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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증산도 도전 3편 도문과 성도(보천교 증산교 증산도)

by 도생(道生) 2017. 11. 10.

상제님과 태모님의 무극대도(無極大道) 도문(道門)에 들어와 불멸의 공덕을 쌓은 성도(聖徒)들

증산도 도전道典 - 3편 도문(道門)과 성도(聖徒)

- 제1변 도운(道運) 보천교와 제2변 도운(道運) 증산교와 제3변 도운(道運) 증산도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이 열린 이래로 우주가 생장염장(生長斂長)의 자연 질서를 바탕으로 하여 우주와 인류 문명과 인간이 우주의 봄과 여름철에 태어나 분열과 성장의 시기를 지나 바야흐로 우주 가을의 성숙의 길로 접어 우주의 가을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우주의 가을철을 맞아 우주의 통치자이신 증산상제님께서 인간으로 강세하셨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도문(道門)을 열러 하늘과 땅을 개조(改造)하는 천지공사를 보셨습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파천황 적인 가을개벽 대변혁의 위기상황에서 지상의 인간과 천상의 신명(神明)을 구원하시는 새 역사의 설계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보시고 1909년 천상 보좌로 환궁하셨습니다. 

 

 

 

 

 

 

 

 

 

증산상제님의 인류구원 프로젝트 천지공사는 지구촌 정치판이 돌아가는 세운(世運)과 상제님 진리, 즉 증산도가 나아가는 도운(道運)으로 나뉩니다.

 

 

세운은 증산 상제님께서 보신 천지공사 그대로 돌아가고, 도운(道運)은 상제님을 신앙하는 도생(道生)들이 진리 공부를 하면서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 처결하신 천명(天命)을 완수합니다.

 

 

"선천에는 모사(謨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 하였으나

이제는 모사(謨事)는 재천이요 성사(成事)는 재인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5:4~5)

 

 

 

 

 

 

 

 

증산상제님 천지공사의 도운(道運)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제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모여 진리 공부와 포교를 위해 결집한 도문(道門)이 만들어집니다.

 

 

도문(道門)이란 쉽게 증산상제님을 신앙하는 곳입니다. 

 

증산상제님께서는 양(陽)의 세상인 선천의 구천(九天)으로 벌어졌던 우주를 문 닫고, 우주의 가을을 맞아 음(음)의 세상인 후천 십천(十天) 세상을 활짝 열어 놓으신 십천(十天) 무극상제(無極上帝)님이십니다.

 

 

무극상제님의 진리를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하며, 인간으로 오신 증산상제님의 호(號)를 붙이면 증산(甑山)의 도(道)입니다.

다시 말해서 증산상제님을 신앙하는 도문(道門)을 철학적인 언어로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하며, 진리적인 언어로 증산상제님의 도(道)를 증산도(甑山道)라고 합니다.

 

 

 

 

 

 

 

 

성도(聖徒)는 아버지 하나님이신 증산상제님과 어머니 하나님이신 태모고수부님을 직접 모시고 신앙하던 사람들, 즉 종도(從徒)들을 말합니다.

 

 

'상제님께서 어천(御天)하시는 그날까지 후천 천지대개벽 공사에 지대한 공덕을 쌓았나니

그 노고를 높이 받들고 그 뜻을 천추만대에 기리기 위해 천지공사에 수종한 종도(從徒)를 성도(聖徒)라 추존(推尊)하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3:2:3~4)

 

 

 

 

 

 

 

 

증산상제님과 태모 고수부님의 무극대도 도문에 들어와 불멸의 공덕을 쌓은 성도들

증산도 『도전道典』 - 3편 도문(道門)과 성도(聖徒)

- 제1변 도운 보천교(普天敎)와 제2변 도운 증산교와 제3변 도운 증산도(甑山道)

 

 

아버지 하나님이신 증산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시고 천상 보좌로 어천(御天)하신 다음 상제님의 종통을 전수받으신 어머니 하나님이신 태모 고수부님께서 1911년 무극대도의 도문을 처음 여셨습니다.

