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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국헌신군인본분의 강인한 의지와 초연한 자세를 보여준 대한의군 참모중장

3월 26일은 대한(大韓)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 순국일

 

 

 

 

 

 

 

 

 

 

 

 

 

죽음을 앞둔 안중근 의사는 국권이 회복되면 자신의 유해를 조국으로 옮겨서 장사지내 달라고 마지막 유언을 하셨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31세 젊은 청년의 유해는 10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못 찾고 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백범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가 잠들어 계신 효창공원에는 31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주인을 기다리고 가묘가 있습니다.

 

 

2019년은 3.1만세 혁명 100주년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0년 3월 26일 나라를 위해 자신의 한 몸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의 순국일이며, 올해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지 109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민족정신을 바로 세운 역사학자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가 자주정신을 잃고 산 역사를 개탄했습니다.

 

 

지난 천여 년 동안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한국을 위한 예수, 석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가 점령한 한국, 석가가 점령한 한국, 공자가 점령한 한국이 되어 노예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자주적 역사관에 대한 우려와 걱정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가 자신이 신앙했던 천주교로부터 일개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습니다. 천주교 교단은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안중근 의사를 교인 명부에서 지워버렸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규정한 것은 아니고 천주교 교단이 살인자로 낙인찍었습니다.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직전 뤼순 감옥을 방문한 빌렘 신부는 천주교로부터 징계를 받고 본국으로 소환됐습니다.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앙인이었지만, 그에 앞서 대한의 백성이었고, 조국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조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의 평화를 파괴한 이등박문을 사살한 하얼빈 의거를 결심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독립투사로써 실행한 하얼빈 의거는 종교적 이념과는 별개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군인의 본분을 실천한 것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등방문을 사살하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지 84년이 지난 1993년 천주교 신자로 복권?시켰습니다.

 

 

일제는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일제의 강점이 끝난 광복 후에도 대한민국의 천주교는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를 '살인자'로 규정하고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84년이 지난 후에야 천주교 신자로 대우?해 줬습니다.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의 높은 뜻을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3년 안중근 숭모회가 설립됐습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살신성인과 평화사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안중근의사숭모회 1대, 3대 이사장은 윤치영입니다.

 

 

 

우리 역사 왜곡 조작의 심장부인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윤치영은 대표적인 친일파 집안으로 형제와 사촌까지 친일파입니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지낸 이은상과 백두진 역시 친일파입니다.

 

그리고 친일파와 위정자들은 성역화 사업이라는 미명하에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3월 26일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 109주기 순국일입니다.

민족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한 개인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니라 국권을 침탈한 일제에 맞선 대한의군의 독립전쟁으로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얼빈 의거를 실행했습니다. 

 

 

 

민족의 원흉 이등박문을 사살한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내적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후손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고, 외적으로는 대인대의(大仁大義)한 평화사상을 만천하에 알린 것입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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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9.03.26 03: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위대한 영웅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 3월 26일이군요? 오늘이네요? 한 몸을 조국에 바쳐 독립운동을 해주신것. 너무나 감사한 마음입니다.

  2. kangdante 2019.03.26 0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난 역사를 잊지 말아야겠지만
    지난 역사에 매몰되어 미래를 잊어서도 안될 것 같아요..

  3. 죽풍 2019.03.26 21: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우리나라와 민족과는 전혀 상관없고 자본주의의 얄팍한 상술로 들어온 밸런타인데이

1910년 2월 14일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

 

 

 

 

 

 

 

 

 

 

 

 

흔히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우리의 문화는 아니고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날이라고 합니다. 

 

 

밸런타인데이가 시작된 서구에서는 그 의미가 퇴색해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돈에 눈이 먼 기업이 얄팍한 상술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는 날이 되어 있습니다. 밸런타인데이는 불과 30여 년 전 일본의 천박한 자본주의 상술이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2019년은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조선 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낸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하얼빈 의거 110주년이 되는 해이며, 3.1만세 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2018년 인기리에 방영된 <미스터 션사인>이란 드라마에도 나오듯이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병탄 이전부터 무고한 백성을 무참히 살육했습니다.

 

 

1894년 동학 혁명군 30만 명 대학살과 1895년 조선의 국모(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를 무참히 살해한 이후 전국 각지에서 잔인무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에 분개한 항일 의병이 일어났고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이 들어갔습니다.

 

 

1905년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을사5적과 이토 히로부미는 총칼로 고종황제를 위협했지만, 황제의 동의도 없고 국새도 찍히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체결한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무효입니다.

