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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04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6. 결론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1)
  2. 2014.12.03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5. 인간생명의 근본과 원시반본, 5-2. 일심(一心)으로의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2)
  3. 2014.12.02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5. 인간생명의 근본과 원시반본, 5-1. 마음개벽과 천지일심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3)
  4. 2014.11.28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4. 문명개벽과 원시반본, 4-3. 신교문명으로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2)
  5. 2014.11.27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4. 문명개벽과 원시반본, 4-2. 민족의 근본으로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4)
  6. 2014.11.26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4.문명개벽과 원시반본, 4-1. 천지공사와 문명개벽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0)
  7. 2014.11.25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3. 후천개벽과 원시반본, 3-3. 우주의 가을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8)
  8. 2014.11.21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3. 후천개벽과 원시반본, 3-2. 우주론적 원시반본과 상제(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8)
  9. 2014.11.20 증산도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3. 후천개벽과 원시반본, 3-1. 우주론적 원시반본(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5)
  10. 2014.11.18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1. 서론(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15)
  11. 2014.11.11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7) 증산도의 양가적 사유방식'양전兩全'의 논리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11)
  12. 2014.11.09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6)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성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6)
  13. 2014.11.08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5) 깨침의 양가성 '조신'적 깨침과 '교신'적 깨달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4)
  14. 2014.11.07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4) 닦음의 양가성 '조신祖信'적 닦음과 '교신敎神'적 닦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10)
  15. 2014.11.06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3) 믿음의 양가성 '조신祖信'과 교신敎信'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11)
  16. 2014.11.05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2) '체體와 용用의 논리 = 몸과 몸짓의 논리'(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9)
  17. 2014.11.04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1) 『깨침과 깨달음』의 문제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10)
  18. 2014.10.25 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5) -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타협책, 니케아 공의회로 삼위일체설 채택(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4)
  19. 2014.10.24 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4) - 로마의 전통종교와 국가를 부정한 초기 기독교 박해(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7)
  20. 2014.10.23 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3) - 태양신을 국교로 만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8)
  21. 2014.10.22 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2) - 로마 황제이면서 태양신 사제였던 소년(증산도 생생문화연구소 김현일 박사) (9)
  22. 2014.10.05 종교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 - 사람의 행동과 태도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종교와 세계 신종교 인구의 변화(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강영한 박사) (3)
  23. 2014.10.03 종교를 알면 세계가 보인다 - 세상을 보는 창, 종교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강영한 박사) (7)
  24. 2014.09.28 도교의 세계, 불사(不死)와 신선(神仙) - ⑤ 불로장생과 불멸의, 신선 사상의 의의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3)
  25. 2014.09.27 도교의 세계, 불사(不死)와 신선(神仙) - ④ 신선과 귀향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2)
  26. 2014.09.26 도교의 세계, 불사(不死)와 신선(神仙) - ③ 신선이란 어떤 존재인가? - 2.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5)
  27. 2014.09.25 도교의 세계, 불사(不死)와 신선(神仙) - ③ 신선이란 어떤 존재인가? - 1.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6)
  28. 2014.09.23 도교의 세계, 불사(不死)와 신선(神仙) - ① 불로(不老)와 불사(不死)의 꿈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7)
  29. 2014.07.15 주역에서 정역으로, 정역사상의 현대적 이해(상생문화연구소 양재학 박사) (6)
  30. 2013.08.09 STB 상생방송 역사 특강 " 일본 고대사와 한민족" 김철수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6. 결론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 6. 결론

 

19세기말에 태어난 증산의 눈에 비친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부패관료에 착취당하고 일제에 수탈당하는 민중들의 모습은 인간 증산의 눈에 말 그대로 '희망 없음'이며, 그 희망 없음의 뒤편은 원(寃)과 한(恨)이라는 가시가 가슴을 꿰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모습은 드러난 현상에 불과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었고, 천지의 이치를 스스로 깨우친 증산은 당시의 조선 땅을 순회하면서 세상이 참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결국 수년간의 수도공부를 통해 천지대신문(天地大神門)을 열고 스스로 우주의 주재자임을 알게 된 증산은 삼계대권의 집행자로서 새로운 세상의 필연적 도래를 예정하였다.

 

 

 

인간의 병든 모습 뒤에 드러난 우주는 말 그대로 "선천은 상극의 운" (증산도 도전道典 2:17:1)이었고, 가을의 시간을 준비하는 우주의 흐름은 숙살지기로 천지와 인간을 뒤덥고 있었다. 증산의 천지공사는 여기서 시작된다.

 

 

 

 

 

 

 

 

 

 

 

 

천지의 원한을 풀고, 새로운 세상의 이치를 "상생의 운" (증산도 도전道典 2:18:1)으로 개벽하였다. 논자는 지금까지 우주와 인간을 살리는 천지의 새 틀의 이러한 열림을 증산산 상제님이 말하는 원시반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던 것이다.

 

 

 

현대의 상극의 이치가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천지와 인간과 신명은 그 본래적 존재성을 상실하고 근원적 생명성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선천의 병든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은 필연적으로 잃어버린 본래성을 찾을 수 있는 결정적 전기를 필요로 한다. 생장염장하는 우주의 변화 속에서 우주 내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방식과 인간의 삶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틀바꿈이 바로 개벽(開闢), 더 정확히 후천개벽(後天開闢)이다.

 

 

 

 

 

 

 

 

 

 

 

후천개벽이란 천지운행의 질서가 바뀌고, 천지의 이치가 변화하는 총체적 변국이다.

이 변국은 우주의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일어나며 그 과정에서 천지만물은 분열성장을 멈추고 수렴통일작용을 하게 된다. 후천개벽을 통한 이러한 틀전환은 생명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아르키메데스적 일점이다.

 

 

 

 

 

 

 

 

 

 

원시반본은 천지와 인간이 기형적 모습을 고치기 위한 필연적 방안이다.

세상의 크고 작은 온갖 병은 욕망과 원한 그리고 여기서 확대된 '사회 도덕의 무도(無道)'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병의 일차적 원인은 선천의 상극질서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증산도적 구원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주관과 문명관, 그리고 인간관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 

 

 

 

 

 

 

 

 

 

 

 

 

원시반본은 우주의 가을개벽기에 천지와 문명이 전환하는 기본정신이면서 후천선경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실천의 기본방향이다. 논자는 원시반본의 본질을 우주론적 측면과 문명사적 측면, 그리고 인간의 실천적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 세가지 측면이 갖는 공통의 주제는 바로 우주심판의 가을정신에서 생사를 판단하는 때에 모든 것은 원시반본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바로 개벽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연다는 것이다. 원시반본에 의해 열리는  10천(天)의 지상후천성경은 인간이 주체가 되고, 목적이 되는 인존시대(人尊時代)이다.

 

 

 

역사이래로 인류는 철학, 정치, 과학 등을 통해 새로운 이상세계의 모습을 꿈꾸어 왔고, 그러한 이상세계의 실현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왔다. 인간의 도덕적 이상사회인 목적의 왕국이나, 프라톤의 이상국가, 과학의 진보로 인한 풍요로운 물질적 세계 등은 인간에게 현재의 삶의 반가치(反價値)를 극복한 새로운 이상세계로 인식되었고, 그러한 이상세계의 실현은 바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어왔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종교에서도 이상세계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약속해 왔다.  기독교의 천년왕국이나 신의 나라, 불교에서 말하는 불국정토 등은 종교적 이상세계이고 이러한 이상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바로 인간의 구원을 의미했다.

 

 

그러나 수천 년을 지속해온 이러한 기존의 구원관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원하는 것은 인류의 구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류의 구원은 인간에게만 한정될 때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진정한 구원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 외 모든 존재자들이 그 본래성을 회복할 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천지와 신명, 즉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새로운 존재질서의 확립, 새로운 존재가치의 회복, 새로운 생명뿌리의 살림에서 인류의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천가을개벽이 담지하고 있는 총체적 생명살림의 원시반본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철바뀜과 함께 오는 후천의 개벽은 가을이 낙엽을 떨구는 동시에 또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병겁의 정의와 구원의 사랑이라는 심판을 동반한다.

 

 

 

 

 

 

 

 

 

 

 

이 때는 생사를 판단하는 때이다.

상극의 선천에서 상생의 후천으로 개벽되는, 다시 말해서 우주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인간은 이러한 철바뀜의 환겁을 어떻게 극복하여 새로운 이상세계 속에서 새 생명의 뿌리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을개벽의 때에 원시반본이 갖는 궁극적 의미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의를 통헤 우리는 우주의 환절기에서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리고 우주의 가을 개벽기에 후천의 신문명을 열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증산도적 해결책으로 원시반본사상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살펴보았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와는 다른 이상사회를 원해왔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질서와 이상적인 삶을 만들기 위해 인간은 철학과 윤리와 과학을 사색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이성이 가진 근원적 한계로 인해 불완전한 모습으로 그려질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이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절대적 삶의 기준을 찾아야 하고, 그러한 진리는 구하는 자에게 보여지게 된다는 믿음을 요구하게 되었다. 여기서 보여진 구원의 대도(大道)가 바로 시원을 살펴서 천지와 인간과 생명의 본질을 회복하는 우주의 가을정신, 원시반본이다.

(끝)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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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2.04 06: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사상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께~
    좋은 정보네요 ^^
    저도 잘 보고 갑니다 ^^

  2. Hansik's Drink 2014.12.04 08: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알찬 하루를 보내세요~

  3. 한콩이 2014.12.04 08: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4. 뉴론7 2014.12.04 09: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보고 감니다

  5. 브라질리언 2014.12.04 1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은 순환하는 것이지요 ㅎㅎ

  6. 명태랑 짜오기 2014.12.04 1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7. 생명마루한의원 2014.12.04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에 관해 잘알게 되었습니다ㅎㅎ
    항상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8. 주부s 2014.12.04 11: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어요^~^

  9. 세상속에서 2014.12.04 15: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 포스팅 잘보고 가네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10. 반이. 2014.12.04 17: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11. 유라준 2014.12.04 23: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수많은 새와 짐승들까지...
    굉장히 인상적인 이야기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5. 인간생명과 원시반본

5-5. 일심(一心)으로의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5-2. 일심(一心)으로의 원시반본

 

그렇다면 이러한 일심은 어떻게 가능한가.

즉 인간은 어떻게 함으로써 원래의 근본적인 통일된 마음자리를 회복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마음의 회복은 수행의 결과이지 논리의 결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

 

 

 

도전道典』에 "내가 삼계대권을 맡아서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을 개벽하여 선경을 건설하리니 너희들은 오직 마음을 잘 닦아 앞으로 오는 세상을 맞으라." (증산도 도전道典 2:74:2~3)라는 구절과 "마음 닦는 공부는 심통(心通)공부 어서 하라." (증산도 도전道典 11:250:10)는 구절은 바로 마음 닦는 수행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도통천지 해원상생(道通天地 解寃相生)" (증산도 도전道典 11:249:6)이란 구절에서 '도통천지'는 우주의 원리를 일심의 경지에서 통찰함이며, 이는 천지의 원리와 인간의 마음씀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닫는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도통천지 해원상생"은 도통천지의 경지가 해원, 상생과 상관적임을 보여준다. 천지의 도통은 선천의 상극질서로 인해 삐뚤어진 천지가 본래의 근본을 회복하는 것이며, 원(寃)과 한(恨)에 사무친 모든 생명존재와 신명존재를 해원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상극이 아니라 상생을 근본 이치로 갖는 새로운 세상의 바탕이 될 것이다. 일심의 경지에서 천지의 이치가 인간의 마음씀과 같음을 통찰하는 것, 즉 마음의 근본으로 원시반본하는 것에는 먼저 해원과 상생이 요구되어야 한다.

 

인간과 신명의 원의 뿌리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그리고 우주 자연의 상극의 이치 속에서 일심의 경계는 찾아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구원의 요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떤 측면 때문에 구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증산도에서는 구원의 대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오늘날의 인류는 그 누구도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다. 인간이 범한 죄악으로부터 커지기 시작한 이 병의 뿌리는 무엇으로부터 잉태된 것인가... 이 죄악과 죽음의 근원은 마음 깊은 곳에 맺혀 있는 원한(寃恨)으로부터 나온다." (안경전 1993년) 이 말에서 우리는 증산도의 구원관은 인간이 구원되어야 하는 까닭을 원한(寃恨)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한이 생겨나는 기원에 대해서 『증산도의 진리』는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뜨거운 소망과 욕망을 가지고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의 동기가 본래 선의든 악의든 간에 자신의 불타는 소원과 욕구 충동이 일단 좌절되면 가슴에 응얼병이 들어 분통이 터지고 마음 깊은 곳에 원한이 맺힌다. 이것은 육신을 쓰고 있는 인간의 영원불변한 순수한 본질이다... 인간의 죄는 마음에서 일어나서 말과 생각함으로 번지며 행동으로 옮길 때 표면화된다. 죄의 뿌리가 원한 속에 뻗어 흐르고 있다." (안경전 1993년)

 

 

 

즉 인간의 원한은 바로 인간의 무한한 욕망 구조 속에서 드러난 것이며, 이러한 욕망구조는 선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선천의 이치는 인간을 욕망과 충동의 존재로 이끄는 상극적 상황을 드러낸다. 선천의 자연 속에서 분열된 인간의 본성은 우주의 가을 개벽과 함께 구원의 계기를 마련하여야 하며, 그 계기는 바로 일심의 회복, 심적 원시반본이다.

 

 

 

 

 

 

 

 

 

 

 

 

증산도의 죄악개념은 기독교의 원죄(原罪)와는 달리 인간의 문제이고 이 인간의 문제는 상극의 이치로 인한 욕망의 구조, 그리고 원한의 불가피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원한을 풀어버림으로써 죄악의 근원을 없애 버려야 한다. 이를 해원(解寃)이라고 한다. 즉 해원은 죄의 소멸이며 죄의 소멸은 구원의 조건이다.

그렇다면 인류구원의 단서는 직접적으로 해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도전道典』 구절은 해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각기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고, 혹은 행위를 바로 살펴 곡해를 바로잡으며, 혹은 의탁할 곳을 붙여 영원히 안정을 얻게 함이 곧 선경을 건설하는 첫걸음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17:8)

 

 

 

 

 

 

 

 

 

 

 

 

이는 천지와 인류역사 속에 누적된 원한의 고리를 풀어 버릴 때 지상선경을 향한 구원의 문을 열 수 있으며, 상생의 대도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원은 인간과 신명의 한과 죄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그 한의 고리를 풀어 버림으로써 후천선경의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가는 방안이다. 이러한 해원은 천지의 질서를 바로잡고 신도(神道)를 바로잡으며, 인간의 이상적 문명을 예정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 프로그램) 속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구조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천의 상극적 이치로 인한 이차적인 것이지 본래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무한한 욕망구조를 갖고 죄를 탄생시키는 것은 선천의 뒤틀린 환경 때문이다.

 

"선천에는 상극의 이치가 인간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三界)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 (증산도 도전道典 4:16:2~3)킨다.

 

 

 

 

 

 

 

 

 

 

 

 

따라서 인간의 원한의 근거는 바로 선천의 자연환경이다.

원래 인간의 마음의 본질은 무극의 통일상태, 즉 일심으로 존재한다. 그러한 일심의 상태는 자연환경의 상극질서로 인해 분열 성장히여 무한한 욕망구조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해원은 상극의 이치로 인해 분열된 마음을 통일시키는 조건으로서 일심과 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후천개벽을 통한 상생의 이치 속에서 자연과 인간과 신명(神明)이 조화로운 생명의 뿌리를 되찾아가기 위한 조건은 해원이다.

이는 해원이 인간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증산도의 죄악개념은 완전히 인간의 실천의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초월적 차원도 아니다.

 

 

 

 

 

 

 

 

 

 

 

 

원한의 기원은 단주(丹朱)의 원(寃)이며 이는 인간적인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寃)의 역사의 근원은 선천의 상극구조 때문이다. 즉 선천의 원한은 선천의 상극질서 속에서 발생한 인간의 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원한의 근거가 선천의 우주환경으로 인한 인간의 상극적 행위 때문이라면 해원의 가능성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후천개벽과 천지공사는 우주 주재자의 절대적 권능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는 해원의 가능근거이다.

선천의 난법이 해원되고 천지의 이치가 상극에서 상생에로 전이됨으로써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그 본래적 조건을 회복할 것이며, 인간의 원을 끌러 버리는, 그리고 인간 상호간에 생명을 살리는 한정된 의미만으로 해석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자연과 인간과 신명의 해원, 상생이라는 총체적 의미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해원은 분열성장하는 선천에서 어그러진 생명의 본래성을 바로잡는 것이며, 상생은 해원된 존재의 총체적 상호살림이다.

이러한 해원상생은 이상적인 선경을 건설하는 토대이며, 일심으로 원시반본하는 조건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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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2.03 06: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
    즐건 하루되세요 ~

  2. 청결원 2014.12.03 06: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3. 뉴론7 2014.12.03 06: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하루도 좋은 하루되세요

  4. 죽풍 2014.12.03 07: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전라지역에는 아직도 눈이 많이 내리고 있네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5. 한콩이 2014.12.03 07: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오늘도 잘보고갑니다^^

  6. Hansik's Drink 2014.12.03 0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간답니다 ^^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세요~

  7. 비키니짐(VKNY GYM) 2014.12.03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오늘도 유익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8. 브라질리언 2014.12.03 1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심 에 대한 생각을 오랜만에 해봅니다 ^-^

  9. 명태랑 짜오기 2014.12.03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10. 주부s 2014.12.03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봤습니다^^

  11. 세상속에서 2014.12.03 17: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 포스팅 잘봤어요.
    저녁시간 잘 보내세요.

  12. 유라준 2014.12.03 2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의 무한한 욕망구조를 해결해야 하는군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5. 인간생명과 원시반본

5-1. 마음개벽과 천지일심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일심(一心)

 

우주 1년의 순환은 우주의 필연적 법칙이면서 생장염장의 과정으로 드러나는 우주 주재자의 무위이화의 현현(顯現)이다.

이 법칙 속에서 자연과 인간은 선천과 후천의 순한과정을 겪게 되며, 이와 함께 인간 구원의 필요조건으로서 상생의 이치가 우주의 근본원리가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구원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또 다른 필요요건으로서 구원을 향한 인간의 적극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즉 우주 1년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환경적 변화를 통해서 그 가능성이 열려지는 이상세계를 현실적으로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한 인간적 조건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며 원시반본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증산 상제님은 "이제는 모사는 재천하고 성사는 재인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5:4)는 말은 인간의 실천적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장에서 논자는 가을 개벽기를 맞이하는 시점에 인간의 실천원리가 무엇인가란 물음을 일심(一心)과 관련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5-1. 마음개벽과 천지일심(天地一心)

 

원시반본하는 이 시점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은 무엇인가?

