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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항일운동가 헤이그 특사(밀사) 이준열사

by 도생(道生) 2017. 1. 27.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한 항일운동가

네덜란드 만국평화회의에 헤이그 특사(밀사)로 파견된 이준(李儁) 열사(烈士)

 

 

 

 

 

 

 

 

 

 

 

 

항일운동가이며 고종황제의 특명으로 헤이그 특사(밀사)로 파견된 일성(一醒) 이준(1859~1907) 열사는 본관이 전주 이씨이지만,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의 후손이 아니다.

 

동생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위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내쫓자 고려의 신하로 남겠다고 자결한 태조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17대손이다.

 

 

 

이준 열사는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 한양에 상경하여 한동안 공부하였다.

29살에 초시에 합격하고, 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한다.

 

 

1895년 설립된 법관양성소 교육을 이수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지만, 탐관오리들의 비행을 들추다가 면직되고 만다.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돌아왔으나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개혁당에서 활동하였고, 대한보안회, 공진회, 헌정연구회(대한자강회), 국민보육회 등을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준 열사는 1904년 보광학교(前 낙연의숙)와 1905년 오성학교를 설립하였다.

평리원 검사, 특별법원검사 등을 역임하다가 법무대신 이하영에 의해 파면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본격적으로 항일운동가로 변신한다.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을 시작으로 정승을 지낸 조병세, 의정부찬정에 제수됐던 홍만식, 이상철, 깁봉학 등 여러 사람이 함께 자결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90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특명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밀사)를 파견한다.

헤이그에 밀사에게 내려진 밀명은 을사늑약이 대한제국과 일본 양국이 원만하게 합의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강압적으로 체결한 것이므로 을사늑약 자체가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대한제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 평화회의장은 일본 제국주의의 방해 공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만국 평화회의는 약소국을 잡아먹는 강대국끼리의 행사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양 제국주의 국가 일본 편을 들었다.

 

 

 

 

 

 

 

 

 

 

 

 

1907년 이준 열사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고종황제의 특명으로 만국평화회의에 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준 열사가 고종황제의 특명을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밀사)로 파견되어 순절하자,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켜 버리고, 정미7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며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킨다.

 

 

항일운동가로 헤이그에 특사(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는 1907년 7월 14일 머나먼 이국땅 병원에서 순절하였다.

일제는 이준 열사의 헤이그 특사(밀사) 사건을 빌미로 7월 19일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준 열사의 사인(死因)을 놓고 자결, 병사, 단식 등 여러 설이 분분하나 아직 사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미 고인이 된 이준 열사의 궐석재판을 열어 종신형을 선고했다.

머나먼 타국 땅에 묻혀 있던 이준 열사의 유해는 50여 년이 지난 1963년 조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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