 

혹자는 일제강점기 차천자(車天子)로 불리며 상제님을 신앙하던 차경석 성도가 상제님 도문을 처음 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상제님으로부터 제1변 도운의 천지공사 사명을 받은 차경석 성도는 태모 고수부님을 배척하고 도권(道權)을 잡았을 뿐이고, 보천교라는 이름으로 조선총독부에 등록하는 등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 그대로 역할을 다했을 뿐입니다.  

 

"배짱이 그만하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하리니 뒷날 두고 보라.

(차)경석이 금전도 무수히 소비할 것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갑오년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니라.

경석에게 밥주걱을 맡겼나니 경석은 제왕(帝王)만큼 먹고 지내리라.

이렇게 풀어놓아야 후천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증산도 도전道典 5:205:12~15)

(구한말 동학 신도는 300만 명 정도였으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군은 60만 명이 일어나 30만 명이 무참하게 죽었다.)

 

 

 

 

 

 

 

 

본래 차경석 성도가 '보화교(普化敎)'라는 이름으로 등록하라고 했지만, 보천교 간부였던 이상호 임의로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敎名)으로 등록했습니다. 

 

 

증산상제님의 진리 정신으로 볼 때 이상호가 등록한 보천교보다는 차경석 성도가 본지은 보화교가 진리와 부합합니다.

 

 

 

보천교에서 간부로 있던 이상호와 동생 이성영(이정립)은 보천교에서 온갖 비리를 저지르다가 보천교를 탈퇴하여 김제 금산사 앞 용화동에서 독자적으로 단체를 만들게 되는데 바로 후일의 제2변 도운의 증산교입니다.

 

이상호, 이성영(이정립) 형제 역시 차경석 성도와 마찬가지로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 내용을 모른 채 크게 해원(解寃) 하는 과정에서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 설계도 그대로 제2변 도운 증산교를 준비하게 됩니다. 

 

 

 

 

 

 

 

 

어머니 하나님이신 태모 고수부님께서는 증산상제님의 천지공사 그대로 제1변 도운 당시 대흥리 보천교, 김제 조종골, 김제 용화동(이상호의 증산교)의 3곳의 살림 도수(度數)를 맡으셨습니다.

 

"내가 없으면 그 크나큰 세 살림을 어떻게 홀로 맡아 처리하리오"

(증산도 도전道典 6:82:4)

 

 

 

증산상제님과 태모 고수부님께서는 상생의 후천 가을우주를 여시기 위해 먼저 선천 5만 년 동안 맺히고 쌓인 원한을 푸는 해원(解寃)의 천지공사를 보셨습니다.

 

"단주 해원을 첫머리로 하여 천지대세를 해원(解寃)의 노정으로 나아가게 하노라."

(증산도 도전道典 2:24:9)

 

 

 

상제님과 태모님께서는 증산도 도문 개척의 역사를 대자연의 섭리 그대로 생장성(生長成)의 삼변성도(三變成道), 삼천성도(三遷成道)의 원리로 천지공사를 보셨습니다.

 

"내 일은 삼변성도(三變成度)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356:4)

 

"삼천(三遷)이라야 내 일이 이루어지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6:84:8)

 

 

 

제1년 도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차경석 성도의 보천교 600만 명과 이상호 이성영(이정립) 형제의 용화동(증산교) 역시 해원의 과정일 뿐입니다.

 

 "(이)상호, 저 도둑놈, 역적놈!, 저놈이 내 일을 망쳐 놓는다."

(증산도 도전道典 11:323:1)

 

 

 

 

 

 

 

 

일제강점기 600만 명 이상이 상제님을 신앙하던 제1변 도운은 차경석 성도의 죽음과 조선총독부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으로 제1년 도운은 천지공사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도문(道門)의 문을 닫게 됩니다.

 

 

증산상제님의 제2변 도운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김제 용화동으로 가십니다.

 

늙고 병들었던 이상호, 이성영(이정립)이 있던 용화동에서 제2변 도운을 개창하여 수십만 명의 신도를 만들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여파로 안운산 태상종도사님은 대휴계기(大休契期)를 선포하시고, 20년 동안 은둔하십니다.