 

 

 

 

 

 

 

 

 

 

1905년 강압적인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겼고, 1906년 조선 통감부 설치,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등 사실상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1910년은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한일병탄이 이뤄진 해이지만, 사실상 1905년 을사늑약부터 한일병탄이 시작된 것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이후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인도되었습니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서 일본 관동도독부 검찰관 미조부치타카오에게 신문을 받습니다.

이때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유 15가지를 말하는데,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을 가장 큰 이유는 대한의 독립과 동양평화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을 받을 당시부터 2월 14일 사형선고일 이후에도 줄곧 민간인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뤼순 감옥으로 압송하기 위한 열차가 1909년 11월 1일 하얼빈역에서 출발해 11월 3일 순(여순)감옥에 도착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월 3일부터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1910년 3일 26일까지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1910년 2월 7일 1차 공판이 있었고, 재판장과 검찰관, 그리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지정한 관선변호사 역시 일본인이었습니다.

2월 7일부터 12일까지 여섯 차례가 열렸고,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조국의 자주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당당하게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라고 말했습니다. 항일 의병부대 대한의군은 총독 이범윤, 총대장 인석, 대장 전제덕과 김영선, 좌영장 엄인섭이며, 우영장이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몇 년 전 이태룡 의병연구소장은 유인석 총대장의 아들 유해동 선생이 쓴 <의암류선생약사> 내용을 근거로 연해주지역 의병연합조직인 13도의군이 1910년 6월 조직된 것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이었던 1909년 6월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정된 관선변호사지만, 그나마 안중근 의사를 위한 최소한의 변론마저도 무시된 채 1910년 2월 14일 중국 뤼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關東都督府) 지방재판소에서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혐의일본 형법을 적용해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며,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일은 3월 26일입니다.

1910년 3월 26일 아침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 아침 뤼순 감옥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에게 글 한 점을 남겨 주었습니다.

 

 

 

 

 

 

 

 

 

 

뤼순 감옥에 갇혀있던 안중근 의사의 담당 간수는 치바 도시치로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안중근 의사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애국심과 고한 신념, 당당한 의기와 인품에 감동하여 평생 존경하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안중근 의사를 위해 명복을 빌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일본 제국주의 고등법원이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날입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인 2월 14일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밸런타인데이가 점령해버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안중근 의사의 거룩한 삶과 넋을 기리며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부끄럽게도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면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보다 못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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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블프라이스 2019.02.14 04: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발렌타인 데이하면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알고 잇엇는데요, 우리의 문화는 아니고 고대 로마에서 유래된 날이군요? 오늘 몰랐던 내용을 덕분에ㅡ알고 갑니다^^

  2. 청결원 2019.02.14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3. kangdante 2019.02.14 07: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는 영웅이고 열사이지만
    일본에서는 암살자겠지요
    요즘 우리 사회를 보노라면
    이런 내로남불이 많은 것 같아요

  4. 죽풍 2019.02.14 2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히로히토부미를 사살한 날과 박정희가 부하의 총탄에 맞아 죽은 날이
    공교롭게도 십이육인 10월 26일입니다.
    안중근 의사 죽음을 맞아 고개 숙여 명복을 빕니다.
    잘 보고 갑니다.

1909년 10월 26일 대한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 의사

국가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사살

 

 

 

 

 

 

 

 

 

 

 

 

 

 

 

일본 제국주의가 무력을 앞세운 폭거(暴擧),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늑약을 계기로 일제의 강압에 항의하고 주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191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합병한 치욕적인 날로 대한제국 패망일이다.

 

1910년에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대한제국의 백성이 나라의 주권을 찾고, 일본 제국주의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조직한 것이 의병(義兵)이다.

의군(義軍)은 의병(義兵)과 같은 말이다.

 

 

 

 

 

 

 

 

 

 

 

 

 

 

안중근 의사(1979~1910)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고 대한제국의 백성(국민)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 중장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대한의군은 일제의 강압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고 불의에 항거한 대한제국의 의병을 뜻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세 번 외쳤다는 러시아 말 '코레아 우레'는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고 '대한제국 만세', 또는 '대한 만세'로 번역해야 맞다.

 

 

 

 

 

 

 

 

 

 

 

 

 

 

1909년 10월 30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사살하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중 밝힌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보면 더 명백하다.

 

 

'이토를 죽인 15가지 이유' 중 1, 2, 3, 5번째 이유를 보면 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외친 말이 '대한민국 만세'가 아닌 '대한제국 만세', 또는 '대한 만세'로 해석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대한제국 황후)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이며, 두 번째는 (대한제국)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이다.

