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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문벌가문 서포 김만중 구운몽 사씨남정기

by 도생 2017. 1. 22.

 

숙종의 정비(正妃) 인경왕후의 숙부이며 최고 문벌(文閥) 가문의 후예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쓴 서포 김만중

 

 

 

 

 

 

 

 

 

 

 

 

 

조선왕조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한 교산 허균(1569~1618)에 이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저술한 서포 김만중을 한글소설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서포 김만중(1637~1692)은 문벌(文閥) 가문의 후손으로 정치적으로 서인(西人)에 속했다.

아버지 김익겸(1614~1636)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청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자결하였다.

어머니 해평 윤씨는 21살 젊은 나이에 청상이 되었고, 서포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서포 김만중의 증조부는 서인(西人)의 영수로 문묘에 배향된 동방(동국) 18현 중 한 사람인 문원공 사계 김장생(1548~1631)이다.

조부는 허주 김반(1580~1640) 참판을 지냈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신독재 김집(1574~1656)은 김만중의 조부 김반의 형이다.

서포 김만중의 친형 김만기(1633~1687)은 숙종의 정비(正) 인경왕후(1661~1680)의 아버지다.

 

 

5대 외조부 오음 윤두수(1533~1601)는 서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고, 외고조부 치천 윤방(1563~1640) 역시 영의정을 지냈다.

외증조부 연초재 윤신지(1582~1657)는 14대 왕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혜옹주와 가례를 올리고 해숭위(海崇尉)에 봉해졌다. 외조부 윤지(1600~1644)는 참판과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한글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은 친가와 외가 모두 쟁쟁한 문벌(文閥) 가문이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는 서포 김만중은 친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헌신적인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서포 김만중은 14세가 되던 1650년(효종 1) 진사 초시, 1652년(효종 3) 증광시(진사), 1665년(현종 6) 정시 갑과에 급제하였다. 

 

 

 

 

서인의 적자였던 서포 김만중은 1674년(현종 15) 효종의 정비 인선왕후 승하로 말미암은 복상 문제(2차 예송논쟁)가 일어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남인의 주장을 들어주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대거 유배되거나 삭탈관직 된다.

이때 서포 김만중도 관직을 삭탈 당한다.

 

1670년(숙종 5) 김만중은 예조참의 관직을 제수받는다.

1680년(숙종 6) 남인의 영수 허적과 영의정 윤휴가 이른바 경신환국(경신대척출)으로 대거 숙청되며 정국의 주도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바뀌게 된다.

 

 

 

대사간, 승지, 대사성, 홍문관제학, 대사헌,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판, 도승지, 공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판의금부사,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1687년(숙종 13) 장희빈의 어머니와 우의정 조사석의 관계를 의심하는듯한 말을 하면서 숙종의 분노를 사면서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되었고, 다음 해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1688년(숙종 14)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다시 탄핵을 받고 경상도 남해에 위리안치되었다.

서포 김만중이 남해에 유배되었을 당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위리안치된 상태의 김만중은 어머니의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1692년(숙종 18) 서포 김만중은 56세의 아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은 노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을 때 편찬됐고,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소론의 생각이 반영되어 편찬됐다.

두 실록에서 서포 김만중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반면, 서포 김만중이 학식이 뛰어나고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형 김만기와 우애가 돈독했다는 점은 두 실록에서 공통으로 말하고 있다.

 

 

 

 

『구운몽』은 효성이 지극한 서포 김만중이 어머니를 위해 지은 한글 소설이다.

유교, 즉 성리학적 이념을 철저히 신봉했던 조선사회에서 서포 김만중의구운몽』은 유가, 불가, 도가의 사상을 아우르고 있다.

유불선 삼도(三道)를 넘나드는 김만중의 『구운몽』은 유교의 이념을 부정한 것은 아니고,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이념의 틀 위에서 쓴 것이다.  

 

 

 

 

『사씨남정기』는 첩의 음모로 정실부인이 쫓겨나는 소설 내용이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과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혹자는 『사씨남정기』가 정치적 소설이 아닌 권선징악, 사필귀정의 교훈을 담은 소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 한글 소설을 집필한 서포 김만중은 최고의 문벌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말년은 불행했다.

예학의 거두 김장생의 손자로 성리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서포 김만중은 대표적 소설 『구운몽』에서는 유교의 틀에 넘어 불가와 도가 사상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서포 김만중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비롯하여 『서포집』, 『고시선』, 『서포만필』 등을 저술했다.

 

 

 

 

 

 

 

 

 

 

 

 

 

숙종실록 24권, 숙종 18년 4월 30일(1692년)

김만중의 졸기

전 판서 김만중이 남해의 적소에서 졸했는데, 나이는 56세였다.

김만중의 자는 중숙이고 김만기의 아우다. 사람됨이 청렴하게 행동하고 마음이 온화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매우 돈독 했다.

벼슬을 하면서 언론이 강직하여 선이 위축되고 악이 신장하게 될 때마다 더욱 정직이 드러나 청렴함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벼슬이 높은 품계에 이르렀지만 가난하고 검소함이 유생과 같았다....

 

글솜씨가 기발하고 시는 더욱 고아하여 근세의 조잡한 어구를 쓰지 않았으며, 또한 재주를 감추고 나타내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천품이 도에 가까우면서도 학문에 공력을 들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적소에 있으면서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만나 분상(奔喪)할 수 없으므로, 애통해하며 울부짖다가 병이 되어 졸하게 되었으므로, 한때 슬퍼하며 상심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숙종실록보궐정오 24권, 숙종 18년 4월 30일(1692년)

김만중의 졸기

.... 그러나 식견이 없어 폐부(요직)에 있을 적에 지론이 지극히 준엄했고, 훈척에게 붙어 청의를 매우 힘써 공격했으며, 이사명의 종용을 받아 그가 도리어 어긋나게 속이는 말을 가지고 경솔하게 계문하여 사류들에게 화를 끼치려는 계획을 하다가, 부자가 형벌을 받았다....

 

2대(代)를 지나서는 또한 흉악한 역적이 생겨나 온 가문이 살륙 당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김만중의 험악하게 편당하던 의논이 앙갚음을 받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4월 10일(1694년)

임금이 전 판서 김만중의 관작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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