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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진리眞理

상제님 강세를 알린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학을 창도하다 - 2.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천상문답사건)을 받아 동학 창도로 한국 근대사가 시작되다.

by 도생(道生) 2015. 3. 13.

상제님의 강세를 알린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학을 창도하다.

2, 상제님으로부터 천명(천상문답사건)을 받아 동학 창도로 한국 근대사가 시작되다.

 

 

 

 

 

 

경신(庚申, 1860)년 봄은 냉혹한 추위만큼이나 나라의 정세도 험난했다. 조정을 장악한 세도가문의 기세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고, 탐관오리의 수탈은 갈수록 심해졌다.

 

게다가 동양을 침탈하려는 서양 제국주의 세력은 더욱 거세게 밀려들어와 조선의 국운은 풍전등화와 같았고,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져 갔다. 이때 수운 최제우 선생은 용담에서 새봄을 맞이하며 세상을 구할 도(道)를 구하고자 수련에 정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카 맹륜(孟倫)의 생일인 음력 4월 5일, 조카의 간곡한 청으로 생일연회에 참석하였다가 아득한 상태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정신을 수습할 수 없는 기이한 상황에 휩싸인다.

 

갑자기 수운 선생은 저절로 움직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몸을 수습하던 찰라, 갑자기 천상(天上)에서 그를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천상문답사건'이다.

 

 

曰 勿懼勿恐하라.

왈 물구물공하라.

世人이 謂我上帝어늘 汝不知上帝耶아.

세인이 위아상제어늘 여부지상제야아.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마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受我呪文 敎人爲我 則汝亦長生 布德天下矣

수아주문 교인위아 즉여역장생 포덕천하의

나로부터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하도록 사람을 가르치면 너 또한 장생하여 세상에 덕을 펴리라.

(『동경대전』 「포덕문」 中)

 

 

 

 

 

 

수운 선생이 지극한 성경신의 결과로 상제님을 친견하게 되는 이 감격스러운 정황은 동경대전 포덕문에 잘 나타난다. 천주님을 직접 뵙고 도통을 받는 일생일대의 사건을 겪은 수운 선생은 상제님으로부터 주문을 받게 되는데, 그 주문이 바로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13자 주문이다.

 

그의 가르침의 진수는 이 주문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훈가」의 "열세 자 지극하면 만권시서(萬券詩書) 무엇하며..."라는 구절은 이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시천주 13자의 주문은 '천주님을 모시고 조화를 정하니 영원토록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그 핵심은 한 분뿐이신 우주의 주재자, 천주님, 즉 상제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과 조화를 정하여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상제님을 모심으로써 다가올 가을 개벽의 관문을 통과하고 새로운 세상, 상생의 신천지를 맞이하는 은혜로움을 의미한다.

 

 

이 천상문답사건을 통해 수운 선생은 글을 써서 상제님의 뜻을 천하에 널리 펴라는 천명을 받는다.

동학(東學)을 창도한 수운 선생은 시작하자마자 폭발적인 교세증가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포덕을 시작한 지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유생들의 음해가 기승을 부린다.

 

 

 

 

 

 

동학(東學)을 서학(西學)같은 것으로 몰아세우기도 하고 역적의 뜻을 품고 있는 무리로 여기는 이들도 생겨난다. 또한, 동학 활동이 활발했던 경주 및 여러 고을에서는 관아가 직접 나서 수운 선생에게 활동을 중지하도록 명령한다. 

 

 

수운 선생은 어쩔 수 없이 경주 용담을 떠나 울산, 남원 등 여러 곳을 다니게 되는데, 이때 「교훈가」 「논학문」 「수덕문」 등을 지었다. 이들은 훗날 『용담유사』와 『동경대전』으로 편찬된다. 그리고 전라도 남원 은적암에 피신하여 있을 때 동학 농민혁명 당시 동학 농민군들이 주로 불렀던 「검결(칼의 노래)」과 함께 「안심가」를 짓게 된다.

 

 

 

 

 

 

그러나 「안심가」는 양반의 서자로 태어난 깊은 원한과 유학을 공부했던 수운 선생의 한계가 나타난다.

유학의 공부한 영향으로 존화론(尊華論)과 영생불사의 도가의 신선 사상에 심취되어 왕후장상을 꿈꾸었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 등이 「안심가」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렇게 쓰여진 「안심가」는 이후 민중의 함성과 함께 일어난 갑오년 동학 농민혁명에서 혁명가요로 불리며 그대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린 수운 선생의 동학 창도로 대한민국 근대사가 시작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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