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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 명언

by 도생(道生) 2016. 2. 20.

20세기 성자, 밀림의 성자,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며

인류애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명언

 

 

 

 

 

 

 

 

 

 

 

우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지구촌 근현대사 남긴 발자취가 얼마나 큰지 증명하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의학분야에서 그의 봉사정신 닮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어느 지역의 슈바이처, 대한민국의 슈바이처, 어느 대륙의 슈바이처 등으로 부르고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를 위한 목적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의료환경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의사 신분을 가지고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으로 헌신하며 인술을 펼치기 위해 아프리카에 건너갈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로서 선교를 통해 아프리카 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을 시키기 위해 의학을 배워 아프리카로 들어가기로 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 지역 알자스 카이제르스부르크(당시 독일령)에서 목사의 아들로 1875년에 태어났다. 슈바이처 박사가 태어난 알자스는 프랑스 영토에서 독일의 영토로,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된 곳이다. 그래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국적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꾸게 된다.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한 슈바이처는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고,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에 대한 연구로 바흐 음악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오르간 연주는 유럽에 머물 때면 아프리카 선교와 병원 건립에 필요한 돈을 모금하기 위하여 연주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독일군에 복무하면서 대학교 공부를 병행 하였고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회의 목사와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슈바이처는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결혼 후 부인 헬레네 브레슬라우는 간호학을 공부하여 면허를 취득했다.

 

슈바이처 부부는 자신들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1913년 프랑스령 아프리카(가봉) 랑바레네에서 선교와 의료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1965년 사망하기까지 52년 동안 선교와 의료 비용(약제 구매, 병원 건립 등)을 조달하기 위해 10여 차례 유럽을 가며 강연회와 출판, 연주회 등으로 모금하였다. 그는 약 37년간을 아프리카에서 머무르며 의료봉사를 했다.

 

 

 

 

 

 

 

 

 

 

 

종교적 신념을 갖고 선교를 목적으로 시작한 의료봉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를 초월하여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류애를 실천하고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철학자로서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과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기독교 교리에 논란이 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철학자, 신학자, 음악가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세상 사람의 눈에는 당시 지구촌 문명의 오지 아프리카에서 희생과 봉사의 의술을 펼친 아프리카의 성자, 밀림의 성자, 20세기 성자,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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