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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초정 박제가 북학의

by 도생(道生) 2017. 1. 23.

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정조대왕(1752~1800, 재위 1776~1800)은 개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실학파를 대거 등용했다.

채재공, 정약용, 이가환 등의 남인(南人)과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홍대용 등의 북학파는 대다수가 개혁과 실용을 중시하는 실학자들이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노론(서인)계열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며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등과 교류하였다.

 

 

 

1780년(정조 4)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1711~1799, 재위 1735~1796)의 칠순(고희)을 맞아 조선에서 축하 사신단을 파견한다.

정조대왕은 1780년(정조 4) 3월 20일에 박명원을 진하 겸 사은정사(進賀兼謝恩正使)로 임명하였다.

 

박명원은 영조대왕과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화평옹주의 남편이다.

화평옹주는 사도세자의 친누나로 사적으로 박명원은 정조의 고모부가 된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삼종형(8촌) 박명원(1725~1790)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사신의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간다.

44살의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황제 건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축하 사절공식 사절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는 자유로웠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연암 박지원이 약 5개월간 청나라, 특히 열하(熱河승덕承德)를 방문하고 돌아와 저술한 책이다.

연암 박지원은 한양에서 열하까지 약 3천 리, 왕복 6천 리의 대장정 길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열하일기란 제목으로 3년에 걸쳐 26권 10책으로 만들었다. 열하는 건륭제가 휴가를 즐기던 곳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니다.

박지원에게 청나라는 미지의 신세계였다. 그래서 궁금한 것은 묻고, 새로운 것은 관찰하면서 빠지지 않고 기록했다.

연암은 하다못해 깨진 기와 조각과 말린 똥까지도 허투루 보지 않았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청나라의 선진 문명, 정치, 학문, 의학, 제도, 경제, 종교, 예술, 천문, 인물, 생활 등 청나라에 대한 모든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어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연암 박지원은 50세가 되던 1776년(정조 10) 음서제로 조정에 출사한다.

선공감 감역, 평시서와 사복시 주부, 금부도사, 사헌부감찰, 한성부판관, 안의현감, 면천군수, 양양군수 등을 역임했다.

1800년 정조대왕이 승하하면서 연암 박지원도 15년의 관직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연암 박지원의 과농소초, 안설, 한민명전의, 열하일기그의 저서에는 실사구시의 학문, 현실주의적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실용주의 북학사상의 선구자 연암 박지원은 1805년(순조 5)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열하일기는 기존의 문체를 벗어난 연암 박지원만의 독특한 감각으로 쓴 글이라 계층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고,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정조대왕도 박지원의 문체를 지적하기도 했지만, 탁월한 그의 문장력을 인정다. 

 

 

 

 

 

 

 

 

 

 

 

 

초정 박제가(1750~1815)는 서자출신이지만, 천재였다. 박제가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문인이다.

유득공, 이덕무, 백동수, 이서구, 홍대용 등과 교류하면서 지냈다.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는 북학파라 말하는데, 북학파는 북학의에서 비롯됐다.

북학의(北學議) 북쪽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논의다. 이는 곧 조선을 부국강병의 국가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스승이기도 한 박제가는 개혁군주 정조대왕을 보필하면서 시대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진보적 실학자였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는 1778년(정조 2) 채제공이 청나라에 사은사로 떠날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와서 쓴 글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직접 보고 온 박제가는 북학의를 통해 백성의 삶을 향상하고, 부국강병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의 개혁을 제시한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백성의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하자는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가장 정밀하게 담아 놓은 책으로 평가된다.

초정 박제가가 저술한 북학의는 농업, 상업, 공업 등 여러 분야의 실용적인 개혁을 제안한 내용이다.

박제가의 중국어 공용론 주장은 논란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정조대왕은 1799년(정조 3) 서자 출신이지만 유능한 인재 박제가, 유득공, 서리수, 이덕무규장각 검사관직에 특채했다. 

박제가는 청나라를 4차례 다녀왔다. 정조대왕은 특명으로 박제가를 정3품 군기시정에 임명하였다.

 

 

1800년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1801년 청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흉서사건에 연루자로 몰려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4년 후 풀려났다. 초정 박제가의 사망 연도는 1805년설과 1815년설이 있다.

 

 

 

박제가는 북학의를 비롯하여 정유집, 명농초고, 정유시고 등이 있으며, 많은 글과 그림을 남겼다.

청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진 건연집(巾衍集)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가 공동으로 만든 시집이다.

정조대왕의 친위부대 장용영 장교이며, 출중한 무예 실력자 백동수와 이덕무, 박제가는 정조대왕의 명으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만들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추정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이용(利用)과 후생(厚生)과 정덕(正德)의 조화를 말했다. 

 

이용, 후생, 정덕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나온다.

"덕유선정 정재양민(德惟善政 政在養民 .... 정덕이용 후생유화(正德利用 厚生惟和)"

'군주가 덕(德)을 바탕으로 선정(善政)으로 양육하면... 덕을 바로잡고 생활에 유용한 것들을 이용하면 백성의 삶이 넉넉하게 된다.'

 

유교가 후대에 오면서 윤리적 도덕적인 정덕(正德)에 치우친다.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는 도덕적 명분보다 실용성을 바탕으로 실사구시적인 학문을 강조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는 모두 청나라를 다녀와서 집필다.

두 사람이 본 청나라는 조선보다 앞선 선진문명국가였고, 그들의 문명을 발판으로 조선과 백성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려 했다.

 

청나라 문물의 수입, 상업과 공업의 활성화 방안 등 국부창출을 주장한 박제가의 북학의는 현대 경제학의 바이블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보다 2년 앞선 1778년(정조 18)에 간행됐다. 

 

 

 

 

조선왕조에서 편찬된 실록에는 연암 박지원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편찬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에 3번 등장한다.

초정 박제가는 『정조실록』과 『순조실록』에 12번 나온다.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4월 29일(1790년)

....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에게 명하여 장용영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자세히 상고하여 편찬하게 하는 동시에, 주해를 붙이고 모든 잘잘못에 대해서도 논단을 붙이게 했다.

이어 장용영 초관 백동수에게 명하여 기예를 살펴 시험해 본 뒤에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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