세 번째는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7조약,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은) 죄이고, 다섯 번째는 (대한제국의) 정권을 강제로 뺏은 죄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패망하고 고종황제가 승하하면서 촉발된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대한민국(大韓民國)' 국호가 정해졌다.

 

 

 

안중근 의사의 '대한독립'은자주독립국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뺴앗긴 주권을 되찾자는 의미이고,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이후 외친 '대한독립 만세'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공화정체제의 대한민국을 전제로 한 외침이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이등박문(1841~1909, 이토 히로부미)이 대한제국 고종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하고, 이완용, 박제순, 이근용, 이근택, 권중현 등 을사오적과 함께 대한제국의 외교 주권을 빼앗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는 것을 보고 국권 회복운동에 나섰다. 

 

 

 

 

1907년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보낸 사건으로 강제 퇴위 당하고, 일제에 의해 1907년 정미7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하자 안중근 의사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조슈번에서 농민 출신가난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중간계급의 이토 다케베에의 양자로 들어갔다.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막부정권 타도를 외치며 일본 왕 메이지를 도와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주도한 인물로 일본의 근대화와 군국주의를 이끌게 된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제국주의 초대 귀족원 의장과 초대 내각총리대신, 5대, 7대, 10대 내각총리를 역임하고, 1906년~1909년까지 조선 통감부 통감을 지냈다. 통감에서 물러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 의장에 임명됐다.

 

 

 

일본 제국주의는 1909년 8월에 이미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을 결정하였고, 러시아를 방문하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기차에서 내려 걸어오던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했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왕 다음가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사살했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제로 침탈한 장본인이며 민족의 원흉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코레아 우레, 즉 '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외친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전국 팔도와 만주 등지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활동했다.

대한의군(大韓義軍)은 대한제국의 정식 군대는 아니지만, 대한제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대한제국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의병(義兵) 군대, 즉 대한의군(大韓義軍)이다.

 

 

 

 

 

 

 

 

 

 

 

 

 

1910년 3월 25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위국헌신(爲國獻身) 군인본분(軍人本分)'이란 글을 일본 간수 치바 도시치에서 써주었다.

 

 

32살의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사형이 집행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으며, 유해는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으나 찾지 못하고 있다. 효창공원에는 주인 없는 헛무덤 안중근 의사의 가묘만이 있다.

 

 

 

일본인 치바 도시치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라는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유묵을 불단에 바치고 평생 안중근 의사의 명복을 빌었다.

 

 

 

 

 

 

 

 

 

 

 

 

 

1963년 '안중근 의사 숭모회'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표상과도 같은 안중근 의사를 우러러 사모하는 모임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의 초기 이사장과 간부 중 친일파 전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10월 26일은 한 명의 일본인과 한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죽은 날이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사살한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 사관학교 2기로 졸업한 김재규(1926~1980)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을 저격한다.

 

 

대한민국 5~9대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충보국(盡忠報國, 충성을 다하여 국가의 보답 한다.) 멸사봉공(滅私奉公, 사를 버리고 나라를 위해서 힘써 일한다.)의 혈서를 쓰고 만주 육군 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2기로 졸업하였다.

일본 육사에 편입하여 57기로 졸업했고 5·16 쿠데타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10월 유신(十月維新)을 단행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광복 후 조선국방경비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로 졸업한 육사 동기생이다.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항일 독립운동을 한 집안은 3대가 망하고 친일파 집안은 3대가 흥한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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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프다 2016.10.27 0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너무 잘 읽고 갑니다.

증산도 도전道典 - 천지공사

안중근 의사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 저격

 

 

 

 

 

 

 

 

 

 

1895년 무지막지한 일본에 의해 조선의 국모(國母) 민중전(대한제국 선포 후 명성황후로 추존)이 시해될 때 일본의 총리대신은 이등박문이었고, 당시 시해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의 임명권자도 이등박문이었다. 

 

 

이등박문은 대한제국을 침략한 민족의 원흉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 근대화의 주역이었으며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 데 공헌한 인물이었다. 이등박문은 일본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독의 지위에 있었고, 작위도 생전 백작에서 사후 최고 작위인 공작에 추증되었다. 그의 직위와 작위가 보여 주듯 이등박문은 일본 근대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였다.

 

 

 

 

 

 

 

 

 

 

 

 

 

 

이등박문은 일본 제국주의 제1대, 제5대, 제7대, 제10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며, 제1대, 제3대, 제8대, 제10대 추밀원 의장, 귀족원 의장 등을 지냈다.

