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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 효봉 큰스님과 법정 스님

by 도생(道生) 2016. 5. 14.

스승과 제자 -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 큰스님과 법정 스님

 

 

 

 

 

 

오늘 석가탄신일과 내일 스승의 날을 맞아 근현대사 우리나라 불교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스승과 제자인 효봉 큰스님과 법정 스님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된 시기는 4세기경이라 하니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도 벌써 약 1600여 년이나 되었다.

우리나라 불교 천 육백 년 역사 동안 수많은 고승과 불사가 있었다.

 

우리나라 불교 1,600년 역사에서 근현대사에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가장 많은 선승이 동시대에 나타나 중생들과 함께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 대선사를 시작으로 이 시대 마지막 선승이라 불리는 전강 대선사의 제자 송담 스님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 130여 년의 시간 동안 많은 고승의 활동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1888 ~ 1966)

 

 

 

 

 

근현대사의 많은 고승 중에서 절구통 수좌, 엿장수 스님, 정진 제일(精進第一), 판사출신 스님 등 수많은 수식어를 달고 사셨던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한 효봉 큰 스님은 일제강점기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판사 근무하였다.

 

판사가 독립투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증오의 눈으로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던 사형수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매일 밤낮을 괴로워하다 10년간의 판사생활을 그만둔다.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투사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는 암담한 현실과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인간 이찬형은 고뇌하였다. 

 

 

만주 등지를 떠돌며 방황하다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입고 있던 양복을 팔아 허드레 바지저고리와 엿 목판을 사고 3년여를 누더기 옷을 입고 조선 팔도를 누비며 엿장수로 고행(苦行)하며 살았다.

 

 

1925년 38세의 이찬형은 금강산 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 석두(石頭) 화상으로부터 사미계를 받고 원명(元明)이라는 법명을 받아 출가하였다. 6년간의 용맹정진 중 1년 반 동안은 토굴 속에서 필사적인 용맹정진 끝에 1930년 효봉 큰스님은 한소식을 듣고 토굴 밖으로 나온다.

 

 

 

효봉 큰스님 오도송

 

해저연소록포람(海底燕巢鹿抱卵)

화중주실어전다(火中蛛室魚煎茶)

차가소식수능식(此家消息誰能識)

백운서비월동주(白雲西飛月東走)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가야산 해인사 가야총림 초대 방장과 승단정화운동 시기에 조계종 비구 승단의 제4대 종정을 역임하였고, 불교 정화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며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의 초대 종정을 지냈다.

 

 

효봉 큰스님은 언제나 정혜쌍수(定慧雙修,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를 강조하였다.

효봉 큰스님은 언제나 근검절약하고 청규(淸規, 청정한 규칙)에 엄격하였다.

 

초에 불을 붙이면 흘러내린 촛농을 다시 받아 심지를 넣고 다시 불을 붙여 사용하였고, 걸레도 힘이 주어 짜면 빨리 떨어진다고 살살 짜라고 할 정도였다. 또 밥알 하나만 흘려도 불호령을 내렸으며, 수행자는 시간관념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혹 수행자가 다른 사람의 말을 하면 '너나 잘해라.'라는 말을 하며 자기관리에 철저하라고 하였다. 

 

 

 

6년의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수시로 토굴에 들어가 용맹정진하는 효봉 큰스님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 사이에 절구통 수좌, 정진 제일(精進第一) 효봉이라고 회자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를 떠나 피난 다니다 통영으로 내려온 효봉 큰스님은 제자들과 미륵산이 있는 통영 미륵도에 미륵불을 기다리는 절이란 이름의 미래사(彌來寺)를 만든다.

 

효봉 큰스님의 제자로는 상좌였던 구산 스님, 법정 스님, 그리고 우리에게 시인으로 잘 알려진 고은(법명 일초) 외 많은 제자가 있다. 1966년 10월 15일 78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다.

 

 

 

효봉 큰스님 열반송

 

오설일체법(吾說一切法)

도시조병모(都是早騈拇)

약문금일사(若問今日事)

월인어천강(月印於千江)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이 일천 강물에 비치리니

 

 

 

 

 

 

(1932~ 2010)

 

 

 

 

 

법정 스님은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분이다.

법정 스님은 출가한 이후 스승의 가르침대로 무소유의 청빈한 삶으로 살았으며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무소유를 실천하며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을 다니던 박재철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서울에서 스승 효봉 큰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한다.

통영 미래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하여 1956년 스승 효봉 큰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자신의 신앙적 사상과 구도자로서의 모습을 만들어 나간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스승 효봉 큰스님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75년 수필집 무소유 발간을 시작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알기 쉽고 편안한 수필형식으로 일반대중들에게 전하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교에서 선승들의 위계질서는 세속의 그 어떤 조직 이상으로 위계질서가 강력하고 철저하다.

법정 스님은 엄하기로 소문났던 성철 스님을 비판하기도 하고, 때론 따져 물을 정도로 뱃심도 대단한 스님이었다.

 

가야산 호랑이로 소문이 자자했던 성철 스님이지만 20년의 나이와 구도(求道) 차이에 얽매이지 않고 법정 스님과는 격 없이 말을 나누었다.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엄격했던 성철 스님은 법정 스님의 올곧은 수행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출가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지를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다. 하다못해 사찰에서 총무 재무, 교무 등을 말하는 삼직도 맡은 적이 없다. 세상에서는 길상사가 큰 이슈거리였지만 수행자 법정 스님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철저한 구도자, 수행자로서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은 제자 법정 스님은 스승이신 효봉 큰스님을 언제나 존경하였다.

효봉 큰스님과 법정 스님 두 분은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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