원시반본 정신에 의하여 근본과 뿌리를 찾지 못하는 자들이 후천개벽이 일어날 때 다 죽는다면(증산도 도전道典 2:44) 인간 생명의 살림은 원시반본을 떠나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총체적 살림으로서의 원시반본이 후천개벽기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 1년의 과정 속에서 후천개벽을 통한 새로운 천지 운행질서와 천지공사에서 보여지는 예정적 존재질서가 모든 인간의 구원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생명의 근원자리로의 회귀로서 원시반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인간의 구원이 원시반본과 관련하여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다음의 도전道 구절은 후천개벽과 심적 실천의 상호연관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내가 천지운로(天地運路)를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너희들은 삼가 타락치 말고 오직 일심으로 믿어 나가라. 일심이면 천하를 도모하느니라. 이제 9년 동안 보아 온 개벽 공사(開闢公事)의 확증을 천지에 질정(質定)하리니 너희들도 참관하여 믿음을 굳게 하라."  (증산도 도전道典 5:414:3~7)

 

 

위 구절은 후천개벽을 통한 선경의 가능성은 그 가능성에 대한 일심의 믿음으로써 확증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일심은 원시반본의 또 하나의 의미이다.

 

 

 

후천의 선경을 현실적으로 이 땅, 이 시대에 이루기 위한 심적 상태는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물음은 곧 후천개벽을 통해 가능해진 이상세계를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일치한다.

 

증산도에 있어서 구원은 크게 후천개벽이라는 타력적 요소와 심적 개벽을 통한 일심의 실현이라는 자력적 요소, 이 양자에 의해 가능하다.

 

 

 

 

 

 

 

 

 

 

앞의 물음과 관련되어 있는 이상세계의 조건은 인간 마음의 본래적 상태, 원시심(原始心), 순수심(純粹心), 본원심(本原心)을 회복하는 것이다.

 

 

현대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욕망구조나 과학적 물신주의는 선천의 상극이치 속에서 생겨난 비본질적 마음이며, 이는 무도(無道)의 근거이며, 원한의 씨앗이 된다.

정신의 참된 본성을 벗어난 비본질적 마음은 인간의 역사를 원한의 역사, 욕망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며, 그 속에서 생명을 되살리고, 선경을 실현할 수 있는 구원의 마음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참된 삶을 찾을 수 있는 본래의 마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혹은 인간의 본성은 과연 있는 것이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 계속해서 변해 가는 상태의 연속인가?  선진유가(先秦儒家)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다양하게 논의하고 있다. 공자의 인(仁)이나 맹자의 성선설(性善說), 순자의 성악설(性惡說) 등은 인가느이 본성에 대해 어질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로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환경에 따라 인간의 본성은 악하게도 혹은 선하게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으로서의 선(善)이나 악(惡)은 절대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행위로 드러날 경우에 그 행위가 규범에 일치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렇다면 유가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은 곧 도덕적 본성의 측면에서 논의되는 것이며 이는 상대적 가치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순수심, 혹은 원시심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도덕적 개념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나 개념으로 구분되기 이전의 근원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인간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지는 마음은 상대적 가치를 갖는 도덕적 범주가 아니라, 절대적 의미를 갖는 자연적 본성, 구분되고 분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심적 상태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래의 마음은 우주의 순환원리에 의한 변화와 삶의 가치의 다양화, 존재본질의 상실로 인해 절대적 본성을 상실하고 상대적 의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위기의 원인은 바로 여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위기의 원인이 분열된 마음에서 찾아진다면, 위기의 해결책은 분열된 마음의 통일에서 구해질 수 있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원시반본을 "무극의 통일상태로 돌아감" 이라고 해석할 때, 그 통일상태는 상명이 음과 양으로 나누어지기 이전, 즉 주객이 분리되기 전 인간과 우주생명의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자리이다. (안경전 1993년)  그 중 인간 마음의 통일상태는 바로 다양한 가치로 분화되기 이전의 마음상태,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는 통일된 심적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경계가 사라진, 그래서 절대적 가치를 회복한 상태를 마음에 있어서 무극의 통일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시심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상태인가.

 

 

 

 

 

 

 

 

 

 

 

 

증산도 도전道典에서 인용한 다음의 구절은 마음의 이러한 경지, 즉 원시심은 곧 천심(天心)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인을 배우는 자는 천지의 마음을 나의 심법으로 삼고 음양이 사시(四時)로 순환하는 이치를 체득하여 천지의 화육(化育)에 나아가나니 그런고로 천하의 이치를 잘 살펴서 일어일묵(一語一默)이 정중하게 도에 합한 연후에 덕이 이루어지는 것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95:11~12)

 

 

 

천지의 마음을 나의 심법(心法)으로 삼는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곧 하늘의 마음이어야 함을, 그리고 그렇게 하여 천지의 이치와 마음씀(심법)이 일치하여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 때 인간의 본래 마음(원시심)은 사사로움이 없는 공평한 마음, 곧 천지심(天地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근본자리로 되돌아 감(심적 원시반본)은 곧 천지의 이치와 일치함, 혹은 위 『도전道典』의 인용문처럼 우주의 사시(四時), 즉 생장염장의 순환법칙에 대한 체득(體得)이며, 이는 바로 도(道)의 근원에 합치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으로 생명의 본 바탕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후천선경의 실현이라는 인간 구원의 구체적 모습은 마음의 근본자리로 돌아감, 즉 마음의 절대적 상태의 회복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마음 개벽,

 

심적 원시반본의 방법적 측면은 초월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절대자의 은총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는 실천적인 인간의 마음씀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며, 후천선경의 인간적 조건이며, 생명의 근본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다음의 『도전道典』 구절은 마음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 마음자리는 인간의 현실적 노력의 차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천지만물(天地萬物)이 시어일심(始於一心)하고 종어일심(終於一心)하니라. 천지의 만물이 일심에서 비롯하고 일심에서 마치느니라. 일심이 없으면 우주도 없느니라. 일심으로 믿는 자라야 새 생명을 얻으리라. 너희들은 오직 일심을 가지라. 일심으로 정성을 다하면 오만년의 운수를 받으리라. (증산도 도전道典 2:91)

 

 

 

이 구절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일심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언뜻 관념론적(觀念論的) 세계관을 연상케 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성을 주관(主觀)에서 찾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면 마음의 문제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존재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 된다.

이 구절의 본래의 의도는 마음이란 어떤 것이가를 드러내는 것이다.

 

 

 

 

 

 

 

 

 

 

 

 

일심에서 천지가 비롯된다는 것은 마음이 천지의 존재 근거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보다는, 천지의 이치, 우주의 원리는 마음에 의해 깨침으로서 그 진리성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즉 이 성구에서 '매사에 일심히라'의 의미는 일심을 갖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며 그 노력의 주체는 바로 인간이다.

 

 

일심을 갖는다는 마음개벽을 통해 인심(人心)이 천심(天心)임을, 그리고 천심이 일심(一心)임을 깨달음으로써 인간 본래의 마음자리, 원시심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 생명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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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4.12.02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2. Hansik's Drink 2014.12.02 08: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간답니다 ^^ 웃음 가득한 하루가 되셔요~

  3. 뉴론7 2014.12.02 0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씨가 상당히춥네요 좋은하루되세요

  4. 아쿠나 2014.12.02 0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은 언제 봐도 어려워요 ㅎ

  5. 주부s 2014.12.02 09: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6. 생명마루한의원 2014.12.02 11: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항상 잘보고있습니다^^
    추운날씨 감기조심하세요~

  7. 브라질리언 2014.12.02 1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 알수록 매력있네요 ㅎㅎ

  8. 명태랑 짜오기 2014.12.02 11: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9. 세상속에서 2014.12.02 14: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잘보고 돌아갑니다.

  10. 한콩이 2014.12.02 18: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감기조심하세요^^

  11. 신기한별 2014.12.02 21: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다녀갑니다

  12. 여행쟁이 김군 2014.12.02 22: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잘 보고 갑니당~

  13. 유라준 2014.12.02 23: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간 생명 본래성을 회복한다라...
    굉장히 어려운 내용같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증산도의 원시반본(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4. 문명개벽과 원시반본

4-3. 신교(神敎)문명으로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4-3. 신교(神敎)문명으로 원시반본

 

 

한민족에게 있어서 민족의 원시반본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민족의 근본은 단군 성조에서 찾아진다. 물론 그 이전 최초의 역사적 국가를 형성한 환인천제(桓仁天帝)의 환국시대는 인류문명의 시발점이면서 우리민족의 시원적 뿌리가 된다.

 

 

 

 

 

 

 

 

 

 

"선천개벽 후 몇 차례의 소개벽을 거쳐 지구상의 기상의 대변화가 일어난 것은 약 일만 이천년 전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소개벽 이후에 다시 인간이 개벽한 최초의 원시문명이자, 당시의 한민족 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의 뿌리 되는 세계최초의 시원(始原) 문명국가는 '천산동방(天山東方)'에 위치한 환국(桓國)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경전 1993년 『삼성기 하』) 그러나 현대 우리나라의 직접적 뿌리는 단군조선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의 역사교육은 단군을 실재적 사건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로 간주하기보다는 단군신화라는 말로 그 의미를 단순화 추상화하고 있다. 단군신화라는 표현은 우리의 조상과 뿌리를 철저히 왜곡하고 부정하여 한민족의 근본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즉 역사적 인물로서 단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로 격하시켜 한민족의 뿌리를 없애려는 동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역사서에 단군성조뿐 아니라 그 이전의 환웅시대와 환인시대 모두 우리 민족의 뿌리로서 실존하였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상고시대 우리 겨례의 역사에 대하여 삼성기 상편과 하편은 각각 대동소이한 사관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1. 환국시대, 2. 신시(배달)시대, 3. 단군(조선)시대로 구분되고 4. (북)부여시대가 이에 후속한다." (하기락 1994년 『조선철학의 유맥』)

 

 

 

 

 

 

 

 

 

 

 

 

민족의 원시반본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조상의 근본 뿌리를 찾아가고 그 조상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민족문화의 근본을 되살려 현재의 우리의 삶의 이상적 가치로 재창조하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민족의 주체성이 바로 서지 않은 입장에서 자아의 주체성이 바로 서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민족의 시원을 살쳐 그것의 의미를 고찰하고 후천의 바람직한 문명전개의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한민족의 뿌리로서의 환인 환웅 단군 삼성조시대는 그 문화적 뿌리를 신교(神敎)에서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교화했다는 기록에 의하면 인류가 최초로 시작하는 문화의 근본은 바로 신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하기락 1994년 『조선철학의 유맥』)

이는 한민족과 민족문명의 시발점이 신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단군 조선시대 이후 한민족이 이제까지 가슴속에 지녀온 기본적인 삶의 정신은 경천(敬天), 만민구원의 홍익인간(弘益人間), 대도의 진리로서 새롭게 다스린다는 이화세계(理化世界)의 3대 이념이다. 그런데 이 민족의 구원정신은 당시 우리 민족의 국교였던 신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 신교는 한민족이 광활했던 저 만주로부터 한반도에 들어오기까지 신앙해온 본래의 시원종교이며, 지금의 유 불 선 기독교가 출현하기 전에 전 세계 인류가 신앙해온 인류의 모태종교이다." (안경전 1993년)

 

 

 

 

민족의 원시반본은 우리 민족의 근본뿌리가 단군임을 인식하고 동시에 민족의 뿌리문화의 근거인 신교와 그 근본이념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는 의미와 동시에 인류구원의 진리를 포함한다.

 

 

 

 

 

 

 

 

 

 

 

 

"동방의 한국은 본래 신교를 닦아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온 인류의 제사문화의 본고향이라.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의 한족과 일본에 의해 역사가 왜곡되고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 상제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강세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1:5~7)는 구절 속에서 한민족의 민족신앙으로서의 신교 혹은 천신교는 단순히 한민족에 한정된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지금 현대에 우리는 인간의 뿌리, 한민족의 뿌리문화인 신교문화로 원시반본하여 신교가 새로운 시대의 문명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 불교, 유교, 이슬람교 등 각 종교는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민족에 의해 신앙되어왔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시원을 더듬어 볼 때 우리는 그러한 모든 종교적 신앙의 뿌리에서 신교의 맥을 찾을 수 있으며, 그 맥은 바로 삼신사상에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교는 바로 우리 민족의 뿌리종교이다.

즉 이러한 모든 종교의 근원에 한민족의 신교가 뿌리로서 먼저 있었다.

 

 

 

 

 

 

 

 

 

 

 

"태시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라. 홀연히 열린 우주의 대광명 가운데 삼신이 계시니, 삼신은 곧 일신이요, 우주의 조화성신이니라... 이 삼신과 하나되어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통치자 하느님을 동방의 땅에 살아온 조선의 백성드은 아득한 예로부터 삼신 상제, 삼신하느님, 상제님이라 불러오니라. 동방의 한국은 본래 신교를 닦아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 온 인류의 제사문화의 본고향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1:1~5)

 

 

이제 선천의 종교가 현대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선후천이 교역하는 우주의 가을시기를 맞이하여 민족의 뿌리 종교로서 신교가 모든 지방종교를 통일하여 세계문명의 근본으로 새롭게 드러난다는 것은 시대적 당위이며, 역사적 필연이며, 우주적 진리이다.

 

 

민족의 원시반본사상은 세계 모든 민족과 종교가 신교문화의 복귀라는 측면에서 후천의 새로운 문명세계와 필연적 상관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증산도에 의하면 이는 논리적 귀결도, 직관적 인식도 아닌 천지공사를 통해 도수(천도지수)로써 예정된 역사의 실현이다. "조선을 세계상등국으로 만든다" (증산도 도전道典 5:389)는 구절은 선천의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 인류의 뿌리문화인 신교의 나라 조선이 후천세계의 종주국으로 예정되었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신교문화의 진리, 우주의 가을정신을 전하는 증산도는  현대에 있어서 천지와 인간의 기원, 그리고 그 목적을 원시반본하는 우주의 원리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후천의 지상선경이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것은 바로 원시반본사상의 핵심적 내용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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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28 0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말씀 잘 보고 가요 ^^

  2. Hansik's Drink 2014.11.28 08: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간답니다 ^^ 기분 좋은 하루가 되셔요~

  3. 죽풍 2014.11.28 0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단군신화라는 표현, 역사적 실재 인물을 부정하는 의미일수 있겠지요.
    아는 사람부터 정확한 표현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4. 뉴론7 2014.11.28 0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래전 전설이 잼나죠

  5. 비키니짐(VKNY GYM) 2014.11.28 0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덕분에 좋은 정보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6. 브라질리언 2014.11.28 10: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만 2천년전이면 정말 대단하네요~

  7. 명태랑 짜오기 2014.11.28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8. 한콩이 2014.11.28 13: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즐거운하루되세요^^

  9. 세상속에서 2014.11.28 16: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잘봤어요~

  10. 여행쟁이 김군 2014.11.28 21: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려운 단어도 많지만 ~
    이해하기 쉽게 잘 풀어주셨네용~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저녁시간 되세요

  11. 유라준 2014.11.28 21: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흐음, 확실히 단군신화라는 말부터 쓰면 안되겠네요.
    은연중에 '신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12. 귀여운걸 2014.11.29 20: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해하기 쉽게 꼼꼼히 설명해주셔서 너무 좋네요~
    덕분에 많이 배워갑니다^^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4. 문명개벽과 원시반본

4-2. 민족의 근본으로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  4-2. 민족의 근본으로 원시반본

 

 

증산도 『도전道典』에서 원시반본과 관련하여 언급한 구절 중에서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는 바로 민족의 근본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혈통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하는 자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증산도 도전道典 2:26:1~2)

 

" 지금은 원시반본하는 시대니 혈통줄을 바르게 하라. 환부역조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증산도 도전道典 7:17:3~4)

 

 

 

이러한 구절들후천개벽을 맞이하여 모든 것이 그 근본 뿌리를 찾는 때에 민족과 조상의 근본을 중요시하는 말들이며, 동시에 인류 문명 근본뿌리를 찾는 것은 곧 후천선경의 실현이라는 인류의 구원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구절들이 가능한 근거는 다음의 『도전道典』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26:5)

"하늘과 땅이 사람을 낳으니(天地生人)" (증산도 도전道典 2:23:2)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이며,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바로 존재의 뿌리이다.

조상과 조상이 확대된 민족은 천지와 분리되어서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천지 알기를 너희 부모 알듯이 하라" (증산도 도전道典 11:114:1)는 것이다.

렇다면 환부역조하고 환골하는 것은 곧 천지의 이치를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신과 인간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증산 상제님은 "부모를 경애하지 않으면 천지를 섬기기 어렵다." (증산도 도전道典 2:26:4)고 말할 뿐만 아니라

"가을 운수를 맞아 선령신을 박대하는 자들은 모두 살아남기 어렵다." (증산도 도전道典 2"26"8)고 한다.

 

따라서 민족의 뿌리를 찾고, 선령신을 받드는 것은 천지의 이치에 따른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혈통과 뿌리로서의 조상과, 조상의 확대인 민족, 그리고 각 민족이 갖는 민족문화는 현대의 다양한 문화와 종교의 기원이다. 그러나 선천의 상극이치에서 분열 성장된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은 각 민족간의 피나는 전쟁으로 지구 전체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한 각 민족의 상극적 상황은 민족의 전통적인 근본을 철저히 부정한 채 단지 현재의 이익에만 집착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도전道典』에서 민족의 뿌리에로의 원시반본을 강조하고, 이러한 민족적 갈등과 원한을 천지공사에 의해 다 해원시키는 것은 현재의 인간들만의 문제들에 국한되어 이해되는 것보다 후천세계에 있어서 모든 인간과 신명에게로 확대된 총체적인 상생문명의 건립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앞 세상에는 족속에 따라 나라를 세우리라." (증산도 도전道典  5:332:9)

그로부터 각 민족의 근본을 정립하고, 그러한 민족단위의 국가는 다시 통일정권에 의해 조화롭게 다스려지는 시대가 도래한다.

 

"세계일가 통일정권 공사" (증산도 도전道典 5:325:10)는 바로 지구촌이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통치원리에 의해 통일되는 것을 말함이다.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도수(천도지수)로서 가능하게 되고, 또한 후천의 새로운 문명세계와 어떻게 연관되는가의 문제가 바로 민족의 원시반본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민족의 근본을 되찾고, 혈통줄을 바로 잡는 것이 원시반본정신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곧 과거에 존재했던 이상적 상태를 현재에 되살펴봄으로써 그러한 이상적 형태를 다시 회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민족의 근본에로의 원시반본은 세계일가 통일정권을 가능하게 하는 신교(神敎)문명으로의 복귀, 곧 상제문화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맥의 『태백일사』 첫머리에 "태초에 위아래 사방에 일찍이 어둠이 보이지 않고 과거는 지나고 현재가 다가오니 오직 한결같은 밝은 빛 뿐이었다. 상계로부터 문득 삼신이 계셨으니 이는 곧 한 분 상제로서 주체는 곧 일신이시니 각각 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작용으로만 삼신이시다." (『환단고기』 「태백일사」)는 구절이 있다. 

 

 

 

이 일신이면서 삼신인 상제는 바로 우리 민족 시원의 종교적 신앙대상이며, 환국의 가르침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뿌리를 찾아감에서 우리는 그 문명의 근본을 발견하게 되고, 신교문화의 맥을 찾게 될 것이다. 민족의 뿌리를 찾는 원시반본을 통해 각 민족의 뿌리가 하나의 근본에서 만나게 하며, 이는 세계 통일문명의 초석을 놓는 것이다.