 

 

일제가 1905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조선) 고종황제를 협박하고 강제적으로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사늑약)을 일본 제국주의와 대한제국이 동등하게 체결한 협약이라는 의미로 우리는 그동안 을사조약(을사조약)이라고 사용해 왔다.

일제가 강압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10년 한일강제병탄으로 한반도를 완전한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은 일본 특명전권대사로 을사늑약을 주도했다.

1906년 일본 제국주가 대한제국에 설치한  조선 통감부 제1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고종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였고, 군대해산을 주도하기도 했다. 1909년 6월 조선 총독(통감)을 사임하고 일본 왕의 자문기관인 추밀원 의장으로 물러났으나, 이등박문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1909년 10월 26일까지 대한제국(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강제병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하고 부친의 사망으로 귀국하였다가, 일제의 고종황제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한일신협약) 체결,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목도하고 의병활동을 하며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의병부대 창설과 비밀결사조직 단지동맹을 만들었다.

 

 

일제는 1909년 7월 6일에 이미 대한제국을 완전 식민지화하는 강제 병탄을 의결하여 일왕의 재가를 받아놓았고, 이등방문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와 청나라(중국)의 양해를 받고 몽골에 대한 지배권도 러시아와 협상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향해 3발을 명중시켜 저격하였다. 대한남아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무신(戊申, 1908)년 증산 상제님께서는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저격 천지공사를 보실 때도 동음(同音)을 취해서 공사를 보셨다.

또, 증산도 『도전道典』 5편 365장에는 기유(己酉, 1909)년 봄에 상제님께서 직접 조선 통감부를 가시어 이등박문을 만나 천지공사를 보신 내용도 있다.

 

 

 

 

 

 

 

 

 

 

일등방문(一等方文)과 이등박문(伊藤博文, 이등방문二等方文)

 

이 공사는 세운(世運, 세상이 흘러가는 역사 판도)으로는 민족의 원흉을 척살하는 의미도 있지만. 도운(道運, 증산도가 흘러가는 역사 판도) 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공사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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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01.13 06: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아쿠나 2016.01.13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의사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분들께
    유용한 글 저도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수요일 되세요 ^^

  3. 죽풍 2016.01.13 09: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도 일제 앞잡이가 이 땅을 유린하고 떵떵거리고 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처단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4. 훈잉 2016.01.13 1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5. 비키니짐(VKNY GYM) 2016.01.13 11: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좋은글 잘 보고갑니다.^^

  6. 뉴론♥ 2016.01.13 11: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 의사는 언제나 시간이
    지나도 잊지 말아야 겠어요

  7.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6.01.13 11: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자세히 몰랐던 내용이네요 ㅎ
    잘알고 갑니다

  8. 유라준 2016.01.13 19: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통쾌한 의거였던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참 군인의 표상이며 한韓민족의 불멸의 혼,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동방에서는 예로부터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생사화복과 깨달음, 불로장생과 부귀영화와 함께 사람이 죽은 사후(死後, 영혼)의 삶까지를 주관하는 별로 우주의 주재자(상제님), 하나님이 계신 별 북두칠성을 극진하게 섬겨왔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首陽山) 아래에서 순흥(順興) 안(安)씨 26대손으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의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백천 조씨 사이에서 장남(3남 1녀)으로 태어난 어린 안중근의 가슴과 배에 북두칠성(北斗七星)의 흑점이 있었다. 

집안에서는 북두칠성의 기운이 감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안중근의 아명을 안응칠(安應七)이라 지어 불렀다. 

 

 

 

 

 

 

 

 

안중근 의사는 1894 갑오년 김아려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으며, 당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아버지 안태훈을 도와 진압하기도 했다. 이때 동학접주로 있던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만남은 우리 항일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19세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을 하게 된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강압하여결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아버지 안태훈 마저 돌아가시자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를 설립해 문무쌍전에 입각한 민족 교육을 하는 한편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다.

 

 

초대 조선 통감으로 있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대한제국 고종황제(광무제)를 강제 퇴위시키며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강제 점령하기 위한 예비 조치 정미(정미) 7조약을 맺게 된다. 

