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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여류화가 신사임당

by 도생(道生) 2017. 2. 5.

양반집 여인에서 신화가 된 여인

조선 시대 여류화가 신사임당

 

 

 

 

 

 

 

 

 

 

 

 

 

조선 시대 여류화가로 유명했다는 신사임당의 작품은 모두 전칭작(傳稱作)이라고 한다.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라는 의미다.

 

신사임당이 어떻게 대한민국 화폐 최고 고액권 주인공이 되었으며,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화가가 되었을까?

 

 

 

 

신명화(성종 7~중종 17, 1476~1522)는 슬하에 아들은 없고, 딸만 다섯을 두었으며, 신사임당은 신명화의 둘째 딸이다.

신사임당(연산군 10~명종 6, 1504~1551)의 아버지는 신명화는 41세가 되던 중종 11년(1516) 진사시(소과)에 급제하였으나 대과에 응하지 않고 진사로 남았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16년간 한양에서 주로 지냈기 때문에 강릉에 있던 신사임당과 아버지 신명화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

 

 

 

 

 

 

 

 

 

 

 

 

신사임당은 19세가 되던 1522년(중종 17) 덕수 이씨 이원수(연산군 7~명종 16, 1501~1561)와 혼례를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신명화가 죽어 삼년상 치른 후에 시집에 인사를 갔다.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는 5남 3녀를 두었으며 율곡 이이는 다섯째 자식이며 셋째 아들이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원수가 첩을 두어 가정불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조선사회에서 큰 허물은 아니다.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화가라고 칭송받는 신사임당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는 율곡 이이가 쓴 죽은 어머니의 일대기, 즉 선비행장(先비行狀)이다. 선비행장율곡전서 18권 행장편에 들어있다.

 

 

 

 

 

 

 

 

 

 

 

 

율곡 이이가 16세가 되던 1551년(명종 6)에 신사임당이 죽었고, 신사임당의 신화는 율곡 이이의 「선비행장」으로부터 비롯됐다.

율곡 이이의 「선비행장」은 짧은 글이다.

 

 

 

선비행장을 요약하면 어려서 경전에 통했고, 글과 바느질, 수놓기, 그림을 잘 그렸다.

7세에 안견의 그림을 모방했는데 절묘했다.

 

포도 그림은 누구도 흉내를 못 냈고, 세상에서 그 그림을 모사하여 병풍과 족자를 만들어 널리 퍼졌다.

온화하고, 얌전하고, 지조 있고, 조용하고, 자상하고, 겸손했고, 효성이 지극했다.

 

언제나 친정부모님을 그리워했으며, 반가의 여인으로 주변 사람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조신했고, 남편이 집안에 신경 쓰지 않아 어려운 가정을 홀로 돌보았다.

 

시댁에서는 예를 지키며 말과 행동을 조심했고, 종에게도 온화했고, 남편이 잘못하면 훈계하여 모두가 존경하고 받들며 좋아했다.

1504년 10월 29일 태어나 1522년 결혼했고, 1524년 한양에 왔으며, 이후 강릉(임영), 봉평 등지에 가 있다가 1541년 한양 시집에 들어왔다.

 

학문적으로는 영재, 예술적 재능은 출중했고, 고귀하고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로 한 마디로 완벽한 여인이라는 의미다.

율곡 이이는 신사임당의 아들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극찬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율곡 이이의 글은 후학들이 신사임당이 우상화하는데 단초가 된다.

 

 

 

 

 

 

 

 

 

한때 율곡 이이의 스승을 했다고 전해지는 서얼 출신의 어숙권(생몰연대 미상)이 쓴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여류화가로서 신사임당에 대한 글이 있다.

 

 

『패관잡기』는 어숙권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현존하는 『패관잡기』는 『대동야승』에 수록된 4권과 『시화총림』에 일부분만 기록되어 있다.

 

『대동야승』은 조선 초기부터 인조 때까지, 그리고 효종과 숙종 때의 야사와 일화 등을 기록한 것이 전해오다가 20세기 초에 출판되어 널리 알려졌다. 『시화총림』은 조선 후기 홍만종이 전해오는 시화(詩話, 시와 설화)를 모아 엮은 책이다.

 

주로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를 담은 『패관잡기』, 『대동야승』, 『시화총림』 등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붙여졌다고 볼 수 있다.