 

 

 

 

 

 

 

 

 

 

 

 

증산 산제님이 "나도 단군의 자손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26:3) 고 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한민족의 시원성과 역사성을 동시에 선언하는 말이다. 우주의 통치자인 증산 상제님이 인류의 시원민족인 한민족으로,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뿌리성(姓)인 강씨성(姜氏姓)으로 강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민족의 근본으로의 원시반본을 실현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증산 상제님의 이 말은 또한 한민족에게 있어서 조상은 단군임을 분명히 언급하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인류는 각자의 조상을 부정하고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며, 스스로의 근본을 찾지 못하고 환부역조를 자행하고 있다. 단군을 신화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상을 부정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 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 것을 글로써 너희들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노라" (증산도 도전道典 5:347:16) 라는 증산 상제님의 말은 우리의 현실을 철저히 반성하도록 한다.

 

 

 

 

 

 

 

 

 

증산도에서 민족의 근본을 되찾는 원시반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도덕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가 신명과의 조화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후천의 세계통일문명과 절대적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혈통줄을 바로잡는다는 것과 환부역조하지 말라는 것은 단지 현시대의 가정윤리의 문제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신과 민족신에 까지 확대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며, 나아가 신교문명으로서의 원시반본과 상관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증산도가 이 말세기적인 주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네 조상의 뿌리와 네 민족의 정기를 바로잡으라고 제시하는 구원의 역사섭리는 천지성공시대의 임박에 따른 민족의 원시반본이다." (안경전 1993년), 민족의 근본으로의 원시반본이 어떤 측면에서 중요하며, 그것이 후천개벽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논의는 후천의 이상적이 문명세계와 관련해서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민족의 근본을 찾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현대의 시대적 상황을 직시해 볼 때 드러난다.

현대 국가간 분쟁은 민족적인 문제들과 이에서 확대된 종교문제가 그 원인이다. 이러한 첨예한 문제들은 민족단위의 조상신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그 뿌리로 되돌아 갈 때 해소될 수 있다. 즉 "역사상 민족간의 모든 투쟁과 갈등은 지방신이 통일되어 혈통줄이 바로잡힐 때 해소되어 사라지고 인류평화가 실현되어진다." 

 

 

민족의 원시반본은 민족의 갈등과 투쟁을 해소하는 것으면서 동시에 신명계의 분란과 투쟁을 종식시킴으로써 신인합발의 후천문영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근본이 된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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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27 06: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사상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좋은 내용이고 저도 덕분에 잘보고 가네요~
    행복한 하루되세요 ^^

  2. 청결원 2014.11.27 0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3. Hansik's Drink 2014.11.27 08: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알찬 하루를 보내세요~

  4. 죽풍 2014.11.27 08: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5. 2014.11.27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6. 브라질리언 2014.11.27 10: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좋은 내용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7. 한콩이 2014.11.27 10: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

  8. 명태랑 짜오기 2014.11.27 11: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9. 생명마루한의원 2014.11.27 1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보고갑니다^^
    남은 하루 알차게 보내세요~

  10. 청결원 2014.11.27 15: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정보에 감사~
    오늘하루도 마무리 잘하시고
    파이팅 넘치는 하루 되시길~~

  11. 세상속에서 2014.11.27 1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잘봤습니다.
    오늘도 화이팅 하세요.

  12. 유라준 2014.11.27 21: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은 무척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3. 리뷰맨77 2014.11.27 22: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떻게 이렇게 좋은 글을 매일 포스팅하세요..정말로 대단하세요^^

  14. With E 2014.11.27 23: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늘과 땅이 사람을 낳으니!! 자연을 해치는 행동을 평소에 많이하는 제모습을 반성해야겠습니다.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4. 문명개벽과 원시반본

4-1. 천지공사와 문명개벽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4.문명개벽과 원시반본

 

 

 

 

 

 

 

 

 

 

후천개벽의 한 축으로서의 천지공사는 선천의 모든 불합리한 이념, 이법, 질서를 개혁하고 수정하여, 후천의 새로운 문명으로 예정하는 천지개벽공사이다.

 

선천의 상극지리는 원(寃)과 한(恨)을 맺히게 하고 쌓인 원과 한은 천지에 재앙을 일으키므로 새로운 천지운로를 예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지공사는 원시반본, 해원, 상생, 보은정신으로 천상 신명계를 통일시키고, 세운공사(世運公事)로 인간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도운공사(道運公事)로 모든 종교의 운을 거두고 새로운 신도(神道)를 열었으며, 지운통일공사(地運統一公事)를 통해 인류평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천지공사는 각 지방신과 지운을 통일하여 각 문화의 진액을 뽑아 새로운 후천문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현대는 어떤 상황에 직면해 있는가?

문명은 성장의 극을 달리고 있으며, 인간은 자아를 상실하여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으며, 자연은 환경의 오염으로 생태의 질서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이가?

답은 되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더 이상의 분열은 절망과 파괴이며 그 극은 종말이다. 이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은 끊임없는 전진이 아니라 반성과 전망을 통한 수렴이며 통일이다.

 

 

 

우주의 가을철을 맞이하여 모든 존재는 성숙할 대로 성숙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분열의 끝에서 다시 그 원 뿌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극점에서 돌아섬은 혼란한 다양성에서 통일된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앞으로의 끊임없는 전진에서 다시 그 시원을 되살펴 본래성을 반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돌아감에서 새 문명, 새 생명의 싹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예견을 통해 행해진 인류구원의 불가피한 행위를 우리는 천지공사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4. 문명개벽과 원시반 -  4-1. 천지공사와 문명개벽

 

앞에서 살펴본 후천개벽은 자연의 필연적 변화원리와 동시에, 우주 주재자의 무위이화적 권능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적 우주운동 외에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度數)를 짜 놓았으니 제 한도에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증산도 도전道典 5:416:1)는 구절에서 나타난 바와 같은 예정적 변화가 있다.

예정적 과정은 인간으로 강세한 우주 통치자 증산 상제님이 자연과 문명의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일은 천지를 개벽함이니 곧 천지공사니라"(증산도 도전道典 5:3:6) 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천지공사는 개벽의 의미로 해석되며, 이 때의 개벽도 방법적 측면에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예정함으로써 선경(仙境)의 근거를 마련하는 절대자의 행위로 간주되어야할 것이다.

 

 

 

 

 

 

 

 

 

 

이처럼 후천개벽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자연의 운행질서(시간질서)가 정역의 궤도로 바로잡히는 것이고,

둘째는 천지공사를 통해 자연의 존재질서와 문명질서를 동시에 새롭게 재조직화 하는 것이다.

 

 

에서 인용한 '하늘도 땅도 뜯어 고쳐...'라는 구절은 신명계와 인간의 문명을 총체적으로 개벽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는 곧 자연과 문명의 존재질서를 새롭게 조화시키는 의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두 가지 후천개벽의 근본정신이 바로 원시반본이다.

 

 

 

 

 

 

 

 

 

 

 

 

문명개벽적 측면을 갖는 후천개벽은 우주 주재자로서의 절대자가 인간으로 육화하여 9년간(1901-1909) 집행한

천지공사(天地公事)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의 도전道典』 구절을 통해 후천개벽으로서의 천지공사가 자연과 신명과 인간(理神事)의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일은 천지를 개벽함이니 곧 천지공사니라. 네가 나를 믿어 힘을 쓸진대 무릇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인습할 것이 아니오 새로 만들어야 하느니라."(증산도 도전道典 5:3:6~7) 이러한 천지공사는 이미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존재질서를 만드는 절대자의 행위이다.

 

따라서 후천개벽의 두 번째 의미, 즉 천지공사는 절대자 무극신의 권능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천지개벽은 인간의 역사와 문명이 상극질서를 벗어나 상생의 가치질서, 존재질서를 갖도록 하는 예정적 개벽이다. 예정적 개벽은 후천개벽의 첫째의미와 달리 무위이화적 행위가 아니라 의지적(意志的)적 행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천지공사는 선천의 상극적 존재질서, 문명질서를 후천의 이상적 존재질서, 문명질서로 현실화될 수 있도록 미리 도수(度數,프로그램)로서 설정하여 그렇게 필연적으로 진행되도록 한 예정적 행위이다.

이는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구절에서 분명해 진다. 즉 천지자연의 이치로서 무위이화적 드러남이 아니라 존재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도전道典』의 다음 구절은 천지공사의 주체와 방법과 의의를 압축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천지공사는 우주의 절대자가 인간으로 육화하여 하늘과 땅의 질서를 바로잡아 신도(神道)와 인사(人事)를 조화시켜 도운과 세운이 선경낙원으로 갈 수 있도록 도수(프로그램)를 예정한 행위를 말한다.

 

천지공사의 주체는 증산 상제님이며, 방법은 원시반본, 해원, 상생, 보은정신으로 천지생명의 원과 한을 풀고 신명조화정부를 건설하여 역사의 도수를 짜는 것이며, 그 목적은 도운과 세운이 예정대로 전개되어 선천의 낡은 질서가 개벽되어 후천의 새로운 문명질서사 확립되는 지상의 선경낙원을 건설하는 것이다.

 

 

 

가을 개벽 전의 난법해원시대와 천지공사를 통한 신문명 예정공사는 바로 원시반본을 통한 후천선경을 준비하는 조건이며, 총체적 생명살림의 의지의 표현이다.

 

 

 

 

 

 

 

 

 

 

 

 

지금은 혼란하기 짝이 없는 말대이다.

말대의 혼란을 없애고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낡은 천지를 뜯어고치는 일이 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이다.

 

하늘과 땅이 새롭게 열리는 천지개벽은 완성을 향하여 우주 질서의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구원자가 인위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뜯어고침으로써 가능하다. 혼란한 세상을 종결짓고 신천지를 여는 천지개벽을 증산 상제님은 '천지를 뜯어고침'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개벽은 인간계나 신명계 어느 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명, 천지를 다함께 구원하는 길이었다.

 

 

 

생명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원시반본, 천상의 원신과 지상 인간의 깊은 원한을 끌러내는 해원, 그리고 덕을 베푼 사람과 신명에게, 또 자신의 근본(조상)에 대해 은혜를 갚는 보은, 생명을 살리고 함께 더불어 잘 살자는 상생, 이것이 천지공사의 핵심 정신이며, 생장염장하는 우주의 필연적 과정이 네포한 가을 개벽의 구원사상이다.

 

 

증산 상제님은 신도(神道)를 바탕으로 천상의 위계질서를 바로 잡고, 이 천상의 조화정부를 주재하여 인류구원의 역사를 예정적으로 모사(謨事)하고, 그것을 인간의 실천적 의지에 의해 실현될 수 있도록 성사재인의 바탕을 마련하여 주었다.(謨事在天 成事在人).

 

 

 

 

즉 천지공사는 세계 각 지방신, 세계 각 문명신, 만고역신, 만고원신 등 여러 신을 소집하여 대통일신단을 형성하고 그 통일신단에서 세계의 모든 이념, 이법, 규범, 질서를 공사로써 결정하여 앞으로의 새세계가 이 결정대로 진행되도록 한 천지문명 예정공사이다. 천지공사는 바로 가을 우주 속에서 펼쳐질 인류 미래의 새로운 문명과 역사를 천명으로 예정한 것이다.

 

 

 

『도전道典』에서는 천지공사를 통한 새로운 문명질서에 대해  그 구체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인간의 정치와 역사, 생명뿌리가 처음의 근원적 상태를 철저히 성찰하여 그 참된 본성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원시반본하는 시대, 즉 개벽시대는 이상선경(理想仙境) 시대이다.

 

 

"앞세상은 하늘과 땅이 합덕하는 세상이니라... 후천은 온갖 변화가 통일로 돌아가는"(증산도 도전道典 2:19:3~7) 때이며,  "하늘과 땅이 성공하는 시대" (증산도 도전道典 2:29:5)이며, 

"모든 덕이 근원으로 돌아가는 대인대의(大仁大義)의 세상"(증산도 도전道典 2:18:5),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큰 인존시대"(증산도 도전道典 2:22:1),

"남녀동권시대"(증산도 도전道典 2:53:2)이다.

 

 

 

후천시대의 이상적인 문명상태를 지적한 이러한 구절들은 미래세계의 새 문화는 옛것의 가치를 회복하여 이상적인 상태의 문명, 신문명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즉 신문명을 향한 원시반본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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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nsik's Drink 2014.11.26 0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녀갈께요 ^^ 좋은 오늘이 되셔요~

  2. 아쿠나 2014.11.26 0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 가요 ^^

  3. 한콩이 2014.11.26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4. 뉴론7 2014.11.26 0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증산도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네요 잘보고 감니다

  5. 브라질리언 2014.11.26 09: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수록 빠져들게 되는 글이네요 ㅎㅎ

  6. 비키니짐(VKNY GYM) 2014.11.26 1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유익한 글 잘 보고갑니다 .
    오늘 하루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7. 명태랑 짜오기 2014.11.26 10: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옛문화를 바탕으로 새문화가 창조 되어야 함에 공감이 됩니다.
    잘 보고 갑니다^^

  8. 죽풍 2014.11.26 13: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즐거운 오후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9. 세상속에서 2014.11.26 18: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 소개 잘보고 갑니다.

  10. 유라준 2014.11.27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어려운 내용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3. 후천개벽과 원시반본

3-3. 우주의 가을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3-3. 가을 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

 

 

 

 

 

 

 

 

후천의 가을개벽에 있어서 원시반본 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주가 정역운동을 하게 된다는 환경의 변화만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여름과 가을의 전환의 시기는 자연의 과정이면서 우주의 근본을 찾는 계기가 되지만 "천지의 대덕(大德)이라도 춘생추살(春生秋殺)의 은위(恩威)로써 이루어지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8:62:3) 라는 구절에서처럼 심판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가을 바람이 불면 낙엽이 지면서 열매를 맺는 법이니라. 그러므로 이 때는 생사판단을 하는 때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44:2) 우주의 후천 가을개벽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은 모든 생명존재의 근본 뿌리를 찾는 생명회복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인 심판을 뜻하기도 한다.

 

 

 

 

 

 

 

 

 

 

 

 

"봄과 여름에는 큰 병이 없다가 가을에 접어드는 환절기(煥節期)가 되면 봄여름의 죄업에 대한 인과응보가 큰 병세(病勢)를 불러일으키게" (증산도 도전道典 7:38:3) 된다. 가을의 심판은 병겁으로 온다는 것이다.

 

우주의 가을정신은 생장염장이라는 우주변화과정에서 드러나는 추수의 정신이면서, 삶에 있어서 새로운 살림, 새 생명의 길을 드러내는 구원의 정신이다.

 

 

 

 

 

 

 

 

 

 

 

 

우주의 가을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은 지축이 서는 자연의 거대한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우주의 전환기를 의미하며, 동시에 신도의 차원에서 내려지는 선천의 모든 악업과 죄악의 심판 및 이를 통한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의미하기도 한다. "봄기운은 만물을 싹 틔우고(放), 여름기운은 만물을 기르고(蕩), 가을기운은 성숙케 하는 신(神)이요, 겨울기운은 본체로 환원하는 도(道)이니" 증산도 도전道典 6:124:9)라는 구절에서 가을기운은 신(神)이라고 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신은 가을의 기운으로 우주를 섭리한다는 것이다.

즉 가을의 변화는 신의 섭리가 숙살지기를 띠고 천지에 실현되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가을의 기(氣)는 천지의 주재자인 무극상제의 권능이 열릴 수 있는 신도(神道)로 열려 생명추수의 구원사업이 실현된다는 의미이다(증산도 도전 6:124 각주). 즉 우주론적 후천개벽은 신의 법도로 이루어지는 선천말세의 심판과 우주의 변화원리에서 드러나는 후천가을의 결실이념이 함께 나타내는 말이다.

 

 

 

 

 

 

 

 

 

 

우주의 가을에 천지와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즉 우주론적 원시반본이 내포하고 있는 가을정신은 무엇인가를 우리는 '서신사명(西神司命)'이란 구절에서 더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는 천지성공시대라. 서신이 명을 맡아 만유를 지배하여 뭇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른바 개벽이라. 만물이 가을바람에 혹 말라서 떨어지기도 하고 혹 성숙하기도 함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맺어 그 수(壽)가 길이 창성할 것이요,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할지라."(증산도 도전道典 4:21)

 

 

이 구절은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지만 대신 열매를 맺는 바와 같이 서신, 즉 가을의 신으로서의  우주 주재자가 하추교역의 후천개벽기에 천지의 생명열매를 추수한다는 의미이다(구원과 심판의 신, 추수와 성숙의 신). 이처럼 우주의 가을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은 필연적 과정 속에 내포된 수렴 통일이며, 그 과정을 주재하는 주재자(서신)의 씀(무위이화)이기도 하다.

 

 

 

 

 

 

 

 

 

 

 

우주의 가을도래는 우주가 순환적으로 운행되는 질서 속에서 드러나는 우주의 섭리과정이다.

지구의 4계절이 1년의 필연적 과정인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우주론적 원시반본은 곧 지축의 정립을 통해 천지자연의 환경이 바뀌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분열성장한 만물의 모습을 수렴하고 통일하는 전환점을 통과하게 된다.

 

 

전환점은 심판의 전환점이면서 구원의 전환점이다.

그래서 천지가 성공하고 선천의 원과 한이 해소되는 이 시기를 증산 상제님은 원시반본하는 시대라고 했던 것이다.

가을 심판의 이때에 모든 것이 근본을 되찾아야 하는 필연성과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증산도에 의하면 묵은 하늘이 빚은 무도와 죄악은 우주면화의 원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후천가을에 그 적나한 모습이 드러나고, 이는 신의 준엄한 심판에 의해 의통과 구원의 갈림길을 맞이하게 된다.

후천의 병겁은 바로 죽음의 심판이면서 동시에 살림의 새길이다.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봄으로부터 이 땅위에 있는 모든 큰 겁재를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만은 그대로 두고 너희들에게 의통을 붙여 주리라." (증산도 도전道典 7:33:6~7)는 구절은 가을 개벽기 신의 심판의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때는 바로 생사를 판단하는 때"(증산도 도전道典 2:44:3)인 것이다.

천지성공시대에 "신위(神威)를 떨쳐 불의를 숙청(肅淸)하며, 혹 인애(仁愛)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증산도 도전道典 4:21:6)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병겁과 의통을 통한 증산도의 구원관이 갖는 사랑과 정의의 또 다른 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증산 상제님은 이러한 가을의 기운을 다음과 같이 시로써 표현하고 있다.

이 시는 증산 상제님이 어렸을 때 지은 시이다. "운수가 오면 무거운 돌도 산이 멀어도 관계없고 잘 깍은 방망이로 세상을 다듬질하니 고목된 가을이구나!"(증산도 도전道典 8:44:3) 이는 가을 운수가 될 때 증산 상제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교화하여 심판하니 죄와 악업은 낙엽이 지듯 정리되고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후천개벽의 가을정신을 압축적으로 풀어낸 이 시에서 우주 1년의 과정에서 자연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우주의 변화와 그 변화의 정신을 통찰할 수 있다.

