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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진리眞理

상제님의 강세를 알린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학을 창도하다 - 1. 성경신으로 세상을 구원할 진리를 찾아나서다.

by 도생(道生) 2015. 3. 12.

상제님의 강세를 알린 수운 최제우 대신사 동학(東學)을 창도(創道)하다.

1. 지극한 성경신(誠敬信)으로 세상을 구원할 진리를 찾아 나서다.

 

 

 

 

 

 

상제님의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아 구한말 조선 땅에 태어나, 장차 상제님께서 이 세상에 강세(降世)하실 것과 가을개벽의 도래(到來)를 알린 수운 최제우 대신사. 그는 조선조 후기 '동학(東學)'을 창도하고 난세에 처한 세상을 구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일찍이 신라 시대 대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은 그의 후손인 수운 최제우의 탄강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동방 나라에 도(道)의 기운이 서려 있으니 나로부터 25세 후에 이르러 반드시 세상을 개조(改造)할 대성인이 나올 것이다." (신라외사전新羅外史傳)

 

 

 

 

 

 

 

1824년 경상도 경주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수운 최제우 선생은 조선정부에 의해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명을 쓰고 1864년 3월 대구 장대에서 처형당하기까지 만 40세가 채 되지 못하는, 짧은 생을 살다 갔다. 그러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가 남긴 가르침은 가을 개벽철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귀 기울여야 할 값진 것이었다.

 

 

 

 

 

 

지극한 성경신으로 세상을 구원할 진리(眞理, 道)를 찾아 나서다.

 

아버지 '최옥'의 나이 60이 넘어 태어난 수운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여 어른들로부터 남다른 관심을 받으며 자라났다. 몽중노소문답에서는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4~5세에 이르러 용모가 기이하고 총명이 사광이라 하였고, 8세에 글공부를 시작하자 많은 시서를 무불통지하여 냈다.'라고 기술했다.

 

 

 

 

 

 

 

수운 선생은 열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한씨 부인)를 여의고 연로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한학을 배우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 영남학파의 계맥을 공부하였으며 이는 그의 학문적 기초가 되었다. 또한, 연담 이운규(李雲圭) 선생의 문하에서 역철학을 공부하며 유불선을 뛰어넘는 새로운 진리를 찾고자 뜻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세 번째 부인인 한씨 부인에게서 나온 자식(서자庶子)이기에 문화에 응시할 수 없는 제약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신분제도의 모순과 한계 속에서 수운 선생은 부패로 얼룩진 조선 후기의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선생이 17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안에 큰 화재가 일어나 가세가 기울게 된다. 생활고를 겪으면서 자신의 앞길과 세상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게 된 수운 선생은 천하를 건질 대도(大道)를 찾아 10여 년간(1844~1854년) 전국을 유랑한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상을 목격하고, 외국의 어지러운 정세에 대한 소식을 들으며 큰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는 그가 '개벽(開闢)'의 필연성을 깨닫는 계기가 비단 국내 문제뿐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오랜 유랑 끝에도 세상을 건질 소식을 찾지 못한 수운 선생은 실의에 빠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거처를 처가가 있는 울산으로 옮기게 된다. 이때가 그가 31세 되던 1854년 봄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을묘(1855)년 3월 3일 어느 날, 수운 선생은 매우 신기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왔다는 한 낯선 승려가 100일의 정성 끝에 받아낸 신이한 책을 건네주며 그에게 뜻을 풀이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수운 선생이 책을 풀이해 주고 나서 보니 책과 스님이 간 곳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사건을 일컬어 '을묘천서사건'이라 한다.이에 대해 증산 상제님께서는 "최수운이 성경신이 지극하기에 내가 천강서(天降書)를 내려 대도를 열게 하였더니..." (증산도 도전道典 4:9:1) 라 말씀하셨다.

즉 이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수운 선생이 지극한 정성에 상제님께서 직접 책을 내려주신 것이다.

 

 

 

 

 

 

책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내용 중에 '지극한 정성으로 한울님께 49일 기도를 드려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후 수운 선생은 본격적으로 한울님께 기도하는 49일 수행에 들어간다. 1856년 양산의 천성산 내원암에서 49일 기도를 올리던 중 숙부의 상을 당하여 기일을 채우지 못한다. 이듬해인 1857년에는 천성산 적멸굴에서 다시 49일 동안 정성기도를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난다.

 

 

이후 집에 돌아와서도 선생은 수도(修道)를 계속 이어간다. 그러나 집안을 돌보지 않고 그렇게 구도생활을 이어가다 보니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 갔다. 그래도 선생은 남은 전답마저 모두 팔아가면서 광제창생(廣濟蒼生)의 대도(大道)를 찾기 위한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36세가 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한 수운 선생은 처자를 데리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그의 부친이 공부하던 구미산 용담정에 거처를 마련한다. 그리고 여기서 큰 도(道)를 이루기 전에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작심하고 이름도 제선(濟宣)을 제우(濟愚)로 바꾸고, 호(號)를 수운(水雲)이라 고쳐 다시 수도에 정진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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