 

안중근 의사는 어머니와 부인, 첫째와 둘째, 그리고 갓 태어난 막내아들을 남겨두고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안중근 의사의 당시 심정을 대변하며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누가 처자를 어여삐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열사가 나라를 위함에는 가족까지 희생하는 법이니, 나라 사랑과 아내 사랑은 서로 같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간도를 지나 연해주로 온 안중근 의사는 의인 지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부대를 창설해 300여 명을 지휘하는 참모중장이 되어 의병들의 훈련과 사상교육을 하며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인간 안중근에서 위대한 영혼을 가진 참 군인의 표상으로 대한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염원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한민족 불멸의 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동의회 부대는 수차례의 전투 끝에 회령군 영산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를 당하며 러시아 엔치아(노우키에프스크) 피신하게 된다.

 

 

 

 

 

 

 

 

생사를 같이하며 조국독립 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11명이 단지동맹(斷指同盟, 정천동맹正天同盟)을 한다.

 

단군기원 4242년 음력 2월 7일, 서력 1909년 기유년 2월 26일, 러시아 엔치아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로 자신의 외손 무명지를 자르고 태극기 위에 피로 혈서를 썼다. 단지동맹은 일본군에 의해 패배로 떨어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과 동지들의 위상 회복과 국권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이등박문이 만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안중근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열렬히 외치는 환영 인파에서 나와 발사한 총에서는 일곱 발의 총성이 울렸다.

 

특별열차를 타고 나온 이등박문의 가슴에 네 발을 발사하여 세 발이 이등박문에 명중하고 나머지 세 발은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주 철도 이사를 쏘았다. 나머지 한 발은 다음 전쟁을 위해 남겨 놓았으며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라고 세 번을 외친 후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순순히 잡힌다.

 

 

 

 

 

 

 

 

 

1909년 10월 26일 이등박문이 하얼빈에 도착 하기전 이미 7월 6일에 일본 각의에서는 대한제국 병탄을 의결하고 일왕의 재가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이등박문의 하얼빈 방문은 러시아와 중국(청나라)의 양해를 받기 위해 방문하였던 것이며, 몽골에 대한 지배권도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하려고 했었다.

 

참 군인의 표상이며 위대한 영혼을 가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은 사형집행일에 그동안 경비를 섰던 일본군 헌병 도시치가 휘호를 부탁한 일이 생각나서 즉석에서 책상 위에 비단 천을 펴놓고 마음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한 뒤 글을 썼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어머니께서 보내주신 흰 명주 저고리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우리 대한제국이 독립해야 동양평화가 보존될 수 있고, 일본도 위기를 면하게 될 것이다."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한민족 불멸의 혼이 되어 순국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한남아로서의 기개와 당당함을 잃지 않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심과 의기로 소중한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

동양의 평화를 넘어 세계평화와 인류의 평화 행복을 추구한 인간 안중근!

진정으로 위대한 영혼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참 군인의 표상이다.

 

 

 

 

 

 

 

 

안중근 장군이 동생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어 귀신이 되어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치겠다는 장군의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든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의 유해는 순국한지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였으며, 광복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는 안중근 장군의 주인없는 가묘만 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열사(烈士)와 의사(義士)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열사(烈士): 맨몸으로써 정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

의사(義士): 무력으로 항거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

 

 

표준한국어국어사전에서는 열사와 의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열사(烈士):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의사(義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재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의로운 사람

 

 

 

 

 

 

 

 

안중근 의사는 순국하는 그날까지 시종일관 자신을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등박문을 처단하면서 만국공법에 의해 전쟁포로의 자격으로 대우받기를 원했고 순국하는 그날까지 대한의군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의 수괴를 처단했다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이 뒤를 이어 극렬한 무장 투쟁이 있었다.

이에 대한제국의 무력은 의병들에 의해 계승되었고, 그 선봉에 안중근 장군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안중근 장군이 일제와 전쟁을 벌였던 대한제국 장교의 신분으로 이등박문을 처단했기 때문에 '의사'나 '열사' 보다는 '장군'이란 호칭이 도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처럼...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1910년 경술 2월 15일 사형선고 이튿날 작성한 유언)

 

 

 

 

 

 

남아유지출양외

男兒有志出洋外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

 

사불입모난처신

事不入謨難處身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

 

망수동포서유혈

望須同胞誓流血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

 

막작세간무의신

莫作世間無義神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자.

(회령군 영산 전투에서 참패한 후 안중근 장군이 상심한 대원들을 격려한 시)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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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10.25 0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 의사의 관해 잘 보고 가네요

  2. 뉴론♥ 2015.10.25 13: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시간이 지나도 안중근 의사를 잊지 말아야 겠어여
    주말인데 도생님은 머하고 계신가요 ??

  3. 유라준 2015.10.25 1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중근 의상의 생애는 언제 읽어도 존경스럽고 경이롭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