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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 2.8독립선언

by 도생(道生) 2017. 2. 11.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무오독립선언

일본 도쿄에서 발표한 2·8 독립선언

 

 

 

 

 

 

 

 

 

 

 

 

 

500여 년을 이어온 대한제국(조선)은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며 나라를 빼앗겼다.

1910년은 나라를 빼앗긴 치욕스러운 해, 즉 경술(庚戌)년의 치욕이라 하여 경술국치(庚戌國恥)라고 부른다.

 

 

경술국치 이전에도 항일운동이 있었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나서는 일제의 강점에 해방을 위한 항일운동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됐다.

 

 

1919년 2월 1일 만주 길림성에서는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되고,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이 발표된다.

 

 

1919년 1월 21일(음력 1918년 12월 20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며 조선 27대 임금인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는 누군가, 특히 친일파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민심은 흉흉해지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하게 된다.

 

 

 

 

 

 

 

 

 

 

 

 

 

고종황제가 갑작스럽게 승하한 지 10여 일이 지난 1919년 2월 1일(음력 1919년 1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이 발표된다. 바로 무오독립선언으로 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하면서 조국에 남아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도 있었지만,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무오독립선언은 만주, 러시아,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 독립운동가가 중심의 독립선언이다.

 

 

당시는 지금같이 교통과 연락이 원활하지 못했던 때라 만주, 러시아, 미국 등지에 흩어져 있던 39명이 서명한 것을 보면 고종황제 승하 이전부터 이미 대한독립선언서 발표가 논의되고 있었을 것이다.

만주 이외의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연락을 통해 대한독립선언서 작성 취지와 서명에 동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세계정세는 1914년 시작한 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끝났다.

1919년 1월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고 나섰다.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는 약소국의 처지에서 보면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지만, 정작 민족자결주의 14개 조항은 유럽 강대국에 점령당했던 발칸반도와 동유럽 약소민족이 대상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 미국은 필리핀을 강제 점령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1945년까지, 미국은 1934년까지 대한제국과 필리핀을 각각 강제 점령하게 된다.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는 한반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강대국의 이권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강대국에 점령당한 약소국의 독립을 전제로 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강대국 영국이 정적 오스만제국을 해체하는 데 이용된다.

 

 

 

 

 

 

 

 

 

 

 

 

 

1919년 2월 1일(음력 1월 1일) 중국 동북부의 길림성에서 조소앙, 박은식, 김좌진, 김교헌, 김규식, 이상룡, 여준, 이동녕, 김동삼, 류동열, 이승만, 이시영, 신채호, 안창호, 허혁 등 39명이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최초로 선언했다.

 

 

무오독립선언은 독립운동가 39인이 우리나라 최초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로 39인 중 단 한 사람도 변절자가 없었다.

반면 기미독립선언서를 발표한 3.1만세 운동과 일본 도쿄에서 발표한 2.8 독립선언의 일부 인사는 친일파로 변절했다.

 

 

무오독립선언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는 기미(己未)년인 1919년 2월 1일(음력 1월 1일) 발표됐지만, 무오년(1918)에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고 해서 무오독립선언이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무오독립선언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는 2.8 독립선언과 3.1 독립선언의 기폭제가 되었다.

양력 1919년 2월 1일(음력 1919년 1월 1일)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됐고, 7일 후인 2월 8일에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주도하여 독립선언을 한다.

 

 

 

일본에 있던 재일유학생들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1일 만주에서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되고, 만주 독립운동가와 연락을 취하고 있던 유학생들이 뜻을 같이하여 1919년 2월 8일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약 500명 전후의 인원이 모여 조선청년독립당 이름으로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무오독립선언과 2.8독립선언은 모두 일제 강점은 불법이며 대한이 자주독립국임을 만방에 선언했다.

무오독립선언은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했지만, 2.8 독립선언은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 혈전(血戰)을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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