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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역적 홍길동 실존인물

by 일신우일신 도생 2017. 2. 4.

 

역적(逆賊)이 아닌 도적(盜賊, 강도)의 괴수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 

 

 

 

 

 

 

 

 

 

 

 

 

 

조선왕조시대 태평성대를 누리던 때도 작은 도둑은 있었다.

더욱이 혼란했던 시대에는 도둑이 떼로 출몰했고, 대규모로 조직화하여 활동했다.

 

조선왕조는 우리가 사는 지금처럼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국가기관과 사회 지도층이란 자들이 합법을 빙자하여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불법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도적들이 활개 치는 현실과 굳이 비교하자면 조선을 멸망으로 몰고 간 조선 후기 외척세력의 삼정의 문란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의금부(義禁府)는 건국 초기 왕권 확립 등을 위한 부서였으나, 왕권이 안정되면서 임금의 명으로 특정 사건을 수사하는 조선 최고의 사법기관으로, 때론 임금의 특명을 받아 실정 파악 등을 하던 곳이다.

 

의금부반란을 꾀한 역적을 비롯하여 조선의 건국 이념으로서 유교의 윤리, 즉 천륜과 인륜을 파괴한 강상죄, 외교 문제 등 중죄인을 심문하는 관청이다.

 

 

 

 

 

 

 

 

 

 

 

 

홍길동은 역적이 아니고 연산군 시대에 실존했던 인물이며 도적(강도)의 우두머리였다.

일개 도둑의 괴수 홍길동은 임금과 나라를 배신하고 반역한 역적 등을 잡는 의금부에 감금당했다.

 

홍길동이 도적질을 할 당시 당상관(정 3품)의 의장(복식)을 하고 관청을 드나들었기 때문에 역적 등 중죄인을 심문하는 의금부에서 추국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 시대 실존했던 인물 충청도 도적 홍길동은 정3품 첨지충추부사 복식을 입었다.

홍길동은 임금이 내리는 벼슬과 복식으로 변장하고 임금의 명으로 지방을 다스리는 관청을 습격했다.

 

 

임금이나 죄를 추국하는 위관에 따 홍길동은 일개 도적의 우두머리에서 역적이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연산군과 추관 장순손은 홍길동을 역적이 아닌 도적으로 강상죄를 물은 것으로 나온다. 

강상죄는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붕우 간의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도와 윤리를 어긴 죄를 말한다.

 

 

 

 

 

 

 

 

 

 

 

 

광해군 시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쓴 교산 허균(1569~1618)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택당집(澤堂集)』에서 교산 허균의 『홍길동전』은 연산군 때 실존했던 인물 홍길동(洪吉同)을 자신의 소설 주인공 홍길동(洪吉童)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은 세종 시대를 배경으로 다른 시대의 인물과 환경을 종합해 만든 소설이다.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역적 홍길동(洪吉)과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홍길동(洪吉)은 한자(漢字) 차이가 있다. 

홍길동은 조선왕조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에 여러 번 등장한다.

나라의 기록인 정사(正史)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나오는 홍길동(洪吉同)은 실존 인물이다.

 

 

 

 

개인이 저술한 기록인 야사(野史)에 홍길동(洪吉同)과 홍길동(洪吉童)이 나온다. 

이식(1584~1647)이 저술하고 우암 송시열(1607~1689)이 편집하여 완성한 택당집』 별집 15권 「산록(澤堂集)에는 홍길동(洪吉同)으로 나온다. 

 

이원명(1807~1887)의 동양휘집(東野彙輯), 19세기 중엽에 편찬된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靑丘野談), 홍만종(1643~1725)의 해동이적(海東異蹟), 이희준(1775~1842) 계서야담(溪西野談) 등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홍길동(洪吉童)이다.

 

 

 

 

 

 

 

 

 

 

 

 

혹자는 실존인물 홍길동이 조선 초기 절도사를 지낸 홍상직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홍상직의 아들 얼자 홍길동(洪吉同)은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호조참판 지낸 홍일동(1412~1464)의 이복동생이 된다.

홍일동은 남양 홍씨 족보를 최초로 정리한 사람이다.

