록』 34권, 순조 34년 11월 13일(1834년)

약원에서 이르기를

"지금 탕제를 연속하여 드리는 때를 당하여 바로 중론을 널리 채택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부호군 정약용과 부사고 박제안이 의리(醫理)에 정통하여 평소에 명칭이 있으며....

청컨대 아룰러 진연(診筵)에 동참케 하소서"하니

(임금이 - 순조 1790~1834)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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