 

"내가 이제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귀양 감이라.

20일 만에 돌아오리니 너희들은 지방을 잘 지키라."

(증산도 도전道典 6:22:2~3)

 

 

 

 

 

 

 

 

증산상제님께서 천지공사로 처결하신 20년 대휴계기 공사가 끝난 1974년(양력 1975년) 안운산 태상종도사님께서는 안경전 종도사님과 함께 증산상제님과 태모 고수부님의 무극대도의 도문, 즉 제3변 도운 증산도를 태전(太田, 대전)에서 여시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일후에 사람이 나면 용봉기(龍鳳旗)를 꽂아 놓고 잘 맞이해야 하느니라,

용봉기를 꼭 꽂아 두라.

용화동은 동요동(東堯洞)이요, 건곤(乾坤)의 사당(祠堂) 자리니 미륵이 다시 서니라.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나니 법은 서울로부터 내려오는 것 아니더냐.

앞으로 태전(太田, 대전)이 서울이 되느니라.

사람 욕심내지 마라, 올바른 줄 하나 치켜들면 다 오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1:365:3~7)

 

"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太田, 대전)에 꽂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136:2)

 

"이곳이 제왕지지(帝王之地)니라!

여기서 왕이 나온다!

장차 여기에서 전무지후무지법(前無知後無知法)이 나오리라.

태전을 집을 삼고 인신합덕(人神合德)을 하리니 태전이 새 서울이 된다."

(증산도 도전道典 5:306:2~3)

 

 

 

제1년 도운 보천교와 제2변 도운 증산교는 생장(生長)의 과도기적 도운의 과정이었고, 증산상제님의 무극대도 제3변 도운의 증산도는 상제님 진리의 진면목을 만천하에 드러낸 완성된 진리, 열매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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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안경전 종도사님 말씀 中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수십만 명이 무참하게 죽었다.

동학혁명 때 그렇게 죽은 동학군 신명들이 천지에 나부껴서 상제님은 그 신명을 먼저 해원(解寃) 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동학군은 모두 상제님을 찾다가 죽은 것이다.

 

상제님을 모시던 차경석 성도가 동학 총대(總代)였는데, 그의 아버지 차치구도 정읍에서 5천 명 동학군을 거느린 동학 접주였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차경석 성도에게 동학 신명(神明) 해원 도수(度數)를 붙이시어서 한번 대세를 크게 굽이치게 하셨는데, 일제강점기 상제님을 신앙하던 신도가 7백만 명에 육박했다.

 

 

 

 

태모님께서 1935년 을해년에 천상으로 선화(仙化) 하시고, 1936년 병자년 음력 3월 10일에 차경석 성도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다음해인 1937년 정축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을해, 병자, 정축, 이런 건 육십갑자로 정확하게 외워야 한다.

 

그 뒤 1945년 을유 해방 후 태상종도사님께서 금산사 아래 용화동에서 제2변 도운을 일으키셨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게 다 부서졌다.

 

그 후 "갑을(甲乙)로 기두한다."라는 상제님 말씀과 같이 1974년, 75년 갑인, 을묘년에 제3변 도운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면 이제 마무리가 어떻게 되는가?

이번에 판이 마무리되면 옛날의 도세(道勢)를 만회한다. 이것이 판몰이 도수다.

 

 "진주(眞主) 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어 남의 돈은 따 보지 못하고 제 돈만 잃어 바닥이 난 뒤에 개평을 뜯어 새벽녘에 회복하는 수가 있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226:8)

 

 

 

 

태상종도사님께서 이 독조사 도수를 맡으셔서 다 잃어버리셨다.

 

과거에 포교했던 사람들은 옛날 제2변 도운 때 용화동 증산교의 이상호, 이성영(이정립) 형제가 다 차지하고, 또 녹도 상제님 사업에 다 투자하시고 맨주먹으로 대전(태전)으로 나오셨다. 그렇게 해서 대전에서 20년을 사셨다.

 

그게 상제님 천지공사의 말도(末島) 20년 귀양살이 도수다.

그 20년 기간은 제3변 도운 증산도를 준비하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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