 

 

홍길동이 의금부를 탈출하여 일본 오키나와에 정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키나와 야에야마 박물관에 소장된 홍길동의 처남 장전대주(長田大主) 가문 족보에는 홍길동이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세종 25(1443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실존했던 인물 도적 홍길동이 잡힌 해가 연산군 6년, 서력으로 1500년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0년(1428)에 절제사 홍상직의 아내 문씨가 남편의 상제(喪制)를 마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실록』과 일본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1428년 이전에 죽은 홍상직이 1443년에 태어난 홍길동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연산군일기』에 충청도에서 활동한 도적 홍길동을 잡았다는 기록은 있고, 이후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기록이 없다.

『중종실록』에 홍길동이 연산군 때 충청도 지역에서 도적질한 영향이 중종 때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홍길동이 큰 도둑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조정의 당상관도 연류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이 상당했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9권, 연산군 6(1500년) 10월 22일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우극균이 아뢰기를

"듣건대, 강도 홍길동(洪吉同)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해독을 제거하는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청컨대 이 시기에 그 무리를 다 잡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쫓았다.

 

 

 

『연산군일기』 39권, 연산군 6년 11월 28일

(임금이) 전교하기를

"홍길동의 초사(招辭)를 보건대, 엄귀손은 비단 홍길동의 와주(窩主)일 뿐 아니라 바로 같은 무리이다.

이같은 행동이 있는데도 어떻게 벼슬이 당상(정 3품)에까지 올라간 것인가. 그 정승들을 불러 이 초사를 보아라." 하매

 

영의정 한치형, 좌의정 성준, 우의정 이극균이 아뢰기를

"엄귀손이 당상이 된 것은 군공(軍功)이 있은 까닭이고 조행(조행)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 그 행동이 이러하였으니 신 등이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39권, 연산군 6년 12월 21일

엄귀손이 옥중에서 죽었다.

 

 

 

연산군일기 39권, 연산군 6(1500년) 12월 29일

의금부 위관 한치형이 아뢰기를

"강도 홍길동(洪吉同)이 옥정자와 홍대 차림으로 첨지(僉知)라 자칭하며 대낮에 떼를 지어 무기를 가지고 관부(官府)에 드나들면서 기탄없는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그 권농(勸農)이나 이정(里正)들과 유향소(留鄕所)의 품관(品官)들이 어찌 이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 체포하여 고발하지 아니하였으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을 모두 변방으로 옮기는 것이 어떠하오리까."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알았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 18권, 중종 8(1513년) 8월 29일

호조가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이 잇따라 양전(量田, 전지田地를 측량)하는 기한이 이미 지났는데도 하지 않은지 오래입니다. 대저 양전하는 일은 1~2년 동안에 해낼 수는 없습니다.

 

경기도는 인가를 철거한 뒤로 호주도 없고 상속할 사람도 없는 집이 매우 많고, 충청도는 홍길동(洪吉同)이 도둑질한 뒤로 백성이 일정한 거처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또한 회복되지 못하여 양전을 오래도록 하지 않았으므로 세금을 거두기가 실로 어려우니, 금년에는 먼저 이 두 도의 전지(田地)를 측량하소서."

 

 

 

 

중종실록 70권, 중종 25(1530년) 12월 28일

.... 상(임금)이 이르기를

"보통 때에는 도둑들을 조옥에서 추문한 일이 없었다. 다만 지금 경기 감사 남세준의 말을 들으니 '이 도둑은 삼도(三道)로 나누어 노략질할 설계를 했다.'고 하였고, 도둑의 우두머리 순석의 초사에도 이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심상한 도둑이 아닌 듯하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형조는 다른 공사(公事)가 매우 많이 있어서 오로지 이 도둑만 다스릴 수가 없다. 옛날 홍길동(洪吉同)의 유(類)를 금부에서 추문한 전례가 이미 있으므로 이제 전례를 참작하여 한 것이다."하였다....

 

영사 장순손이 아뢰었다.

"신이 추관(推官)이 되었으니 마땅히 동료와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어야 할 일입니다.

이 도둑들은 모름지기 분리해 가둬 놓고 추문함이 좋겠습니다. 60여 명을 한 곳에 가두어 말이 서로 통하게 함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홍길동(洪吉同)의 유들은 신이 찰리사(察理使)로서 추국했는데, 홍길동이란 자가 당상의 의장(儀章)을 했기 때문에 수령도 그를 존대하여 그의 세력이 거침없이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홍길동이란 자를 조옥(의금부)에서 추국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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