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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3.1만세운동 기미독립선언서

by 도생(道生) 2017. 2. 12.

1919년 3월 1일 - 3.1만세 운동과 기미 독립선언서

 

 

 

 

 

 

 

 

 

 

 

 

 

1919년 1월 20일 친일파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진다.

1919년 2월 1일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 2월 8일 일본 동경 2.8 독립선언서가 각각 발표됐다.

 

 

 

무오독립선언과 2.8 독립선언은 혈전(血戰)을 명시했지만, 3.1만세 운동은 비폭력 항일 시위를 선언했다.

3.1만세 운동은 비폭력 무저항 불복종의 평화적 시위를 벌임으로써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의지를 알리려 했다.

1919년 2월 1일 무오독립선언과 1919년 2월 8일 2.8 독립선언은 국내가 아닌 만주와 일본에서 각각 발표됐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 운동은 본래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인 1919년 3월 3일로 거사 날짜가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일제 고등계 형사로 있던 조선인 신철이 기미 독립선언서를 찍어내던 인쇄소를 급습한 사건으로 거사 일을 3월 1일로 당겼다고 한다.

 

 

 

 

 

 

 

 

 

 

 

 

3.1만세 운동은 대한제국 강제병합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에 민족지도자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암암리에 활동해 왔다.

그러던 차에 1919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고무되어 있었고, 2월 1일 무오독립선언과 2월 8일 2.8 독립선언이 연속해서 발표된다.

 

3.1만세 운동은 비폭력 만세운동을 벌임으로써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만천하에 공표하고자 기획되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자결주의는 럽 동부의 일부 민족에 국한된 것이지,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 점령하고 있는 조선(대한제국)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당시로써는 모르고 있었다.

 

 

 

 

3.1만세 운동에서 발표한 기미 독립선언서는 민족대표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육당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이다.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들은 의암 손병희의 집에 모여 3.1만세 운동의 거점으로 기미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탑골공원에 나가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3.1만세 운동이 일어나면 유혈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모임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3.1만세 운동 당일에 민족대표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여 기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다.

행사를 끝낸 민족대표들은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자진 연행되어 갔다.

 

 

 

탑골공원에서는 정재용이 기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주변에 있던 수천 명이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기미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서울 탑골공원에서도 기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요원의 불길처럼 조선 팔도로 번져간 3.1만세 운동은 비폭력 항의 시위 원칙을 지켜나갔다.

 

 

3.1만세 운동은 민족대표가 기획하였지만, 고종황제의 독살설이 급속하게 퍼지면서 망국의 설움과 잔악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 등 민족 감정이 대대적으로 폭발하면서 전국 팔도에서 불길처럼 번져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일제는 1882년 제물포조약으로 조선(대한제국)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주둔시켰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1895년 중전 민씨(명성황후) 살해 등 1919년 3.1만세 운동 전까지 한민족 수십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나라까지 빼앗은 천하의 날강도라는 것을 간과했다.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한 3.1만세 운동은 약 2개월간 지속했다.

일본 제국주의 기록에 의하면 3.1만세 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약 200여만 명, 사망자 7천 5백여 명, 구속자 4만 7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제의 총칼 아래 쓰러지고 죽어가는 동포를 본 백성들은 일본에게 비폭력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사무치게 느끼게 된다. 

 

 

 

 

 

 

 

 

 

 

 

 

3.1만세 운동 이전에도 항일 무장투쟁은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강제병합 전까지 의병 또는 대한의군(안중근 의사) 등 항일 무장투쟁이 있었고, 1911년에는 무장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가 만들어져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3.1만세 운동은 기미 독립선언서 첫머리 말처럼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천명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비폭력 평화적 시위였다.

 

3.1만세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1895년 30만 동학 농민군을 대학살 한 이래 가장 많은 한민족을 대학살 한 사건이기도 하다.

3.1만세 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은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으로 전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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