 

 

 

이 때는 "우주 자연의 철바꿈의 대전환 시대"(안경전 증산도 진리)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을의 정신을 이해하고 가을철에 인간의 역할을 철저하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천하의 대세를 알고 있는 자는 살 기운이 있고, 천하의 대세에 눈 못 뜨는 자에게는 천하의 죽을 기운밖에는 없을"

(증산도 도전道典 5:347:12) 것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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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25 06: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오늘도 잘 보고 가요 ^^

  2. 청결원 2014.11.25 0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3. Hansik's Drink 2014.11.25 07: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행복 가득한 하루를 보내세요~

  4. 죽풍 2014.11.25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은 결국 심판을 뜻한다.
    가을기운은 성숙케 하는군요.
    사계절 중 가을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5. 뉴론7 2014.11.25 0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감니다 좋은하루되세요

  6. 비키니짐(VKNY GYM) 2014.11.25 09: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덕분에 좋은 글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화요일 하루 되세요^^

  7. 브라질리언 2014.11.25 0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만물에 대해 하나 더 알아가는 기분이네요

  8. 주부s 2014.11.25 09: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9. 한콩이 2014.11.25 10: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하루되세요~

  10. 명태랑 짜오기 2014.11.25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주의 가을 기운을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11. 세상속에서 2014.11.25 13: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잘보고 갑니다^^

  12. 천추 2014.11.25 14: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에 대해서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13. 카푸리오 2014.11.25 15: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심오한 것이 우주요, 인간인 듯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시길요~

  14. 광주랑 2014.11.25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광주공식블로그 광주랑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광주랑 블로그에도 한번 들러주세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15. 반이. 2014.11.25 1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16. With E 2014.11.25 2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점점 방문자가 늘어가고 있는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함께 성장하는 블러거가 되면 좋겠습니다ㅎㅎ

  17. 리뷰맨77 2014.11.25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저도 언젠가는 깨닫겠죠^^

  18. 유라준 2014.11.25 23: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주일년이 정말 장엄하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3. 후천개벽과 원시반본

3-2. 우주론적 원시반본과 상제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3-2. 우주론적 원시반본과 상제

 

 

후천개벽의 근본정신은 우주의 주재자가 우주자연의 새로운 운행질서를 마련함으로써 모든 존재들이 그 존재근원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과 동시에 준엄한 추살(秋殺)의 심판을 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 근본정신을 다르게 표현하여 원시반본이라 한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우주론적 원시반본은 하추교역기에 우주의 질서가 정역운동을 하게 되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그것을 통해 우주 주재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증산도 『도전道典』의 여러 구절에서 우리는 우주변화라는 것은 우주의 주재자에 의해 주어지는 필연적이면서 절대적인 원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 절에서도 인용한 "내가 천지를 주재하여 다스리되 생장염장의 이치를 쓰나니 이것을 일러 무위이화라 하느니라"(증산도 『도전道典』 4:58) 라는 구절은 우주변화의 원리를 주재의 결과와 동일시하는 내용이며,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이르나니 내가 천지를 돌려놓았음을 어찌 알리요" (증산도 『도전道典』 4:152) 라는 구절은 천지의 운행은 바로 주재자의 주재 권능의 표현임도 알 수 있다.

 

 

 

 

 

 

 

 

 

 

 

 

"이치가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이치니" (증산도 『도전道典』 4:111)

자연의 이법을 통해서 상제를 인식하고, 그 존재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후천개벽이라는 우주변화, 생장염장이라는 우주 1년의 질서는 궁극적으로 우주의 절대적 주재자로서의 무극상제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자연의 원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가을전환기는 서신(西神)으로서의 우주 절대자의 필연적 역사섭리를 실재적으로 보여준다.

 

 

영국의 주관적 관념론자인 조지 버클리는 '존재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서부터 '존재라는 모든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는 대답을 내린다. 그러나 이러한 대답은 다음의 결론을 위한 첫 단계이다. 그의 마지막 결론은 '신은 존재한다'이다.

 

 

 

그렇다면 버클리는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그의 철학적 논증을 거울삼아 우주론적 원시반본을 통해 우주 주재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버클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사물들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물음이 아니라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물음이다. 그 물음의 결론은 우리가 감각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각하지 않는 존재자들의 존재성을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되묻는다.  

 

 

 

 

 

 

 

 

 

 

 

 

버클리에게 있어서 한 송이의 장미는 우리의 감각사실의 종합 이외의 다름이 아니다. 즉 장미는 우리에게 감각된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의 존재성을 감각된 것과 감각된 것의 종합, 즉 관념을 한정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모든 사물들은 우리에게 감각된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의 세계는 감각된 세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문제는 내가 지각하지 않는 사물들의 존재성이다. 즉 대전에 있는 나에게 서울의 63빌딩이나 백두산 천지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과연 어떻게 존재하는가?  철학자이면서 신학자인 버클리에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절대적 지각자가 있다는 것이다. 즉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은 영원하며 절대적인 지각자로서 존재하며, 그러므로 내가 잠잘 때 사물들이 사라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이 명백한 상식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하나의 이유이다. 만약 우리가 물질적 사물들의 존재와 본성에 대한 상식적 견해를 가진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될 것이다.

 

 

 

 

 

 

 

 

 

 

버클리에게 있어서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사물들이 형이상학적 실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그 결과 버클리는 독단적 관념론자란 이름을 얻었지만 대신 신의 존재 확실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사물이 존재하므로 신이 존재한다는 추리가 아니라 오히려 신이 존재하므로 사물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추리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감각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물들은 바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클리의 결론은 현상론(現象論)이 유신론(有神論)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우주론적 원시반본에서 후천개벽이라는 개벽현상은 우주 통치자로서의 상제의 주재가 필연적 사실임을 수반한다. 앞 절에서 설명한것처럼 우주 일년의 순환은 역학자들에게 의해 자연의 섭리로 설명되었으며, 논자는 우주 주재자의 무위이화의 현현으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버클리의 신존재 증명의 방식을 차용하여 우주 주재자로서 상제의 존재확인을 우주론적 원시반본의 의의라고 규정해볼 수 있다. 후천개벽을 통해서 우주 주재자가 있다는 것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의 절대적 주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후천개벽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후천개벽을 통해 우주가 새로운 존재상태, 정역운동을 하게 되는 것은 우주의 절대적 주재자가 존재함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의 통치자를 알려 할 때는 그가 주재하는 우주의 법도, 즉 우주가 변화해 가는 원리를 캐보면 그 신비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주론적 원시반본은 우주가 가을 개벽기를 맞이하여 본래의 존재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러한 우주의 변화를 통찰 이해함으로써 그 변화의 근거로서의 절대자의 존재를 확인함이다.

 

이는 도의 근원을 찾아감이며, 우주의 존재 근원을 드러냄이며, 상제문화로서의 복귀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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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21 06: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상제 우주론 흥미롭네요 ㅎㅎ

  2. 청결원 2014.11.21 07: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3. 뉴론7 2014.11.21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은 좋은데 이해하기 쉬웠으면 좋겠습니다

  4. 천추 2014.11.21 10: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주론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5. 주부s 2014.11.21 10: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6. 브라질리언 2014.11.21 1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차크라투스가 생각나는 말들이네요 ㅎㅎ

  7. 세상속에서 2014.11.21 14: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잘보고 공감합니다.

  8. 유라준 2014.11.21 22: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주 일년이 129,600년이라... 정말 엄청나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증산도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3. 후천개벽과 원시반본.

 

3-1 우주론적 원시반본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3. 후천개벽과 원시반본

 

 

증산도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유한 사상은 '개벽(開闢)'과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이 장에서의 논의는 구원의 우주론적(宇宙論的)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후천개벽과 원시반본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선천개벽과 대비된 의미로서의 후천개벽은 트게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되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지축이 바로서는 우주론적 현상으로서의 개벽이고, 다른 하나는 신도(神道)의 차원에서 수행되는 천지공사(天地公事)로서의 개벽의 의미이다.

이 두가지 개벽의 근본 정신은 모두 원시반본사상으로 고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 다루려는 것은 전자가 가지는 우주론적 의미이다.

 

 

"천지와 인간을 새 질서로 개벽시켜 통일하는 새 창조의 근본정신은 바로 가을 우주개벽의 원시반본 정신이다."

(안경전 『증산도의 진리』)

 

 

 

 

 

           

 

 

 

 

 

 

이 말은 원시반본사상이 후천개벽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뜻한다.

후천개벽은 자연과 인간과 신명(神明)이 무극의 통일자리로 반본하여 후천성경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우주적 변화이며, 이는 절대자의 무위이화적(無爲以化的) 주재(主宰)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후천개벽을 함으로써 원시반본사상은 현실적 실재성을 갖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1. 우주론적 원시반본

 

후천개벽의 당위성은 우주 1년의 질서 속에서 드러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증산도의 우주관은 천지자연의 변화를 직선적 과정이 아닌 순환적 과정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우주의 운동은 일정한 싸이클을 반복하여 순환하게 되는데 그 한 싸이클을 우주 1년이라고 한다.

 

 

우주 1년의 기간은 129,600년이다. 또한 우주 1년은 생장염장의 과정,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규칙적 과정으로 이루어진다.(한동석 『우주변화의 원리』)

 

 

 

 

 

 

 

 

 

 

 

 

우주일년의 과정에서 봄여름의 선천시대가 끝나면 필연적으로 가을의 추수기가 돌아온다.

"지금은 온 천하가 가을 운수의 시작으로 들어서고"(증산도 『도전道典』 2:43:1) 있다. 그러나 후천개벽이 우주자연의 법칙에 의한 필연이라고 하더라도 개벽을 통해 바로 후천선경이 열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는 인간의 실천적 측면과 함께 후천선경의 한 조건으로 이해된다.

 

 

 

후천 가을 개벽 시기에 천지자연의 운행도수(運行度數)는 정역(正易)의 궤도를 갖게 된다.

이는 자연의 필연적 과정이면서 우주 주재자의 무위이화적 주재의 결과이다. 그러한 정역운동은 천지자연의 환경을 변화시켜 인류의 구원과 후천선경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후천 우주가 정역운동을 하게 되는 것은 우주론적 측명에서의 후천개벽이란 말로 표현되며, 이는 상극(相克)이치에서 생명의 총체적 살림의 근본인 상생(相生)이치로 전이되는 이치의 변화를 동반한다.

 

 

 

 

 

 

 

 

 

 

 

 

증산도에서의 '개벽(開闢)'이라는말은 만물의 존재기원, 존재원인, 존재근거를 우주론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이 '문득' 열리니라."(증산도 『도전道典』 1:1:1)는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개벽이다.

 

 

개벽된 우주는 무위이화로 변화 순환하는 과정, 즉 생장염장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러한 우주의 전과정과 함께 하는, 즉 우주의 변화를 주재하는 주재신(主宰神)을 상제(上帝)라고 한다. 상제는 우주의 이법적 주재자로 존재한다.

 

 

 

우주 통치의 근본원리

1 대저 천하사를 함에 때가 이르지 않아서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음해가 적지 않나니

그러므로 나는 판밖에서 일을 꾸미노라.

2 나의 일은 무위이화(無爲以化)니라.

3 신도(神道)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니라.

신도로써 만사와 만물을 다스리면 신묘(神妙)한 공을 이루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니라.

4 내가 천지를 주재하여 다스리되 생장염장(生長斂藏)의 이치를 쓰나니 이것을 일러 무위이화라 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58)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우주의 과정은 생장염장의 순환적 운행을 하며, 그 필연적 질서의 드러남은 절대자의 무위이화의 주재함이다.태시(太始)에 문득 개벽(開闢)된 우주는 과정(過程)으로 존재하며, 이 과정은 선천(先天)개벽과 후천(後天)개벽을 반복하면서 순환한다.

 

여기서 선천개벽이 우주 자연이 생성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천개벽은 천지자연의 운행질서와 존재질서가 원래의 근본자리로 수렴 통일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의 글은 우주운동이 후천개벽을 통해 원시반본하게 되는 필연성을 잘 밝혀주고 있다.

 

 

 

 

 

 

 

 

 

 

"어찌해서 이런 원시반본이 이 때에 와서 비롯되는 것이냐 하는 데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작게 보면 거의 이해될 수 없는 것이나 이를 역리(역리)상으로 보면 설명될 수 있게 된다. 첫째는 지금까지 많은 역학자(역학자)가 말하고 특히 정역(정역)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역의 생출(생출)시대 곧 생역(생역)시대와 정역(정역)시대가 이제 다 끝나서 역(역)의 완성 곧 정역(정역)시대가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배용덕 외 1990년 증산사상논문집 中)

 

 

 

이 글은 원시반본이 우주자연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고 있으며, 역학의 논리적 관점에서 그것이 정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우주자연의 원시반본은 우주자연의 섭리이며 본성이다. 이러한 섭리와 본성은 우주자연의 필연적 과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후천개벽은 필연적 과정이면서 주재(主宰)의 결과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성구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천지대세의 바탕을 돌려 놓으심

1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이르나니 내가 천지를 돌려놓았음을 세상이 어찌 알리요

2 나는 서신사명(西神司命)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152)

 

 

 

 

 

 

 

 

 

 

 

즉 공부하는 역학자들이 밝혀놓은 섭리와 원리는 기계적 필연이 아니라 우주 주재자의 무위이화라는 것이다.

여기서 천지를 돌려놓았다는 것은 우주자연의 운행질서를 새롭게 함을 의미한다. 즉 선천의 운행질서와는 다른 궤도, 즉 정역(正易)운동을 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적 과정은 기계적 필연성이 아니라 주재적 필연성이다.

 

 

다시 말하면 후천개벽을 통한 원시반본은 필연적 과정이면서 우주통치자의 의지의 주재결과이다. 이 양자는 우주의 동일한 현상적 과정이면서, 구분된 의미로 해석된다. '주재'라는 개념과 '쓴다'는 개념과 '무의이화'란 개념은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그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주재한다거나 이치를 쓴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의지적 행위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생장염장은 우주의 필연적 과정(우주적 이치)이면서 또한 주재자의 주재의지가 무위이화로 드러남이다.

이를 우주론적 원시반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주론적 원시반본은 우주의 가을의 필연적 도래를 의미하며, 동시에 우주 주재자의 무위이화로써 가을의 신의(神義)를 뜻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주론적 원시반본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더 나아가 생명의 살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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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20 0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원시반본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께
    좋은 글이군요~ 저도 잘보고 가구요 ^^
    존 하루되세요 ^^

  2. 뉴과장 2014.11.20 08: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날씨가 쌀쌀하네요 좋은하루되세요

  3. 죽풍 2014.11.20 08: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소중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

  4. 주부s 2014.11.20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ㅎㅎ

  5. 카푸리오 2014.11.20 10: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끔은 우주와 사람의 원리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6. 생명마루한의원 2014.11.20 1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 잘보고갑니다~
    추운날씨 감기조심하세요^^

  7. 브라질리언 2014.11.20 11: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긴시간이네요 ㅠㅠ

  8. 명태랑 짜오기 2014.11.20 1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개벽과 원시반본에 관하여 잘배우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9. 한콩이 2014.11.20 13: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

  10. 에릭123 2014.11.20 1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가요~~ 즐거운 하루되세요~~!!

  11. 세상속에서 2014.11.20 15: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 원시반본 포스팅 감사히 봤습니다.

  12. 유라준 2014.11.20 22: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순환이 중요한 것 같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3. 반이. 2014.11.20 23: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_^

  14. 리뷰맨77 2014.11.21 0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증산도 원시반본에 대해서 공부 잘하고 갑니다^^

  15. 여행쟁이 김군 2014.11.21 03: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당^^
    편안한 밤 되시길~^^

증산도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과 개벽

 

 

 

1. 서론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유철 박사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 1.서론

 

우리가 사는 우주는 직선적인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운동을 한다.

우주 순환의 1주기를 우주 일년이라고 하고 우주 일년은 생장염장(生長斂藏,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과정을 갖는다. 하늘과 땅이 개벽된 이래 우주는 선천개벽과 후천개벽의 순환으로 만물을 낳고 기르며 추수하고 휴식기에 들어가는 과정을 되풀이하여 왔다.

 

 

 

우주의 봄이 되면 따뜻한 하늘기운이 지상을 내쳐 만물을 소생케 하고, 여름기운은 땅이 이를 받아들여 강렬하게 성장시키며, 가을이 되면 신(神)의 심판으로 결실이 이루어지며, 겨울에는 생(生), 장(長), 성(成)의 분열성장운동을 종결하고 생명의 근본자리로 돌아가 휴식기에 접어든다. 이러한 우주관은 역학(易學)에 의해 원리적으로 논증되었으며, 증산도의 모든 진리는 우주론적 원리를 떠난다면 정확히 해명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우주의 1년 시간대에서 지금은 선천(봄 여름)과 후천(가을)이 교체하는 하추교역기이다. 증산 상제님은 하추교역하는 이 때를 '천지개벽시대', '해원상생시대', '천지성공시대'라고 표현한다.

이는 한마디로 이 때는 바로 원시반본하는 시대임을 선언한 것이다.

 

 

 

우주의 가을개벽은 우주변화의 원리 측면에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섭리이다. 이러한 가을개벽의 근본정신을 증산 상제님은 원시반본(原始返本)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주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후천개벽은 우주의 필연적 질서이며, 이는 또한 신도(神道)의 측면에서 집행되는 심판의 과정이며, 인간의 실천에 의해 실현되는 선견(仙境)의 완성과정이다.

 

 

 

 

 

 

 

 

 

 

후천개벽의 근본정신 혹은 방향이 바로 원시반본이다.

지금은 원시반본 하는 때라는 것은 후천개벽의 때라는 것이며, 모든 것이 그 근본뿌리로 돌아가는, 돌아가야 하는 때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선천은 상극의 이치가 지배하였고, 따라서 모든 것이 근본을 이탈하여 천지자연은 병들고, 인간은 무도(無道)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원시반본정신에 의해 근본과 뿌리를 찾지 못하는 자는 다 죽음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증산 상제님의 말씀은 이 시대가 당면한 절박한 개벽의 때를 밝힌 것이다.

 

 

논자는 증산 상제님의 우주적 진리를 개벽과 원시반본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논할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가진 증산 상제님은 인간의 구원을 철두철미 고민하였으며, 신(神)의 권능을 가진 증산 상제님은 천지를 뜯어고치는 개벽장으로서 후천선경의 실상을 마련하였다.

 

 

 

우주의 순환에 따라 열리는 새 판에서 선천의 병든 생명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가을의 숙살기운으로 진멸할 따름이다. 이때에 증산 상제님은 인간으로 강세한 것이다. 우주의 틀바꿈으로 바로 모든 병든 것을 죽임이며, 그 죽음은 새로운 살림의 길이다. 증산 상제님이 말하는 원시반본은 바로 우주가을의 숙살지기에서 다시 살림의 길을 여는 것이다.