 

 

 

 

『패관잡기』는 언제 쓰였는지 모르고, 단지 어숙권이 생존 시에 세상 이야기를 담아 썼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어숙권의 조부는 어세겸(1430~1500), 아버지는 어맹렴(1459~1494)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나이 차이를 놓고 추정해보면 어숙권은 1480년 전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패관잡기』는 연산군 말에서 중종 조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00년은 연산군 6년~1544년은 중종 39년)

 

 

 

 

 

 

 

 

 

 

 

 

세상에 떠돌아다닌 이야기를 모어숙권의 패관잡기 여류화가 신사임당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는데, 혹자는 신씨가 신사임당이라고 주장한다. 신사임당의 남편 이름은 이원수(李元秀)다.

 

 

『패관잡기』 2권

근래 선비로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많다.

산수화는 별좌 김장과 사인(士) 이난수(李蘭秀)의 아내 신씨(申氏), 학생(學生) 안찬이 있고, 새와 짐승을 그림 잡화에는 종실 두성령이 있으며, 풀벌레 그림에는 정랑 채무일이 있고, 묵죽에는 현감 신잠이 있는데, 이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다.

이상좌는 사인(士人) 아무개의 종으로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중에서 산수화와 인물화는 당시에 가장 뛰어났다.

 

 

『패관잡기』 4권

지금 동양(東陽) 신씨(申氏)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포도와 산수는 한때에 절묘하여 평하는 사람들이 '안견 다음간다.'라고 하였다. 아, 어찌 부인의 필치라 해서 소홀히 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부인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책망할 것이다.

 

 

어숙권이 어린 율곡 이이(중종 32~선조 17, 1536~1584)를 잠시 가르쳤다면 신사임당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패관잡기』 2권, 4권이 내용이 상반된다.

 

『패관잡기』 2권에서는 당대 최고 산수화 화가는 이상좌라 했고, 『패관잡기』 4권에서는 신씨가 산수화는 '안견 다음간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대 최고를 의미하는 말이다. 

 

 

 

 

 

 

 

 

 

 

 

 

신사임당이 당대 예술적 재능이 높게 평가된 여류화가라는 기록은 「선비행장」과 『패관잡기』가 전부다.

신사임당의 아들과 아들의 스승이 기록한 선비행장패관잡기 당대 여류화가 신사임당의 모든 기록이다.

 

 

율곡 이이의 학문과 정치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 후대에 쓴 글들은 모두 율곡 이이의 「선비행장」에 자기 생각을 덧붙인 글에 지나지 않는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노론, 소론)이 3백 년 동안 권력을 잡고 조선을 멸망의 길로 몰고 갔다.

 

 

서인의 영수 율곡 이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난 대학자였다.

서인에서 분파된 노론 세력, 특히 송시열에 의해 신사임당이 우상화된다.

우암 송시열은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과 정치적으로 대립한 사람은 철저하게 숙청한 인물이다.

 

 

율곡 이이의 추종자들이 우상화한 신사임당은 일본 제국주의는 현모양처로 만들었고, 군사정권은 일제강점기 총독관저 자리에 있는 파란 기와집 안방 여주인으로 탈바꿈시켰다. 

 

 

 

한양 사람 이원수와 강릉에서 결혼한 신사임당은 아버지 신명화가 죽자 3년 상을 치른 후에 시어머니를 처음 보았고, 결혼하고 시댁을 몇 번 오간 뒤 시어머니가 늙어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19년 만에 시댁에 들어가 살았다.

 

 

 

 

 

 

 

 

 

 

 

 

신명화의 딸 평산 신씨가 13세, 혹은 16세에 스스로 호를 사임(師任)이라 지었다 하나 출처가 불분명하다.

설령 스스로 사임이란 호를 지었다 해도 신사임당은 10대의 철이 없는 어린아이였으니 말을 했을지라도 학자이며 정치인으로서 율곡 이이는 절대로 세상에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사임(師任)은 주나라를 건국한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만약 그 의미가 세상에 알려졌다면 그 집안은 역적으로 멸문지화를 당했을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일개 아녀자가 왕의 어머니를 본받겠다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서 모반을 꿈꾸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비행장패관잡기 기록에 신사임당의 본명과 호(號)가 나오지 않는다.

율곡 이이는 선비행장에서 '자당(慈堂)의 휘는 모(某)로 진사 신공(申公) 씨의 둘째 딸이다.'라고 하였고,

어숙권의 패관잡기는 '이난수의 아내 신씨', '신씨'로만 기록하고 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는 평산 신씨이며, 반가의 여인으로 그림을 즐겨 그린 여류화가다.

여류화가 심사임당은 아들 율곡 이이를 당대 최고의 학자로 키운 어머니이며, 39세까지 친정에서 지내다 마지막 10년을 시댁에서 지낸 편한 시집살이를 한 부인이다. 남편이 첩을 들이자 마음도 상했고, 남편이 실수할 때는 훈계도 하던 그냥 평범하게 편히 살다간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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