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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을주수행(신神의세계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6)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성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by 도생(道生) 2014. 11. 9.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6)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성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올바른 믿음은 '나는 부처이다'라는 '조신'의 절대적 믿음이다.

'조신'의 절대적 믿음의 기준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 즉 '불퇴전의 믿음'에 있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닦음의 특성은 믿음과 함께 한다는 데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즉 참된 믿음의 특성은 언제나 닦음과 함께 한다는 데 있다.  

 

 

이처럼 믿음과 닦음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닦음의 기준은 결국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벽처럼 모든 것을 주객일체로 보는 '일심'의 경지에 머무는 '불퇴전의 믿음'에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깨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임제종의 간화선의 전통에 따르면 올바른 깨침은 어떤 경우에도 한결같은 경지를 깨침의 기준으로 내세운다.

 

"한국에서는 고려 때 임제종 간화선 전통의 선가 나옹(1320-1376) 화상이 제시한 삼관 개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 가지 관문을 돌파했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화두 공부를 하는 수행자의 경지를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 세 가지 관문이란 동정일여, 몽중일여, 또는 몽교일여, 그리고 숙면일여 또는 오매일여를 말한다.

 

즉 무엇을 하고 있건, 심지어는 잠을 자면서 꿈꿀 때나 더 나아가 꿈조차 없이 죽은 듯 의식이 없을 때까지도 , 끊임없이 생생하게 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제종에서는 수행을 하다가 어떤 굉장한 체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부단하게 화두를 들고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올바른 믿음'의 기준이 불퇴이고, '올바른 닦음'의 기준이 응주이듯이, 세 관문의 돌차로 표현되는 '올바른 깨침'의 기준은 곧 일여이며 한결같음, 부단함이다. 선종에서 화두순숙 즉 화두가 잘 익었다거나, 의다독로 즉 의심 덩어리만 오롯이 서 있다는 등의 말로 표현하는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

 

 

 

 

 

 

 

 

 

 

 

 

세 가지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언제나 한결같이 화두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의식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무의식적 순간에도 변함없이 화두를 들고 있다면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꿈조차 없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도 화두를 놓지 않고 오롯이 지킬 수 있다면 셋째 관문까지 통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 관문을 돌파한 것을 두고 선종에서는 흔히 제팔식, 즉 아라야식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제팔식인 아라야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모든 것이 끊어진 안온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목석처럼 죽어 있는 생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선사들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참으로 살아 있는 상태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난다"는 '대사대활大死大活'이 바로 그것이다. 크게 죽어야 크게 살  수 있다는 양가적, 역설적 주장은 제팔식까지도 깨버리고 새로이 되살아나는 '전의'의 깨침을 뜻한다.

 

즉 꿈도 무의식의 상태도 심지어 죽음도 넘어서 언제나 한결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전의'의 깨침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믿음은 반드시 닦음이나 깨침과 떼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닦음과 깨침은 각기 자신 속에 타자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는 타자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믿음을 뜻하는 '조신'에서는 믿음이 곧 닦음이요 닦음이 깨침이며 깨침이 믿음이다. 닦음과 깨침이 믿음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닦음 속에 믿음과 깨침이 함께 들어 있으며, 깨침 속에 믿음과 닦음이 같이 들어 있다. 그러기에 믿음과 닦음과 깨침은 같은 사실을 다르게 서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문제가 곧 닦음의 문제이고, 닦음의 문제가 곧 깨침의 문제이며, 깨침의 문제가 곧 믿음의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믿음과 닦음과 깨침은 순환적 성격을 지닌다. 믿음이 닦음으로 이어지고 닦음은 깨침으로 이어지며 깨침은 다시 믿음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깨침의 내용과 닦음의 내용과 믿음의 내용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이 곧 닦음이요, 닦음이 곧 깨침이며 깨침이 곧 믿음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한 덩어리가 되는 궁극적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모두의 공통된 기준은 한 마디로 불이인 것이다. 아무런 분별도 개입되지 못하는 불이의 상태가 불교의 올바른 믿음, 닦음, 깨침의 공통된 기준이다."

 

 

닦음과 깨침이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조신'의 절대적 믿음은 성립할 수 없다.

 

'조신'의 절대적 믿음은 닦음의 본래 완성을 뜻하는 깨침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닦음은 본래 그 자체로 깨침이 될 수밖에 없다. 닦음은 깨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깨침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이 부처라는 믿음을 매 순간마다 재확인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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