 

 

 

 

 

 

 

 

 

 

원시반본은 우주의 가을정신이다.

우주의 변화로서의 원시반본이며, 문명의 변화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이며, 생명의 근본을 찾는 원시반본이다.

증산 상제님의 강세 이유는 바로 원시반본정신에 의해 후천개벽을 집행하고, 인류를 선천의 무도세계(無道世界)로부터 구원하고, 후천 선경세계를 만들기 위함이다. 논자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생명사상, 구원의 진리인 증산도의 원시반본사상(原始返本思想)이 갖는 개벽적 의미이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다시 새롭게 된다"(증산도 도전道典 2:13:5)는 증산 상제님의 말씀은 원시반본사상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원시반본에서 중요한 것은 본(本)이다.

본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된다. 민족의 뿌리, 생명의 근원, 도(道)의 근원, 우주자연의 근원, 창조의 본질, 인간의 본성 등등.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갖는 본(本)에로 반(返)하는 것이 원시반본이다.

 

 

원시반본은 현대의 위기를 낳은 선천질서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이상적 가치이념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위기의 원인을 우주자연의 원리 측면에서 고찰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기술주의와 합리적 도구주의로 드러나는 위기현상뿐만 아니라 자연의 상극구조(相克構造)로 인한 위기의 궁극적 근원을 해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원시반본이념은 상극의 질서를 끝맺는 구원의 절대정신이며, 가을개벽의 생명원리이다

 

 

 

 

 

 

 

 

 

이 글에서 논자가 가지고 있는 궁극적 관심은 바로 원시반본사상과의 구원정신(救援精神)이다.

즉 우주자연의 상극질서가 상생질서로의 전이 및 인간과 문명의 존질적 가치질서의 회복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연과 인간을 위한 새로운 생명세계는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중요한 것은 원시반본은 단순히 처음의 근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전환기, 천지자연의 환절기, 역사의 교체기에서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이상적인 상태의 현실화를 의미한다. 즉, 원시반본은 천지성공시대를 여는 근원적 실현방안이다.

 

 

 

 

 

 

 

 

 

 

우주자연은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1년의 순환질서를 포함하고 있고, 그 순환 속에서 인간과 자연은 지속적 운명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추교역기라는 극적 순간을 맞이한다. 그 극적 순간에 자연과 문명과 역사의 질서는 총체적 변국(총체적 개벽)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한 전환의 포인트는 인간의 심판과 구원에 있어서 필연적 과정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원시반본은 인간의 구원과 이상세계의 실현을 위해 무엇이 필연적이고, 무엇이 당위적이어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절대이념이라는 측면에서 한편으로는 천지개벽의 핵심정신이며, 동시에 이와 유비(類比)될 수 있는 정신개벽, 도덕개벽, 문명개벽의 기본방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자는 이러한 원시반본을 우주론적 측면과 문명개벽, 그리고 마음개벽(인간개벽)의 측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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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18 0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에 대해서 잘보고 가요 ^^
    사상과 개벽 언제 들어도 좀 어려운듯 ㅎㅎ

  2. 반이. 2014.11.18 09: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3. 한콩이 2014.11.18 0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4. 뉴과장 2014.11.18 10: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생님은 머하시는 분이실까요

  5. 브라질리언 2014.11.18 10: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본 이라는 말이 맘에 와 닿네요 ㅎㅎ

  6. 생명마루한의원 2014.11.18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블로그 잘보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

  7. 비키니짐(VKNY GYM) 2014.11.18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덕분에 유익한 글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8. 명태랑 짜오기 2014.11.18 13: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에 관하여 많이 배우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9. 주부s 2014.11.18 14: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에 대해 잘 알아 갑니다~^^

  10. 죽풍 2014.11.18 14: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부안 출장 길에 잠시 짬을 내어 들렀다 갑니다.
    오후 시간도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11. 세상속에서 2014.11.18 15: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
    잘보고 갑니다. 수고하세요.

  12. 리뷰맨77 2014.11.18 2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증산도의 원시반본 사상과 개벽..저한테는 좀 어렵네요..^^

  13. 귀여운걸 2014.11.19 00: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으로 유익하고 좋은 말씀이시네요..
    덕분에 증산도에 대해 많이 배워갑니다^^

  14. 유라준 2014.11.19 0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순환이라... 심오하면서도 어려운 개념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5. 여행쟁이 김군 2014.11.19 0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금은 어려운 말이 많은데!
    그래도 좋은 말이 많은것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꿈 꾸시길 바래요!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7) 증산도의 양가적 사유방식 '양전兩全'의 논리

(증상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증산도의 사상은 한국지성사에서 볼 때 매우 놀랄만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증산도 사상이 한국사상에서 그 뿌리가 깊은 저항의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우주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이념을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증산도 사상의 창조적 이념은 어떤 사유방식의 틀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증산도 사상의 특성은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증산도의 사상은 양극단으로 대립되는 두 가지 사상을 하나로 융합함으로써 새로운 우주문명을 창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형효교수는 이런 증산도의 양가적 사유방식을 몇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해명하고 있다.

(김형효, 『원시반본과 해원사상에 대한 철학적 성찰』 - 증산사상 연구 논문집 中)

 

 

 

 

 

  

 

 

 

 

 

 

첫째, 증산도의 사상은 충효사상을 부정하면서도 충효사상을 긍정하고 있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자.

 

 

 

그릇된 도덕 관념이 현실을 마비시킬 때

 

1 기유년에 하루는 어느 지방에서 ‘젊은 부인이 남편 상(喪)을 당한 뒤에 순절(殉節)하였다.’ 하거늘

2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악독한 귀신이 무고히 인명을 살해한다.” 하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이러하니라.

3 忠孝烈은 國之大綱이라

   충효열    국지대강

然이나 國亡於忠하고 家亡於孝하고 身亡於烈하니라

연       국망어충        가망어효       신망어열

 

충효열은 나라의 큰 기강이니라.

그러나 나라는 충(忠) 때문에 망하고

집안은 효(孝) 때문에 망하며

몸은 정렬(貞烈) 때문에 망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135)

 

 

 

증산 상제님께서는 충효열이 국가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충효열이 도리어 나라와 집안과 몸을 망치게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증산도 사상이 유가의 충효 사상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증산도 사상은 서양 문명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긍정한다.

 

 

신명을 박대하는 서교의 운명

5 서교(西敎)는 신명을 박대하므로 성공치 못하리라.

6 이는 서양에서 신이 떠난 연고니라.

7 구천에 사무치는 ‘시~’ 소리에 서양이 덜덜 떠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48)

 

 

 

마테오 리치 대성사의 큰 공덕

1 이마두(利瑪竇)는 세계에 많은 공덕을 끼친 사람이라. 현 해원시대에 신명계의 주벽(主壁)이 되나니 이를 아는 자는 마땅히 경홀치 말지어다.

2 그러나 그 공덕을 은미(隱微) 중에 끼쳤으므로 세계는 이를 알지 못하느니라.

3 서양 사람 이마두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 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積弊)를 고쳐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4 다만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地境)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5 그가 죽은 뒤에는 동양의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6 이로부터 지하신(地下神)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 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 주어

7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교한 기계를 발명케 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나니 이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이라.

8 서양의 문명이기(文明利器)는 천상 문명을 본받은 것이니라.

9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事理)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殘暴)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10 신도(神道)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三界)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증산도 도전道典 2:30)

 

 

 

 

 

 

 

 

 

 

 

 

셋째, 증산도 사상은 동학에 대해 양가적 태도를 취한다.

 

 

동학군의 패망을 예고하심

1 그 해 7월 어느 날 밤에 불을 밝히지 않고 홀로 앉으시어 깊은 명상에 잠기시니라.

2 이 때 조화로 충만한 천지의 원신(元神)을 열고 삼매에 드시어 동학군의 운명을 예시하는 옛 시 한 수를 읽으시니 이러하니라.

3 月黑雁飛高하니 單于夜遁逃라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

欲將輕騎逐할새 大雪滿弓刀라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

어두운 달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선우가 밤을 타서 도망하는구나.

경기병 이끌고 뒤쫓으려 할 적에

큰 눈 내려 활과 칼에 가득하도다.

4 이 글로써 사람들에게 동학군이 겨울에 이르러 패망할 것을 일러 주시며 “동학에 들지 말라.”고 권유하시더니

5 과연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매 이 말씀을 순종한 사람은 무사히 화를 면했으나 듣지 않고 종군한 자는 모두 죽음을 당하니라.

6 증산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이 모두 증산을 일컬어 말하기를 “신인(神人)이라.” 하고 “공부 않고 날 때부터 아는 사람이라.” 하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53)

 

 

 

인간으로 내려오신 천주님

9 동학 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10 내가 천지를 개벽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인간과 하늘의 혼란을 바로잡으려고 삼계를 둘러 살피다가

11 너의 동토에 그친 것은 잔피(孱疲)에 빠진 민중을 먼저 건져 만고에 쌓인 원한을 풀어 주려 함이라.

12 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니 이것이 참동학이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3:184)

 

 

 

 

 

 

 

 

 

 

 

 

넷째, 증산도 사상은 동양사상의 전통적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해서도 양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란 인간이 못할 일이니, 나는 만물을 해원시키노라.”

(증산도 도전道典 11:220)

 

 

공자와 맹자의 기운을 거두심

1 상제님께서 하루는 큰 소리로 공자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공자야, 네가 천추(千秋)에 대접을 받았으니 내 세상에는 그 녹(祿)을 끊으리라.” 하시더니

2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네가 간절히 비는 고로 물밥은 내려 주리라.” 하시니라.

3 이어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천하에 공자 신명이 머물 만한 땅이 없게 되었느니라.” 하시고

4 다시 큰 소리로 맹자를 부르시어 “맹자야, 이 역적놈아!” 하고 꾸짖으시니라.

5 이에 한 성도가 여쭈기를 “맹자를 역적이라고 꾸짖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6 말씀하시기를 “마음속에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있다면 임금을 임금 같지 않게 볼 수가 있겠느냐.

7 신하가 임금을 원수같이 보았으니 내쳐도 무방하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46)

 

 

선천 성인 심판 공사

1 이 날 오후에 약방 마당에 멍석을 깔고 상제님께서 그 위에 반듯이 누우시어 치복에게 “새 자리를 그 앞에 펴라.” 하시거늘

2 치복이 명하신 대로 멍석을 가져다 펴니 상제님께서 허공을 향해 준엄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

“꼼짝 마라. 오늘은 참 성인을 판단하리라.” 하시고

3 문 앞에 세워 두었던 기(旗)를 가져다 불사르게 하시니 뜻밖에 벽력이 일어나니라.

4 이 때 상제님께서 큰 소리로 명하시기를 “공자(孔子) 부르라.” 하시니 성도들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거늘

5 다시 “어서 공자를 부르지 못할까!” 하고 호통치시매 성도들이 놀라서 엉겁결에 “공자 잡아 왔습니다.” 하는지라

6 상제님께서 “불러 오라 하였지 잡아 오라 안 했는데 너무했다.” 하시고 “너희들은 눈을 감고 보라.” 하시므로

7 성도들이 눈을 감고 보니 뜻밖에 펼쳐 놓은 자리에 공자가 무릎을 꿇고 “공자 대령했습니다.” 하고 아뢰더라.

8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공자야, 네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으니 어찌 인(仁)을 행하였다 하며, 삼대(三代) 출처(黜妻)를 하였으니 어찌 제가(齊家)하였다 하리오.

9 또한 내 도(道)를 펴라고 내려 보냈거늘 어찌 제자들을 도적질 해먹게 가르쳤느냐. 그 중생의 원억(寃抑)을 어찌할까. 그러고도 성인이라 할 수 있느냐!

10 너는 이곳에서 쓸데없으니 딴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고 큰 소리로 “저리 물리쳐라.” 하시니라.

11 이어 “석가(釋迦)를 부르라.” 하고 명하시니 즉시 석가모니가 “대령했습니다.” 하고 꿇어앉아 아뢰거늘

12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석가야, 너는 수음(樹陰) 속에 깊이 앉아 남의 자질(子姪)을 유인하여 부모의 윤기(倫氣)와 음양을 끊게 하니

13 너의 도가 천하에 퍼진다면 사람의 종자나 남겠느냐. 종자 없애는 성인이냐?

14 네가 국가를 아느냐, 선령을 아느냐, 중생을 아느냐. 이런 너를 어찌 성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도 이곳에서 쓸데없으니 딴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고 “이 자도 물리쳐라.” 하시니라.

15 상제님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야소(耶蘇) 부르라.” 하시니 즉시 예수가 꿇어앉아 “대령했습니다.” 하고 아뢰거늘

16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야소야, 너를 천상에서 내려 보낼 적에 내 도를 펴라 하였거늘 선령을 박대하는 도를 폈으니 너를 어찌 성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17 네가 천륜을 아느냐 인륜을 아느냐. 너는 이곳에서 쓸데없으니 딴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고 큰 소리로 “이 자를 물리쳐라.” 하시니라.

너희들 모두 나의 도덕 안에서 살라

18 이어서 “노자(老子)를 부르라.” 하시니 즉시 노자가 “대령했습니다.” 하매

19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노자야, 세속에 산모가 열 달이 차면 신 벗고 침실에 들어앉을 때마다 신을 다시 신게 될까 하여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생각이 든다 하거늘

20 ‘여든한 해를 어미 뱃속에 머리가 희도록 들어앉아 있었다.’ 하니 그 어미가 어찌 될 것이냐.

21 그런 불효가 없나니 너는 천하에 다시없는 죄인이니라.

22 또한 네가 ‘이단(異端) 팔십 권을 지었다.’ 하나 세상에서 본 자가 없고, 나 또한 못 보았노라.

23 그래도 네가 신선(神仙)이냐! 너도 이 세상에서 쓸데없으니 딴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며 큰 소리로 “당장 물리쳐라.” 하시니라.

24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또 명하시기를 “공자, 석가, 야소, 노자를 다시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모두 대령하거늘

25 말씀하시기를 “들어라. 너희들이 인간으로서는 상 대우를 받을 만하나 너희들의 도덕만 가지고는 천하사를 할 수가 없느니라.

26 너희들의 도덕이 전혀 못쓴다는 말은 아니니 앞으로 나의 도덕이 세상에 나오거든 너희들 모두 그 안에서 잘 살도록 하라.

27 나의 말이 옳으냐? 옳으면 옳다고 대답하라.” 하시며 소리치시니 천지가 진동하여 문지방이 덜덜 떨리더라.

28 상제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수천 년 밀려 오던 공사를 금일에야 판결하니 일체의 원억이 오늘로부터 고가 풀리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10:40)

 

 

선천 종교의 종장을 교체하시고 종교문화를 통일하심

1 선도와 불도와 유도와 서도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근원이 되었나니

2 이제 최수운은 선도의 종장(宗長)이 되고

3 진묵은 불도의 종장이 되고

4 주회암은 유도의 종장이 되고

5 이마두는 서도의 종장이 되어 각기 그 진액을 거두고

6 모든 도통신(道統神)과 문명신(文明神)을 거느려 각 족속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의 정수(精髓)를 뽑아 모아 통일케 하느니라.

7 이제 불지형체(佛之形體) 선지조화(仙之造化) 유지범절(儒之凡節)의 삼도(三道)를 통일하느니라.

8 나의 도(道)는 사불비불(似佛非佛)이요, 사선비선(似仙非仙)이요, 사유비유(似儒非儒)니라.

9 내가 유불선 기운을 쏙 뽑아서 선(仙)에 붙여 놓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8)

 

모든 문화의 진액을 뽑아 모으심

3 모든 족속들이 각각 색다른 생활 경험으로 유전된 특수한 사상으로 각기 문화를 지어내어 그 마주치는 기회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큰

시비를 이루나니

4 그러므로 각 족속의 모든 문화의 진액을 뽑아 모아 후천문명의 기초를 정하느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4:18)

 

 

 

 

 

 

 

 

 

 

다섯 째, 증산도의 사상은 최익현에 대한 평가도 양가적이다.

즉 최익현의 우국충정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은 죄를 비판한다.

 

 

최익현의 의병 기운을 거두심

1 병오년 윤4월에 상제님께서 형렬과 성도들을 데리고 만경으로 가시니라.

2 이 때 최익현(崔益鉉)이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거늘

3 때마침 날까지 가물어 인심이 흉흉하여 의병에 가입하는 자가 날로 늘어나매 그 군세를 크게 떨치니라.

4 이에 상제님께서 수일 동안 만경에 머무르며 말씀하시기를 “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어 그 대죄(大罪)가 그의 몸에 붙어 있노라.

5 장차 백성들이 어육지경이 되리니 이는 한갓 민생을 해칠 따름이니라.” 하시니라.

6 이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큰비가 쏟아져 여러 날 계속되니 의병의 기세가 크게 약해지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137)

 

 

그 재질이 대사를 감당치 못하므로

1 상제님께서 최익현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만경을 떠나 익산 만중리(益山 萬中里)로 가시며 말씀하시기를

2 “이번에 최익현의 동함으로 인하여 천지신명이 크게 동(動)하였나니 이는 그 혈성에 감동된 까닭이니라.

3 그러나 그 재질이 부족하여 대사(大事)를 감당치 못할 것이요

4 일찍 진정시키지 않으면 온 나라가 참화를 입어 무고한 창생만 사멸에 빠뜨릴 따름이라.

5 더욱이 이번 한해(旱害)를 물리치지 않아 기근까지 겹치면 생민을 구제할 방책이 전무하여 실로 양전(兩全)치 못하리니 내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리오.

6 그러므로 내가 공사로써 진압하였노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138)

 

 

최익현의 명줄을 거두심

1 이 때 한 성도가 여쭈기를 “최익현이 국난으로 죽고자 하였으니 충의로운 사람이 아닙니까?” 하니

2 말씀하시기를

“익현은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러 국은(國恩)을 많이 입었으니 이제 국난을 당하여 마땅히 죽음으로써 갚는 것이 의리상 옳으니라.

3 익현이 또한 이러한 뜻을 가져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바치고자 하니 나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기노라.

4 그러나 그 뜻을 행동으로 옮김이 천운(天運)을 거스르고 천하대세를 역행하는 일이라.

5 일본에 항거하는 격문을 날렸으니 이는 자기 한 몸의 죽음으로써 만백성의 목숨을 해치려는 것이로다.

6 그러므로 나는 익현으로 하여금 신하의 절개를 지켜 죽게 하고 그 세력을 거두려 하노라.” 하시고

7 “이는 최익현의 만장(輓章)이니라.” 하시며 글을 써 주시니 이러하니라.

8 讀書崔益鉉이 義氣束劍戟이라

  독서최익현    의기속검극

十月對馬島에 曳曳山河교

시월대마도    예예산하교

글을 읽던 최익현이 의기로써 창검을 잡았도다.

시월이면 대마도에서 고국 산하로 썰매 자국 길게 뻗치리라.

9 이어 말씀하시기를 “이는 최익현이 죽은 뒤에 옳은 귀신(鬼神)이 되게 함이라.” 하시고

10 최익현으로 하여금 대마도로 끌려가 절사하게 하시니라.

11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최익현이 굶어죽었다 하나 뒷골방에 죽 그릇이 웬 말이냐!”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5:139)

 

 

 

 

  

 

 

 

 

 

증산도의 사상에는 김형효교수가 제시한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양가적 사유방식이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선천과 후천, 상극과 상생, 성과 웅, 춘생과 추살, 구천지와 신천지, 선천개벽과 후천개벽, '무위이화無爲理化'의 자연적 무위와

'삼계대권'의 주재(主宰)적 유의 들이 바로 그것이다.

 

증산도 사상의 핵심과제는 자연질서와 인간질서가 동시적으로 뒤바뀌는 후천개벽을 통해 어떻게 하면 '대원대한大寃大恨'의 구천지를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신천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구천지에 대한 부정과 신천지에 대한 긍정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이는 천지에 대한 양가적 태도(부정과 긍정)이 동시에 표출되어 있다.

즉 양극단으로 대립되는 두 가지 가치를 죽임과 동시에 살리려는 '양전(兩全')과 '겸전(兼全)'의 사유방식이다.

 

 

 

 

우리는 이런 증산도의 '양전'의 사유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증산도 사상은 이런 '양전'의 사유방식을 통해 선천(先天)의 구천지의 구문명을 후천(後天)의 신천지 신문명으로 전환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박성배교수의 『깨침과 깨달음』이 동아시아 철학의 사유방식의 틀인 '체용의 논리'(몸과 몸짓의 논리)를 활용하여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각기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셋이 하나로 붙어있음을 입증하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분석하였다. 특히 박성배교수는 불교철학의 핵심과제라고 할 수 있는 깨침은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을 깨 부수는 부정적 방식을 통해서 드러나는 긍정적 현실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깨침은 단순히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과 부정, 믿음과 의심의 역동적 긴장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자가 함께 할 때만 화두라는 폭탄에 의해서 깨침의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런 박성배교수의 몸가 몸짓의 논리는  증산도의 '양전兩全'의 논리와 매우 밀접한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증산도의 '양전'의 사유방식은 동아시아 철학의 '체'와 '용'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계승함과 동시에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삼아 박성배교수의『 깨침과 깨달음』에 나타난 사유방식을 증산도 사상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해 보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박성배교수의 『깨침과 깨달음』에 대한 서평을 마치려고 한다.

 

 

 

첫째, 『깨침과 깨달음』이 '체와 용의 논리'에 바탕을 두고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행하는 '몸과 몸짓의 논리'를 발전시켜 그 나름의 일관된 사유방식의 틀을 제시한 것처럼 '양전兩全'의 논리를 통해 증산도 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사유방식의 틀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둘째, 『깨침과 깨달음』에서 주장하는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성의 논리를 어떻게 증산도 사상의 '성경신誠敬信'(천지성경신)과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증산도의 '성경신'의 논리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측면에서 보는 인간의 '성경신'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천지의 '성경신'이다. 

 

천지의 성경신과 인간의 성경신의 관계를 하나로 일치시키려는 것이 증산도의 중심과제다. 그리고 박성배교수가 믿음과 닦음과 깨침 가운데 믿음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증산도 사상에서도 '성경신'에서 '신'이 비록 뒤에 나오지만 '신'이 '경신'의 근거가 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셋째, 『깨침과 깨달음』은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성을 원효의 '일심'논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즉 '일심'의 '체'에서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적 작용이 발출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증산도의 성경신도 '일심一心'(인간의 일심) 또는 천지일심天地一心'(천지의 일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일심'의 사상을 중심으로 성경신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증산도의 새로운 사유논리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넷째, 『깨침과 깨달음』의 선불교의 자력 신앙과 정토불교의 타력신앙의 통일관계에 주목한 것처럼, 증산도 사상에서도 믿음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시천주侍天主'의 증산 상제님에 대한 타력신앙과 '일심일심'에 기반을 둔 자력신앙의 논리를 하나로 통섭할 수 있는 논리를 새롭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깨침과 깨달음』에서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각기 별개로 따로 있으면서도 세 가지가 삼위일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증산도 사상의 삼대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해원解寃', '상생相生', 보은報恩'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논술할 필요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유불도(유교 불교 도교) 삼교(三敎)를 하나로 회통시키는 증산도의 '관왕삼교론'의 논리도 더욱 정교하게 체계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끝)

 

 

 

 

 

 

 

 

 

 

가을문명, 유불선 통일의 관왕 도수

1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며 글을 쓰시니 이러하니라.

2 佛之形體요  仙之造化요  儒之凡節이니라

   불지형체     선지조화     유지범절

불도는 형체를 주장하고, 선도는 조화를 주장하고, 유도는 범절을 주장하느니라.

 

3 受天地之虛無하여  仙之胞胎하고

  수천지지허무         선지포태

受天地之寂滅하여  佛之養生하고

수천지지적멸         불지양생

受天地之以詔하여  儒之浴帶하니

수천지지이조         유지욕대

冠旺은 兜率  虛無寂滅以詔니라

관왕    도솔  허무적멸이조

 

천지의 허무(無極)한 기운을 받아 선도포태하고

천지의 적멸(太極의 空)한 기운을 받아 불도양생 하고

천지의 이조(皇極)하는 기운을 받아 유도욕대 하니

 

이제 (인류사가 맞이한) 성숙의 관왕(冠旺) 도수는

도솔천의 천주가 허무(仙) 적멸(佛) 이조(儒)를 모두 통솔하느니라.

4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술수(術數)는 내가 쓰기 위하여 내놓은 것이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 2:150)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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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11 06: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께
    좋은 글이군요~ 잘 보고 가요 ^^

  2. 청결원 2014.11.11 07: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3. 뉴론7 2014.11.11 08: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학공부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겠지요 좋은하루되세요

  4. 브라질리언 2014.11.11 10: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양은 조화에대한 철학이 너무 좋더라고요 ㅎㅎ

  5. 한콩이 2014.11.11 10: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철학에 대해 잘보고갑니다~

  6. 명태랑 짜오기 2014.11.11 14: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트 잘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7. 생명마루한의원 2014.11.11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정보 네요~포스트 잘보고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8. 반이. 2014.11.11 16: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9. 천추 2014.11.11 2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음. 어려운 이야기 하지만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
    잘 배우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10. 리뷰맨77 2014.11.12 0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좋은 말인 것 같네요..하지만, 저에는 좀 아직 어렵네요^^

  11. 귀여운걸 2014.11.12 0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심도있게 꼼꼼히 살펴보았어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 알찬 말씀이시네요^^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6)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성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올바른 믿음은 '나는 부처이다'라는 '조신'의 절대적 믿음이다.

'조신'의 절대적 믿음의 기준은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 즉 '불퇴전의 믿음'에 있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닦음의 특성은 믿음과 함께 한다는 데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즉 참된 믿음의 특성은 언제나 닦음과 함께 한다는 데 있다.  

 

 

이처럼 믿음과 닦음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닦음의 기준은 결국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확고부동한 벽처럼 모든 것을 주객일체로 보는 '일심'의 경지에 머무는 '불퇴전의 믿음'에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깨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임제종의 간화선의 전통에 따르면 올바른 깨침은 어떤 경우에도 한결같은 경지를 깨침의 기준으로 내세운다.

 

"한국에서는 고려 때 임제종 간화선 전통의 선가 나옹(1320-1376) 화상이 제시한 삼관 개념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 가지 관문을 돌파했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화두 공부를 하는 수행자의 경지를 가늠한다는 것이다. 그 세 가지 관문이란 동정일여, 몽중일여, 또는 몽교일여, 그리고 숙면일여 또는 오매일여를 말한다.

 

즉 무엇을 하고 있건, 심지어는 잠을 자면서 꿈꿀 때나 더 나아가 꿈조차 없이 죽은 듯 의식이 없을 때까지도 , 끊임없이 생생하게 화두를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제종에서는 수행을 하다가 어떤 굉장한 체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부단하게 화두를 들고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니까 '올바른 믿음'의 기준이 불퇴이고, '올바른 닦음'의 기준이 응주이듯이, 세 관문의 돌차로 표현되는 '올바른 깨침'의 기준은 곧 일여이며 한결같음, 부단함이다. 선종에서 화두순숙 즉 화두가 잘 익었다거나, 의다독로 즉 의심 덩어리만 오롯이 서 있다는 등의 말로 표현하는 경지가 바로 그것이다."

 

 

 

 

 

 

 

 

 

 

 

 

세 가지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언제나 한결같이 화두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의식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무의식적 순간에도 변함없이 화두를 들고 있다면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꿈조차 없는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도 화두를 놓지 않고 오롯이 지킬 수 있다면 셋째 관문까지 통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 관문을 돌파한 것을 두고 선종에서는 흔히 제팔식, 즉 아라야식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제팔식인 아라야식으로 들어가는 것이 모든 것이 끊어진 안온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목석처럼 죽어 있는 생명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선사들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참으로 살아 있는 상태로 거듭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크게 죽었다가 크게 살아난다"는 '대사대활大死大活'이 바로 그것이다. 크게 죽어야 크게 살  수 있다는 양가적, 역설적 주장은 제팔식까지도 깨버리고 새로이 되살아나는 '전의'의 깨침을 뜻한다.

 

즉 꿈도 무의식의 상태도 심지어 죽음도 넘어서 언제나 한결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전의'의 깨침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믿음은 반드시 닦음이나 깨침과 떼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과 닦음과 깨침은 각기 자신 속에 타자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자는 타자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믿음을 뜻하는 '조신'에서는 믿음이 곧 닦음이요 닦음이 깨침이며 깨침이 믿음이다. 닦음과 깨침이 믿음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닦음 속에 믿음과 깨침이 함께 들어 있으며, 깨침 속에 믿음과 닦음이 같이 들어 있다. 그러기에 믿음과 닦음과 깨침은 같은 사실을 다르게 서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문제가 곧 닦음의 문제이고, 닦음의 문제가 곧 깨침의 문제이며, 깨침의 문제가 곧 믿음의 문제이다. 이렇게 볼 때, 믿음과 닦음과 깨침은 순환적 성격을 지닌다. 믿음이 닦음으로 이어지고 닦음은 깨침으로 이어지며 깨침은 다시 믿음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깨침의 내용과 닦음의 내용과 믿음의 내용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이 곧 닦음이요, 닦음이 곧 깨침이며 깨침이 곧 믿음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한 덩어리가 되는 궁극적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모두의 공통된 기준은 한 마디로 불이인 것이다. 아무런 분별도 개입되지 못하는 불이의 상태가 불교의 올바른 믿음, 닦음, 깨침의 공통된 기준이다."

 

 

닦음과 깨침이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조신'의 절대적 믿음은 성립할 수 없다.

 

'조신'의 절대적 믿음은 닦음의 본래 완성을 뜻하는 깨침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닦음은 본래 그 자체로 깨침이 될 수밖에 없다. 닦음은 깨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깨침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이 부처라는 믿음을 매 순간마다 재확인하는 것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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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09 06: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침과..닦음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유용한 글인듯 해요~ 휴일 잘보내세요 ^^

  2. 청결원 2014.11.09 0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3. 뉴론7 2014.11.09 10: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요일 주말이네여 막바지 단풍보러 다녀오세요

  4. 한콩이 2014.11.09 17: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 ^
    휴일 마무리 잘하세요 ~

  5. 유라준 2014.11.09 1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부처다'라는 그런 강한 믿음이 쉽지는 앟은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6. 죽풍 2014.11.09 1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깨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저녁시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5) 깨침의 양가성 '조신祖信'적 깨침과 '교신敎信'적 깨달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에서는 불교의 깨달음을 각기 서로 다르게 표현한다.

중국에서는 '오悟', '각覺', '견성見' 등으로 표현하고, 일본에서는 '사토리', '겐쇼' 등으로 표현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깨침', '깨달음' 등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깨쳐야 하는가? 깨쳐야만 세계와 인간의 근본적인 물음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침은 지금 여기서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깨침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특별한 그 무엇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역동적 긴장관계를 어떻게 하나로 일치시킬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중생은 단순히 인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중생에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뜻한다. 따라서 깨침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자기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등을 포함한 모든 관계의 근원적 조화를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깨침과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박성배교수는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말의 '깨지다'와 '깨치다'는 모두 '깨다'라는 말의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  '유리창을 깨다' 또는 '판을 깨다' 같은 파괴적인 뜻과 '잠을 깨다' 또는 '국문을 깨다'처럼 건설적인 뜻이 함께 쓰이는 것이 우리말의 '깨다'라는 말이다. 부정과 긍정, 파괴와 건설이 함께 하는 자리가 '깨침'인 것이다.

 

안과 밖에 다르고 앞과 뒤가 다른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묶인 개체의 경우는 부정과 긍정, 파괴와 건설의 동시 공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질적인 여럿의 동시 공존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불교의 깨침은 본래 연기적 존재인 인간이 잘못하여 비연기적으로 살다가 그 잘못됨이 송두리째 부서지고 깨지면서 동시에 다시 연기적인 삶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깨침은 양가성(兩價性,상대적 두 가치)을 지닌다. 즉 깨침은 깨침을 내포한다. 깨짐의 부정과 깨침의 긍정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각과 불각, 부처와 중생을 차별하는 이분법적 틀이 깨진다.

 

그 이분법적 틀을 제몸으로 삼고 있다가 그 몸을 깨버리고 불이의 부처님 몸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 깨침, 깨침을 통해서 무명 중생의 차별적인 세계로부터 차별하지 않는 부처님의 세계로 자기 자신을 전환한다. 그 불이의 세계에는 깨침과 못 깨침, 부처님과 중생, 나와 너, 몸과 몸짓의 구별조차도 없다."

 

 

 

 

 

 

 

 

 

 

깨달음이 모든 것을 알음알이로 아는 것이라면, 깨침은 주객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몸 그 자체의 체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 확인하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주객일체의 이해는 시공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이 주객일체의 상태를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시공이 변화하면 그런 인식도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깨침은 깨달음과는 본질적으로 그 차원이 다르다. 깨침은 주객이분법이 깡그리 깨어져 파괴됨과 동시에 주객일체법이 되살아나는 동시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깨지는 것은 무엇이고, 깨치는 것은 무엇인가?

 

 

 

 

깨지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주체와 객체를 둘로 나누어 보는 분별심과 아집이 깨지는 것이다. 깨짐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나는 부처이다'라는 믿음과 '나는 무명의 중생이다'라는 회의와 의심 사이의 역동적 긴장이 팽팽한 평행선을 치달리다가 그 극한의 상태로 나아가서 폭발을 일으켜야 한다. 있음과 없음, 긍정과 부정이 동시성을 이룰 때, 양자를 나누어보는 분별심이 깨지는 것이다.

 

이처럼 깨침은 부정과 긍정, 파괴와 건설이 동시 공존하는 양가성을 지닌다. 이런 맥락에서 박성배교수는 "지적인 깨달음은 불교의 깨침이 아니다. 거기에는 깨침이 없기 때문이다. 깨짐이 없는 깨침은 불교의 깨침이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깨침은 '돈점논쟁'을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문제제기다. 그렇다면 돈점논쟁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돈쟁 논쟁의 주변에 감도는 혼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사람들이 돈점 논쟁에 동원된 언어에 익숙하지 않는 데 있는 것 같다. 논쟁에 동원된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불꽃 튀기는 쟁점이 부각될 수 없고, 따라서 사상 발전 또한 기대할 수 없다. '점'이란 말을 들을 땐 그게 무슨 말인지 곧장 알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피어나지만, '돈'이라 하면 아무 것도 느껴지는 게 없고, 따라서 말문도 막히고 생각도 막혀 버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들은 그 태도에 따라 대강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모르기 때문에 알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돈의 의미를 제먹대로 해석하여 거기에 위험한 가치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다. 후자는 분명 사상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논쟁이라 하면 귀를 막는 사람들도 많다."

 

 

 

 

불교의 '돈점논쟁'은 유교의 '사칠논쟁'과 함께 한국철학사를 빛낸 금자탑을 이루었다.

 

문제는 '돈잼논쟁'에서 '돈'과 '점'의 의미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소모적인 논쟁에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돈점논쟁'에서 핵심과제는 '돈'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돈'은 우리말로 '몰록'이란 뜻이다. '몰록'은 '갑자기'라는 뜻으로 영어의 'sudden'에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어권에서는 'sudden enlightenment'라고 번역한다.

 

문제는 우리말의 '갑자기'이든 영어의 'sudden enlightenment'이든 둘 다 똑같이 그 언어의 성격에 있어 하나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사건에 소요되는 시간의 길이가 아주 짧다는 것을 연상시켜 준다는 점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거나 어떤 일이 갑자기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몰록'을 이런 사유방식에서 접근한다면,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은 격이 된다.  왜냐하면 '몰록'은 인간의 감각적인 작용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모든 것을 시공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시공의 흐름을 뒤좇아가면서 관찰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몰록'은 시공의 틀을 벗어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주객일체적 사유이다. 증산 상제님께서 "천지가 24방위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음이 시공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곳에서 발현되는 것이 바로 '몰록의 깨침'이다. 따라서 시공의 틀에 갇혀서 보는 사유와 시공의 틀에서 벗어나 보는 사유는 서로 다르다.

 

 

 

 

 

 

 

 

 

 

 

 

'돈점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몰록 깨친다는 '돈오'의 입장과 전차적으로 닦아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점수'의 입장을 어떻게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돈오와 점수의 통합'을 '점수로써 돈오에 이른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지눌은 '돈오'를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알음알이로 이해하는 '해오解悟'이고, 다른 하나는 깨치는 '증오證悟'다. '해오'는 "깨치거나 깨치지 못하거나 관계없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으로 거기엔 잘못도 많기 때문에 반드시 그 뒤에 점수가 뒤따라야 증오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우리가 먼저 '해오'를 얻고 그 전제 위에서 '해오'에 의거하여 '점수'를 행함으로써 '증오'라는 마지막 깨침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박성배교수는 지눌의 '돈오점수론'이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고 평가한다.

 

첫째, 지눌은 깨침 아닌 것을 깨침이라고 말한 오류를 저질렀다. 즉 '해오'는 진정한 깨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해오'에 대해 지눌은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후세에 불필요한 많은 오해의 여지를 남겼다.

 

둘째, 지눌은 깨침 아닌 것을 깨침이라 규정함으로써 닦음의 의미마저도 변질시켰다는 점이다. 지눌은 지눌이 비록 닦음을 '보현행'이라고 하여 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증오'의 '구경각'이 닦음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눌의 '돈오점수론'의 근본취지는 '돈오' 뒤에도 '점수'가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자면 지눌은 "그저 무작정 점차 닦아 나가는 데에만 몰두하는 점수의 병폐를 돈오론으로 치유하고, 돈오만 하면 된다고 하여 점차 닦아 나가는 데 소홀한 병폐를 점수론으로 치유하려 했던 것이다."

 

 

 

1981년 해인사의 성철스님은 선문정로에서  지눌의 '돈오점수론'을 비판하고, '돈오돈수론'을 제창하였다.

 

즉 점차적 닦음을 통해 몰록 깨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몰록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는 것이 성철스님의 입장이었다. 깨침이란 결코 점차적인 닦음으로 얻을 수 없다. 점차적인 닦음은 중생과 부처의 차이와 간극을 인정하는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송광사의 보조사상연구원은 즉각 이런 성철 스님의 '돈오돈수론'에 반박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문제는 해인사의 '돈오돈수론'과 송광사의 '돈오점수론'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함으로써 양자의 입장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박성배교수는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새롭게 통합할 수 있는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생멸사에서 무생사제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만 무상사제를 알면 그 속에 생명사제가 집착도 모순도 없이 잘 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눌 사상을 평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명사제 같은 돈오점수에서 교진여의 깨침 같은 돈오돈수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만, 일단 돈오돈수가 무엇인 줄 알면 돈오점수는 그 속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돈오돈수의 관문을 돌파한 다음의 돈오점수는 관문 돌파 이전의 돈오점수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말이 같다고 하여 똑같은 것인 줄 알면 큰일난다. 부디 우리는 막힌 길로 가려고 하지 말고 열린 길로 가야 할 것이다.

 

 

 

몸짓에서 몸으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만, 일단 몸으로 돌아가면 그 속에 온갖 몸짓이 자유자재로 조화롭게 일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불교 공부도 그런 것이다. 몸과 몸짓은 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의식이 몸짓에 머물러 거기에 집착하면 온갖 병이 다 생긴다. 몸짓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몸이 몸 노릇을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몸과 몸짓의 관계는 자연스런 생명 본연의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대립관계로 변해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고 싶다. 몸으로 하여금 몸 노릇하도록 내버려 두라.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이든 도를 닦는 사람이든 사람이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일일 줄 안다. 몸짓의 속박에서 벗어나 몸이 몸 노릇을 제대로 하는 세계가 바로 깨침의 세계요, 몰록 돈의 세계요, ㅂ처님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박성배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한다.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은 서로 다른 별개의 그 무엇이 아니다. '돈오돈수론'은 본래적인(體) 측면을 말하고, '돈오점수론'은 작용적인(用) 측면을 말한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순간 몰록 깨치고 단박에 닦은 것이다.

 

물록 깨침이란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하고, 단박 닦음이란 부처와 중생을 이원화하는 망상을 한순간에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는 깨침과 닦음이 인간의 본성에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따로 깨칠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고정적으로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는 역동적 변화의 과정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깨침과 닦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그 본래의 깨침과 닦음을 매 순간마다 재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닦음은 깨침을 전제로 해서 행하는 닦음이지 깨치기 이전에 깨치기 위해서 닦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그 차원이 다르다.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그 존재론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돈오돈수론'을 바탕으로 '돈오점수론'을 지속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역동적인 삶의 연속적 과정이다.

 

 

우리는 이런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의 관계를 '생멸가제生滅四諦'와 '무생사제無生四諦'의 관계로 설명할 수있다.

'생멸사제'는 생겨난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무생사제'는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이 원래 생겨남도 소멸함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무상사제'가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 인간의 의식은 생성과 소멸도 없는 본래세계임을 알지 못한다.

 

 

즉 '생멸사제'와 '무생사제'를 둘로 갈라보는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에서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틀을 깨 부수어 '생멸사제'와 '무생사제'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면 눈 앞에 펼쳐지는 일 자체 그대로 중생의 모습이 바로 부처의 모습이거 번뇌가 바로 보리이며 지옥이 바로 극락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틀을 깨 부수어냐만 몰록 깨침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근본적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전의轉依'가 바로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의'는 불교철학에서 깨침의 체험을 논의를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이다.

 

 

"유가사상은 흔히 유식사상이라고 불리는데, 유식의 교위에서는 의식을 분석하여 여덟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을 느끼고, 현상과 존재의 뜻을 알아차리는 간각 및 자각 작용이 표면에 떠올라 있는 여섯 가지 의식이다. 이를 흔히 전유식이라고 부른다. 그 아래에는 자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제칠식이 있고, 그 아래 최심층에 아라야식이라고 부르는 제팔식이 있다.

 

전육식이 빚어내는 온갖 분별과 집착의 습관적인 기운이 이 제팔식에 축적된다. 이것을 훈습이라고 한다. 그것이 다시 앞의 일곱 가지 의식에 투영되면서 주객이분법을 바탕으로 한 자기중심적 분별이 자행된다. 이 분별이 집착과 고통, 끝없는 윤회를 낳는다.

 

전의란 아라야식을 일거에 근본적으로 뒤짚어서 그 본래의 청정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즉 주객이분법을 바탕으로 자기중심적인 분별을 자행하는 앞의 일곱 가지 의식과 분별, 집착의 훈습을 없애고 분별, 집착이 없는 본래의 마음 상태인 불이의 일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주체가 따로 있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유식 사상에서는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어지는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유식 사상이 인식대상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것은 인식주체의 독자성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다.

 

 

유식사상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과제를 말하는 것과 말하여 지는 것, 아는 것과 알아지는 것,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듣는 것과 들리는 것, 만드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여지는 것 등이 둘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만약 주체와 객체를 대상화해서 파악하는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의 틀을 깰 수 있다면, 인식의 주체가 바로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아는 것과 알아지는 것과 하나가 된다. 중요한 것은 주객관계가 일치할 수도 있고, 주객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우리의 의식이 본래 연기법으로써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가 사상의 의식 이론은 모든 것이 연기의 관계임을 이야기 한다. 인간이 지각하고 감각하는 것은 모두 의식의 영향을 받는다. 의식은 또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까 내면의 의식과 외부 세계의 현상 사이에는 연기적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역동적이다.

 

이러한 의식의 구조는 깨친 이든 깨치지 못한 이든 간에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을 깨우치치 못하고 주관과 객관을 따로 세워 놓은 한 끊임없는 분별, 망상, 번뇌의 업을 지으며 윤회할 뿐이다. 의식의 주체 또는 원인으로서 작동하여 객체 또는 결과로 온갖 현상을 만들어 내면 끊없는 윤회의 순환이 벌어진다. 그러한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명 때문에 의식이 환상으로 현상을 지어내게 되고, 그 환상의 현상이 다시 무명의 의식을 훈습한다. 이것이 바로 윤회이다."

 

 

 

 

유식 사상에서는 무명의 훈습을 깨고 의식의 근본적인 전환을 뜻하는 '전의'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삼성설'을 제기한다. 여기서 '삼성설'이란 '의타기성', '변계소집성', '원성실성'을 말한다. '삼성설'은 '전의'의 논리적 구조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의타기성'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겨난다는 것으로 연기를 말한다. '변계소집성'은 모든 것을 분별하여 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모든 것을 집착이나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원만하게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만약 우리 인간이 만물의 연기성을 아무런 집착이나 분별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분별의 세상이 곧바로 부처의 이상세계가 된다. 따라서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전의'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의타기성'을 제대로 깨치는 것이다.

 

 

 

저명한 일본의 학자 나가오 가진은 '전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의란 그 말 자체가 암시하듯이 자기가 의지하던 기반, 근거가 뒤짚어지고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또는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발 딛고 있는 땅이 뒤집히고, 새로운 세상이 새로운 빛을 받아 나타난다. 자기가 딛고 선 기반이 근본적으로 도전을 받는다. 그것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려 한다는, 즉 죽음이 닥친다는 엄청난 두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죽음을 통해서만이 자기의 기반이 새로운 빛을 받아 되살아날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 전체가 뒤집어지고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몸에 흐르는 자기장이 있다고 가정하면, 전의라는 것은 그 자기장이 일상적인 방향과는 정반대로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가오 가진의 '전의'에 대한 해석을 읽어보면, 증산도에서 후천개벽의 신천지(新天地)가 새롭게 열리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나가오 가진이 '전의'를 단순히 인간 의식의 근본적 변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가오 가진은 인간이 발 딛고 서 있는 천지(天地)까지도 뒤바뀐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전의'에서 의식이 바뀌면 세상이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개벽이 자연개벽의 전제조건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나가오 가진은 죽임과 살림이 동시적 전환을 이루는 곳에서 '전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죽이면서 살리고 살리면서 죽인다는 증산도의 '춘생春生'과 '추살秋殺'의 양가성과도 유사한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나가오 가진은 새 인간에 의해서 새 하늘 새 땅이 새롭게 열릴 수 있다는 동시적 전환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떻게 열릴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구 자전축 경사의 변동과 지구 공전궤도의 변화와 인간 의식변화의 동시적 상관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근원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천지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뒤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는 나가오 가진이 인간의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인류 구원의 관건인 자연세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전의'는 의식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뒤바뀜으로써 인간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다. 연기하는 세계가 곧 본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변계소집성'으로 인하여 인간이 차별적 분별의식을 일으키기 때문에 횬상세계에 얽매여 진정한 깨침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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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08 09: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달음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께 좋은 글이네요 ^^
    잘보고 간답니다 ~

  2. 죽풍 2014.11.08 10: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깨침에 조금이나마 알아 갑니다.
    즐거운 주말과 휴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

  3. 유라준 2014.11.09 0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침과 깨달음이 매우 어려운 개념같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4. 귀여운걸 2014.11.09 0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침과 깨달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배워갑니다..
    정말 좋은 말씀이시네요^^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4) 닦음의 양가성 '조신祖信'적 닦음과 '교신敎信'적 닦음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닦음은 믿음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믿음은 반드시 닦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닦음에는 "명상과 내면의 정신 수련뿐만 아니라 자비와 보시"등 도덕적 실천도 포함된다. 닦음은 집착을 떨침으로써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소극적 해탈'과, 자비를 통해 모든 것에 자재한다는 '적극적 해탈'을 모두 아우른다.

 

 

그런데 믿음이 '조신'과 '교신'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닦음도 그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즉 '조신'적 닦음이 될 수도 있고, '교신'적 닦음이 될 수도 있다.

'조신적' 닦음은 '몰록 닦음(돈수頓修)'이고 '교신적 닦음'은 '점차 닦음(점수漸修)'이다.

 

 

중요한 것은 '교신'이 닦음과 깨침의 전제 조건으로 작용하는 반면, '조신'은 그 자체가 닦음이며 깨침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신'은 처음에 믿음을 일으키고 다음에 그 내용을 이해하여 실행에 옮기도 마침내 깨침에 이르는 점수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조신'은 몰록 깨치고 단박에 닦아 마치는 '돈오돈수'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교신'은 점차적인 닦음의 과정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고, '조신'은 믿음을 일으킴과 동시 즉각 깨쳐서 부처가 될 수 있다.

 

 

'교신'은 '점수'에 연결되고, '조신'은 '돈오'에 연관된다.

 

"조신에서는 닦음이 깨침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깨침의 용(用)다. 다시 말하자면, 교신에서는 분별적 능소의 구도가 전제되고, 교신은 불이적 체용의 구도를 바탕으로 한다. 교신에서는 중생과 부처 사이에 간격이 전제되고, 따라서 점진적 닦음을 통하여 그 간격을 메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아무리 확고한 교신을 지닌다해도 그것으로써 자신과 부처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돈오 즉 몰록 깨친다는 사상의 안목이다.

 

그 간격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와 중생의 구분은 분별심이 일으키는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 가상의 간격을 메우는 길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 뿐이다. 돈오사상에 입각하여 볼 때, 접진적으로 닦는 것은 다만 분별심을 바탕으로 한 행위로써 오히려 깨침을 지연시킬 뿐이다. 그러니까 교신을 바탕으로 한 점진적 닦음을 통해서는 결코 깨침을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점진적 닦음을 부정한다.

점진적 닦음은 단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의 간극을 고착시키는 분별심을 덧붙이는 것으로 오히려 깨침을 지연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점차적 닦음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부처와 중생의 간극과 차이를 '점수'를 통해 메우려 드는 것이다.

 

이는 이미 주객이분법적 구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와 중생의 간극과 차이는 인간의 차별심이 일으킨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돈오돈수론'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양자의 차별이 없다.

 

인간의 분별심이 사라지면 막바로 그 간격이 저절로 없어진다. '교신'에 의거한 전차적 닦음은 부처와 중생을 둘로 가르는 것으로 주객이분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대원칙인 '불이불이'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신'에 의거한 단박에 닦음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 주객일체법에 그 존재론적 근거를 두고 있다.

 

 

 

 

닦음은 믿음이나 깨침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조신'에 근거한 주객일체적 닦음은 닦음과 깨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수증일여修證一如'에 기초를 두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닦음 밖에서 따로 믿음이나 깨침을 찾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조동종의 도겐이 지은 『정법안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닦음과 깨침을 구별하는 것은 이단사설이다. 불법에서는 닦음과 깨침이 하나이다. 닦음은 깨침을 근거로 하므로 초심자의 닦음조차도 모두 본각이다. 그러므로 선사가 제자에게 수행의 가르침을 줄 때에는 수행 밖에서 따로 깨침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한다. 수행 자체가 곧 본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되는 것은 수행 밖에서 따로 깨침이나 믿음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도겐에서 선의 수행은 '깨침 위에서 행하는 닦음'(증상證上의 수修)이지 '깨침 이전에 깨침을 위해서 행하는 닦음'(증전證前의 수修)이 아니다.

 

"결국 요점은 닦음과 깨침이 동시적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닦음과 깨침이 몸과 몸짓의 관계라고 함은 깨침을 향해 닦아 나가는 시간상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관념을 배제하고 대신에 완전한 불가분성, 불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불교인들이 닦음은 행하고 있지만 깨침은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닦음과 깨침이 둘이 아니건만, 닦음과 깨침을 동시에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조신'에 의한 닦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닦음과 깨침은 '조신'에 입각한 것일 때에만 비로서 양자가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의 비결은 바로 '조신'에 있다.

 

 

 

 

 

 

 

 

 

 

 

우리는 '조신'을 근거로 하는 닦음의 실례를 '벽관壁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벽관'은 중국 선종의 초대 선사인 보리달마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수행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벽관'이란 무엇인가? '벽관'은 일반적으로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참선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 된다. 그러나 '벽관'의 참뜻은 벽을 마주하고 앉아서 참선을 하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참선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조신의 닦음으로서 참선을 행할 때, 그것은 불성 즉 부처님 성품이라는 몸에서 나오는 몸짓이라는 점에 참선의 본질이 있다."

 

 

 

참선을 왜 하필 '벽관'이라고 했는가?

'벽관'이란 말 앞에 '응주'라는 말이 붙는다. '응주벽관凝住壁觀'이 바로 그것이다.

'응주벽관'에서 중요한 것은 벽이 아니라 얼마 만큼 사무치게 볼 수 있는가 하는데 있다.

 

시 말해 '응주'는 주객일체의 경지에 확고하게 머문다는 뜻이고, '벽관'은 벽처럼 주객일체의 경지에 확고부동하게 머무는 경지에서 보는 것을 뜻한다. 박성배교수는 야나기다의 해석에 근거해서 '벽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벽관이란 벽이라든가 그 밖의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한 명상도 아니고, 특정의 장소에서 특정의 자세로 행하는 명상도 아니다. 벽과 같이 확고한 마음으로 행하는 명상이라면 자세와 장소에 상관없이 모두 벽관일 수 있다...

 

그러니까 보리달마가 6세기 중국 불교계에 끼친 중요한 공헌은 불교의 모든 명상 수련에 적용되는 기준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보리달마의 벽관이란 특정 종류의 명상 수련이 아니라 올바른 명상 수련과 올바른 닦음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 기준이란 (1) 모든 중생이 똑같이 참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깊은 마음, (2) 벽처럼 확고부동한 불이의 경지, (3) 일상 생활에서도 늘 사념처의 수행에 전념하는 것 등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올바른 닦음의 기준은 주객불이의 상태에 굳건한 벽처럼 확고하게 머무는 데 있다. 따라서 닦음은 깨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깨침을 늘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계속)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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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07 05: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정말 좋은 글이네요 ^^
    즐건 하루되세요 ~

  2. 죽풍 2014.11.07 08: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소중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3. 한콩이 2014.11.07 09: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철학에 대한 글 잘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4. 뉴론7 2014.11.07 09: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불금 잘보내세요

  5. 청결원 2014.11.07 1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6. 브라질리언 2014.11.07 12: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번 새로운 생각을 하고 가게 되는 것 같아너무 좋아요 *^^*

  7. 세상속에서 2014.11.07 16: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닦음과 깨침 조신에 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8. 반이. 2014.11.07 17: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9. 유라준 2014.11.07 2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결국 돈수와 점수군요.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0. 귀여운걸 2014.11.09 02: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심도있고 많은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철학이네요..
    닦음은 깨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 귀에 쏙 들어왔어요~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3) 믿음의 양가성 '조신祖信'과 '교신敎信'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동아시아 대승불교는 깨침의 종교인가, 믿음의 종교인가?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는 올바른 믿음이 없이는 닦음이나 깨침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도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믿음의 문제에 대해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 경우를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왜 믿음의 문제가 그동안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소홀히 다루어져 온 것일까?

왜냐하면 동아시아 대승불교 학자들은 "믿음이란 체계적으로 분석하거나 그에 대해 비판적 문제를 제기하거나 또는 지성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는 전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믿음은 매우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동아시아 불교의 신행에서 두 가지 주요 흐름이라 할 수 있는 선 불교와 정토 불교 어느 쪽에서나 믿음은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두 가지 유형의 불교 신행은 믿음의 개념과 실천에서 차이가 있다. 선 불교에서 믿음이란 닦음의 자리에 굳게 서 있게 하는 확고한 신념 또는 결단의 경지이다. 반면에 정토 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이 큰 자비의 마음으로 세운 마흔 여덟가지 서원에 철저히, 완벽하게 의지하는 데 믿음의 본질이 있다고 보며, 바로 그런 믿음이 서방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여긴다. 그래서 흔히 선 불교의 믿음은 자력 신앙 즉 모든 것을 자기의 힘에 의지하는 신앙이고, 정토 불교에서 믿음은 타력 신앙 즉 남의 힘에 의지하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러나 두 전통 모두 믿음을 구제(救濟)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는 같다."

 

 

 

 

문제는 동아시아 대승불교에서 믿음이 이처럼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차지하는데도 불구하고 동서양의 현대불교 학자들이 이 믿음의 문제를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불교의 금자탑을 쌓았다고 평가되는 일본에서조차도 정토 불교의 타력 신앙 이외에는 불교의 믿음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선 불교의 자력 신앙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박성배교수는 믿음을 양가성을 지닌 것으로 파악한다.

'조신祖信'과 교신敎信'이 바로 그것이다. '조신'이 시공의 흐름에 관계없이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근본적(절대적) 믿음이라면, '교신'은 시공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지말적(상대적) 믿음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조신'이 '불퇴신不退信'의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이라면, '교신'은 '퇴신退信'의 '뒤로 물러설 수도 있는 믿음'이다. 이 두가지 믿음은 고려 때 지눌(1158-1218)이 이미 거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조신'은 '나는 이미 부처이다'는 것을 확인하는 믿음이고, '교신'은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조신'과 '교신'은 각기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조신'은 믿음의 주체와 대상이 둘이 아니라는 주객일체적 믿음이다. 반면, '교신'은 믿음의 주체와 대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주객분립적 믿음이다.

 

예컨대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신'의 믿음은 나라는 믿음의 주체와 부처라는 믿음의 대상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나는 믿음의 주체가 되고 부처는 믿음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믿음의 주객이분법적 구조가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본래부터 부처다"라는 '조신'의 믿음은 믿음의 주체와 믿음의 대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믿음의 주체도 부처인 자기자신이고 믿음의 대상도 부처인 자기자신이다.

 

"이렇듯 주객 분별의 능소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교신과, 몸과 몸짓이 둘이 아니라는 체용의 구도를 바탕으로 하는 조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교신에서 부처님은 믿음의 대상이다. 그러나 조신에서 부처님은 외부의 객체가 아니라 곧 중생의 마음, 중생의 본체, 본래의 몸이며, 믿음은 그 몸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몸짓이다."

 

 

 

 

 

박성배교수는 7세기 통일신라 시대에 활동한 저명한 승려인 원효도 몸과 몸짓의 논리로 대승불교를 해석하였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원효는 승기신론의 제목을 몸과 몸짓의 구도에 적용해서 해석하였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불교철학에서 대승기신론의 제목을 어떻게 풀이할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승기신론'의 제목풀이는 대승기신론의 핵심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성배교수는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대승기신론의 주석가들은 '대승기신론'을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데 대한 논"이라는 식으로 풀이하였다고 본다. 이렇게 읽을 경우, '대승'은 '믿음을 일으킴'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이런 풀이는 주객이분법의 능소 구도로 귀결되어 '교신'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이 된다. 이는 대승기신론은 물론이고 대승불교 핵심사상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의 제목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가?

 

 

 

박성배교수는 원효가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주객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해석의 틀로 삼았다고 본다.

 

 

박성배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를 적용하여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대승기신론'의 제목풀이를 다음과 같이 시도한다. 

 

"총괄하여 말하자면, 대승이 이 논의 궁극적인 몸(종체宗體)이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이 논의 뛰어난 몸짓이니, 논의 몸과 몸짓을 함께 거론하여 제목을 지은 까닭에 '대승기신론'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원효는 '대승'을 '믿음을 일으킴'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원효에서 '대승'은 '일심'을 가르킨다. 그리고 그 '일심'의 '대승'이 몸이 되어 믿음을 일으키는 자연스런 몸짓을 행한다. 즉 '일심'의 마음이 본체로서 몸이고,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작용으로 몸짓이 된다. 몸과 몸짓의 주객일체적 구도에 바탕을 둔 '조신'의 믿음은 외부의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일심'이라는 몸에서 일어나는 몸짓이 곧 '조신'의 믿음이다.

 

달리 말하자면, 조신은 일심의 작용이다. 일심이란 본별이 없는 무념의 마음을 말한다. 일심으로 돌아가면 중생과 부처의 구분, 깨침과 못 깨침의 분별이 없어지고 대신에 공과 연기의 세계를 직접 알게 된다. 분별을 여윈 마음에서는 퇴전이 일어날 수 없다. 분별이 없으므로 돌아갈 곳도 돌아가는 사람도 없다. 이처럼 일심의 작용인 조신은 존재론적으로 연기에 근거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결코 퇴전할 수 없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은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논"이란 뜻이 아니고,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논"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대승기신'에서 '대승'은 '기신'의 목적어가 아니라 수식어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대승기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조신'과 '교신' 두 가지 차원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조신'과 '교신'의 차이는 이제설(二說)로 설명할 수 있다. 이제는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를 말한다. 두 가지 진리는 서로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같은 진리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상황, 즉 근기에 따라 다르게 베푸는 것이다. 즉 부처가 진리를 가르칠 때 듣는 이의 능력에 따라서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대적 진리란 "보통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자기들의 상식을 바탕으로 해서 받아들이는 진리다." 절대적 진리란 "공이라든가 무아를 강조하는 불교의 궁극적 진리"다. 따라서 상대적 진리는 '나는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일반 사람들의 믿음에 상응하는 것이고, 절대적 진리는 '나는 부처이다'라고 하는 깨친 사람들의 믿음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상대적 진리는 깨치지 못한 사람들의 시각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절대적 진리는 깨친 사람들의 시각에 중점을 둔 것이다.

 

"다만 진제와 속제라는 두 가지 진리를 운위하는 이제설(二說)과 마찬가지로 조신과 교신이라는 두 가지 믿음도 경전에 대한 두 가지 해석 태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불퇴전의 조신과 진제는 첫 번째 범주에 해당하며, 퇴전의 교신과 속제는 두 번째 범주에 해당한다. 깨친 이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들이민 것이 조신 즉 진제이며, 그것을 방편으로 가르친 것이 교신 즉 속제이다. 그러므로 결국 교신을 인정하는 경전의 대목들은 방편의 가르침이다. 깨친 이들이 듣는 이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속제로써 가르친 것이 교신이다. 궁극적으로 교신은 진제의 장에서 불퇴전의 조신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주객이분법적 구도에 얽매여 자신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못 깨친 사람들을 위해 방편적 가르침으로 마련한 것이 '교신'의 상대적 진리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절대적 진리의 '조신'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승불교의 올바른 믿음, 즉 '불퇴전不退轉'의 '조신'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즉 긍정과 부정, 믿음과 회의 사이에 역동적 긴장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언제나 의심이라는 긴장의 요소가 존재한다. 특별히 그 긴장을 현저히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공안선公案腺이다.

 

 

 

 

모든 수행자는 믿음과 회의,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갈등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모든 수행자는 현실적으로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점을 의심함과 동시에 본질적으로 '나는 부처이다'라는 믿음의 양극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 불교의 공안선은 갈등하는 양극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의심을 통해서 그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이는 갈등으로 갈등을 푸는 역설적 방법이다.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믿음이 역동적인 까닭은 긍정과 부정, 믿음과 의심이 역동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함께 작동하는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은 믿음을 부인하고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종의 '연료'로서의 역할을 한다. 믿음의 불꽃이 더욱 밝고 높이 타오르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믿음과 의심 즉 긍정과 부정, 또 달리 말하자면 '나는 부처이다'라는 믿음과 '나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의심 사의 팽팽한 역동적 긴장을 터뜨려 날려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무문선사가 말하는 것처럼, 분별심을 끊어버림으로써 믿음과 의심의 분열과 간극을 없애려는 데 간화선의 궁극적 목표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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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06 06: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유용한 정보가 될듯 해요~
    잘보고 갑니다 ^^

  2. 죽풍 2014.11.06 08: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과 악, 믿음과 부정 등 이분법에 대한 갈등이 해소될 때 비로소 적멸에 도달하지 않을까요?
    부처님은 모든 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불이의 깨달음을 얻는 이가 바로 수행자라는 생각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

  3. 뉴론7 2014.11.06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좋은하루되세요

  4. 브라질리언 2014.11.06 10: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양철학은 볼수록 매력있는것 같아요.

  5. 한콩이 2014.11.06 1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보고갑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6. 세상속에서 2014.11.06 12: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불교에 대해서 많이 배웠습니다.

  7. 반이. 2014.11.06 16: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8. 생명마루한의원 2014.11.06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고 갑니다..^^

  9. 천추 2014.11.06 2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깊이 새기면서 갑니다.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10. 유라준 2014.11.06 22: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좀 어려운 이야기지만 잘 보고 갑니다.
    덕분에 이런 글을 접하니, 감사를 드리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1. 리뷰맨77 2014.11.07 00: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철학..이제 조금씩 이해가 되네요^^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2) '체體와 용用의 논리 = 몸과 몸짓의 논리'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박성배교수가 '체와용의 논리'를 문제로 제기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박성배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1983년 이 책이 처음 출판된 이래 20연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색다른 체험을 했고, 따라서 내 사상도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특히 불교 교리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우리 선배들의 '체와 용의 논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적지 않은 수확이었다." 박성배교수가 보기에 동아시아 대승불교를 이해하는 데 '체와 용의 논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성배교수는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각기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또 셋이 하나로 붙어 있는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아시아 전통적 사유구조의 틀인 '체와 용'의 논리를 응용한다.

 

'체와 용의 논리'는 중국철학에서 위진현학에서 시작되어 수당의 불교철학과 송명철학을 거쳐 청대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사유구조의 틀이다. '체와 용의 논리'는 '체용불이體用不二', 체용일여體用一如', 입체달용立體達用', 전체대용全體大用, 즉체즉용卽體卽用' 등으로 다양하게 구사된다.

 

 

 

 

 

 

동아시아 철학은 어떤 의미에서 '체'와 '용'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될 수 있다. 왜냐하면 위진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의 근본과제가 각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체'와 '용'의 관계를 하나로 합치시킴으로써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통일하려는 측면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철학에서 '체'는 우주만물의 본래 바탕, 즉 본질을 말하고, '용'은 우주만물의 본질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작용을 말한다.

 

 

 

박성배교수는 '체'와 '용'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한다.

"동아시아 해석학 전통에서 '체'는 본질적이고 내적이며,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면을 가르킨다. 그 체가 움직여 드러나고 일을 하는 면을 '용'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용은 현상적이고 외적이며, 따라서 눈에 보이는 면을 가르킨다. 그러나 체용의 개념이 그 두 면을 갈라놓으려고 고안된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체용이라는 개념들은 언뜻 보기에는 별개인듯한 그 두 면이 실제로는 불가분의 불이(不二)적 관계임을 이야기하고자 고안되었다."

 

 

 

박성배교수는 '체와 용의 논리'를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서 해명하고 있다.

'몸과 몸짓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편의상 체용을 '몸과 몸짓'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여기하고자 한다. '체'를 '몸'이라고 하고 '용'을 '몸짓'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몸이 움직여 일을 하여 드러나는 것이 몸짓이다.그러므로 생명 있는 몸이라면 반드시 몸짓이 나온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몸짓뿐이다. 그러나 몸짓이 몸과 별개로 벌어지고 존재할 수는 없다. 몸이 있으면 반드시 몸짓이 있고, 몸짓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몸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몸과 몸짓은 일단 구별할 수는 있지만 원래 하나이다."

 

 

 

 

박성배교수는 이미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몸'과 '몸짓'의 논리는 '능'과 '소'의 주객이분법적 사유방식에 비롯되는 온갖 그릇된 행동을 치유하기 위한 데 있다. 다시 말해 "몸과 몸짓이라는 개념은 주체와 객체, 수단과 목적, 원인과 결과, 생겨남과 없어짐, 삶과 죽음 등의 이분법에서 볼 수 있는 분별의 사고방식을 불식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분별의 사고방식에서 비롯되는 온갖 그릇된 행동을 치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몸과 몸짓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원효가 말하는 것처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불일不一'과 '불일不二'의 관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문제는 몸과 몸짓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식이 몸짓의 현상적 차원에 머물러 거기에 집착하여 몸의 본질적 차원을 배제함으로써 "몸과 몸짓의 관계가 자연스런 생명 본연의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대립관계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몸과 몸짓의 역동적 전일성의 관계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성배교수는 동양의 체용사상이 불행히도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

즉 체용사상의 종교적 성격이 사라지고 말장난이나 사색의 훈련에 응용되는 차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성배교수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여 보자.

"그러나 불행히도 동양의 체용사상은 변질되고 말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체용은 말장난으로 떨어지고 본래의 종교적인 성격이 사라지고만 것이다. 유교의 성리학자들이 즐겨 썼던 체용론은 모두 말장난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힘든 것만은 사실이다. "바람이 용이라면 부채는 체다. 붓이 채라면 글씨는 용이다." 이것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 즐겨 인용한 체용의 예이다.

 

수학이나 논리학이 사람의 생각을 정리해 주듯이, 자기의 눈에 보이는 것을 안 보이는 것과 연결시켜 주는 지적 훈련이나 전혀 별개의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두 개의 사실이 알고 보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사색의 훈련이 바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의 체용론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체용론에서 어떤 교육적 노력의 흔적을 역력히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질은 역시 변질이라는 사실에 있다. 체용론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종교적 성격의 증발이 바로 변질이다."

 

 

 

 

 

 

 

 

 

 

 

박성배교수는 체용론의 변질이 곳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본말론'이나 인도의 '진속론'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본말론'은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과의 관계를 나무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나무의 가지는 용이요 뿌리는 체다. 뿌리 없는 가지가 없듯이 체 없는 용은 없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본말론은 체용론에서 종교주의적 성격이 사라지고 공리주의적 성격이 판을 치게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인도의 중관학파들은 '진속불이'의 사상을 고취함으로써 대승불교사상을 펼치는 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진속불이론'이 체용론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탈색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본말론과 같은 맥락에 있다.

 

 

 

 

박성배교수의 이런 관점은 좀더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문제의 핵심은 '체용론'의 종교적 특성과 공리적 특성을 어떻게 하면 '양전兩全' 또는 '겸전兼全'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증산도의 '성웅양전聖雄兩全' 또는 '성웅겸전聖雄兼全'의 논리는 '체용론'의 종교적 특성과 공리적 특성을 양가적으로 살리는 전형적 논리이다.

 

 

또한 박성배교수가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유학의 '체용론'이 참으로 종교적 특성이 배제된 채 공리적 특성으로 전락하여 변질된 것인지도 좀더 면밀하게 논의될 필요가 있다. 박성배교수는 도가철학의 '체용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보충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박성배교수가 믿음과 닦음과 깨침을 '체와 용의 논리',

즉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자.

 

박성배교수는 몸과 몸짓의 논리를 가지고 믿음과 닦음과 깨침을 각기 양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믿음의 측면에서는 '조신'과 '교신'의 관계이고,

닦음의 측면에서는 '조신'적  닦음과 '교신'적 닦음이며,

깨침의 측면에서는 '조신'적 '깨침'과 '교신'적 '깨달음'이다.

 '조신'과 '교신', '조신'적 닦음과 '교신'적 닦음, '조신'적 깨침과 '교신'적 깨달음 등의 양자적 관계는 각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양자는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인 묘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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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05 06: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신 분들께 유용한 글 인듯 해요~
    잘 보고 갑니다 ^^

  2. 청결원 2014.11.05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3. 죽풍 2014.11.05 08: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무의 가지는 용이고, 뿌리는 체라는 글귀에서 본말론과
    진속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네요.
    오늘도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 ^^

  4. 한콩이 2014.11.05 09: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철학 어렵긴하지만
    잘보고갑니다 ㅎ

  5. 뉴론7 2014.11.05 09: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감니다 좋은하루되세요

  6. 브라질리언 2014.11.05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불고의 철학은 정말 멋있는것 같아요.

  7. 반이. 2014.11.05 15: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8. 유라준 2014.11.05 22: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은 좀 어려운 내용인데, 그래도 쉽게 설명해주셔서 한번쯤 생각해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9. 리뷰맨77 2014.11.05 22: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아시아 철학..좀 어렵지만..그래도 이해는 될 것 같아요^^

동아시아 철학의 새로운 사유방식의 틀 -

 (1) 『깨침과 깨달음』의 문제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원정근 박사)

 

 

 

 

 

 

 

 

 

 

 

 

『깨침과 깨달음』은 1983년 박성배 교수가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출판한 책 'Buddhist and Sudden Enightenment 불교인의 믿음과 몰록 깨침(頓悟)'을 윤원철이 번역한 것이다. 20여년 전(2002년 번역 출판)에 출판한 이 책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새삼 우리말로 다시 번역한 것은 어떤 현재적 의미가 있는 것일까?

 

 

 

박성배 교수는『 깨침과 깨달』음이라는 "이 책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깨침과 깨달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밝히기 위해서였다"고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를 뚜렷하게 드러내려는 것이 『깨침과 깨달음』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라고 한다. 그러나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는 박성배교수가 처음으로 제기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성철스님이 1981년에 이미 『선문정로』에서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를 명확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박성배교수가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에 주목한 것은 불교철학의 오랜 쟁점을 이루던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성배교수는 깨침과 깨달음의 차이를 중심으로 '돈점논쟁'을 해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동아시아 불교철학의 핵심적인 사유구조의 틀이었던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본체와 작용)

 

 

 

 

 

 

 

 

 

 

 

박성배교수는 '체와 용의 논리'를 중심으로 깨침의 문제를 믿음과 닦음의 문제로 그 외연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동아시아 불교철학의 중심과제라고 볼 수 있는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믿음의 관점에서 삼위일체성을 지닌 것으로 명쾌하게 풀이함으로써 불교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박성배교수는 『깨침과 깨달음』을 저술한 근본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닦음과 깨침이 올바르려면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현대 불교학에서는 믿음의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믿음의 문제에 주목함으로써 불교학이 봉착하는 여러 가지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 이 연구의 의도이기도 했다. 교리의 이해와 실행 사이에 놓인 괴리는 올바른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없앨 수 있다. 닦음과 깨침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증론證論, 즉 닦음과 깨침의 이론에서도 믿음은 핵심적 역할을 한다."

 

 

 

 

박성배교수는 『깨침과 깨달음』은 '체와 용의 논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믿음, 닦음, 깨침이 어떻게 각기 개별적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삼위일체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해명하는 데 그 궁극적 목표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박성배교수는 영문판 서문에서 "이 책에서 나는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믿음(信), 닦음(行), 깨침(證)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라고 한다. 즉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셋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셋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박성배교수의 『깨침과 깨달음』의 문제제기가 단순히 불교철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철학의 근본물음에까지 확대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아시아 철학이 제각기 문제를 바라보는 진단책과 처방책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사유구조의 틀이라는 측면에서 유사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깨침과 깨달음』에 나타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체용불이體用不二'의 사유방식을 중심으로 믿음과 닦음과 깨침의 삼위일체적 관계를 논술하고, 그것이 증산도의 '양전兩全'의 사유방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동아시아 철학에서 제기된 사유방식의 구조들이 현대문명의 한계점을 극복하고 21세기 새로운 우주문명을 건설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되새겨보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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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4.11.04 06: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달음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분들에게
    정말 좋은 정보 네요 ^^
    즐거운 하루되세요~

  2. 뉴론7 2014.11.04 08: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내용 잘보고 갑니다 좋은하루되세요

  3. 브라질리언 2014.11.04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항상 생각해고 새로운 것을 배워가는게 좋은 것 같아요.

  4. 죽풍 2014.11.04 1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까지 어느 것이 옳다는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성철스님께서 큰 문제를 제기하셨지요.
    ...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 보려 합니다.
    좋은 책 소개 잘 보고 갑니다. ^^

  5. 명태랑 짜오기 2014.11.04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믿음과 닦음과 깨침이 셋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유기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6. 반이. 2014.11.04 14: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_^

  7. 세상속에서 2014.11.04 15: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침과 깨달음 포스팅 감사히 봤습니다.

  8. 광주랑 2014.11.04 17: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광주공식블로그 광주랑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
    광주랑 블로그에서는 광주시청사 리노베이션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http://saygj.com/5608

  9. 유라준 2014.11.04 22: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침과 깨달음이 서로 다른 거였군요.
    예전에 성철스님이 그 차이점을 명확히 했다니,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0. 리뷰맨77 2014.11.04 23: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깨침, 깨달음..정말로 어려워요..^^

고대 로마의 테양신 숭배와 기독교(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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