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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한민족9천년 역사)

환단고기 - 단군조선(고조선)과 기자조선

by 도생(道生) 2016. 5. 19.

중국과 일본에 의한 한韓민족 역사 왜곡

동북아 5대 역사 조작극 - 기자조선(箕子朝鮮)

환단고기 - 단군조선(고조선)과 기자조선

 

 

 

 

 

 

 

 

 

 

 

중화 중심주의 중국 사가(史家)와 고려, 조선 시대 사대주의 신봉자들이 조작하여

중국사로 예속시킨 한韓민족사의 뿌리 역사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

 

 

 

환단고기 - 군세기

 

신해원년

辛亥元年

 

정해삼십칠년      기자    사거서화       사절인사

丁亥三十七年이라 箕子가 徙居西華하야 謝絶人事하니라.

 

솔나단군의 재위 원년은 신해(환기 6048, 신시개천 2748, 단기 1184, BCE 1150)년이다.

재위 37년 정해(단기 1220, BCE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살면서 인사를 사절하였다.

 

 

 

 

 

 

 

 

 

 

기자조선, 기자(箕子)의 나라 조선(朝鮮)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서에는 좀처럼 조선이라는 국호(國號, 나라 이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며 동양을 대표하는 역사서로 평가받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 본기本紀에서도 조선(朝鮮)이라는 호칭을 전혀 쓰고 있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본기(本紀, 12권), (表, 10권), (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등 총 13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후들의 역사를 담은 사마천의 사기 - 세가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고 하며 갑자기 조선(朝鮮)이란 나라 이름을 썼습니다.

'

 

 

 

 

 

 

 

 

 

중국 역사서에서는 조선(朝鮮)이라는 국호(國號, 나라 이름)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예(濊), 맥(貊), 발(發), 숙신(肅愼), 우이(于夷), 내이(萊夷), 견이(畎夷), 서이(徐夷), 고죽(孤竹), 고이(高夷), 등과 같은 단군조선(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조선이라는 국호 대신 다른 호칭을 써서 조선이라는 국가 이름 자체를 철저하게 제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역사가들은 사마천 사기 세가의 '봉기자어조선, 기자를 봉하여 조선에 봉했다.'라는 것을 근거로 '조선의 역사가 약 삼천 백 년 前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기자조선에서 시작됐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기자(箕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기자는 상나라 말기에 비간(比干)과 미자(微子)와 함께 상나라 삼현(三賢)으로 불렸습니다.

비간은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에게 정치를 간하다가 사형당하고, 미자는 비간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였습니다.

기자는 일부러 미친 척하여 주왕의 미움을 사 감금됩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사기史記에서 전해진 기자조선의 내력입니다.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업한 무왕이 감옥에 감금되어 있던 기자를 풀어 주었고, 상나라의 신하였던 기자는 주나라 무왕에게 풀려난 것을 부끄러워하며 '조선(朝鮮)으로 떠나버렸다. (주지조선走之朝鮮)'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무왕은 기자의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여 주나라의 제후가 되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기자의 기록을 보면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는 '기자가 책봉을 받은 후 신하의 예를 행하기 위해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를 설명하였다.'라고 나오는 반면 사기史記에는 '기자가 책봉을 받았지만 주나라 무왕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 (이불신야而不臣也)'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기자가 조선으로 떠나 버렸다는 말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바로 단군조선(고조선)입니다.

 

 

또, 사마천 사기史記』의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기자를 제후로 임명하였다.'라고 말한 다음 '신하로 삼지 못했다.'라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나라 무왕의 제후로 봉해지면 신하가 되는 것인데 '신하가 되지 않았다.'라고 상반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의 대표적인 역사서, 사마천 『사기』가 조작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물론 사기의 모든 부분이 조작된 것은 아니지만, 특히 한韓민족에 대한 기록에 상당 부분은 왜곡해 놓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상나라가 멸망하면서 기자가 조선에 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단군조선(고조선)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기자가 주나라 무왕의 신하가 된 적이 없다는 것을 사마천의 『사기』는 증명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중국 역사서에 단군조선(고조선)을 숨기려 하다가 더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중국이 날조한 기자조선을 한민족사의 뿌리로 여기고 기자를 은인(恩人)으로 받들었습니다.

기자는 고조선 서쪽 변두리를 맴돌았을 뿐 한반도 지역으로 넘어 온 적이 없건만, 고려 때 송나라 사신이 ‘그대 나라에 기자묘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황급히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북한 역사학계에서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습니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습니다.

 

 

 

기자에 관한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태원(太原)으로 이주하였고, 망명지 조선(고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의 들판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묘가 있다.)

 

 

 

 

 

 

 

 

 

 

 

환단고기 역주본 단군세기 주註 中

 

기자조선 설은 일찍이 최남선도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 고대사를 중국사에 흡수 동화시키기 위해 중화주의 천하 사상이 조작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사마천이 조작한 이 기자조선 설은 후대에 당(唐)나라와 일제 때에 사대 식민주의 사학이 공동으로 날조한 '낙랑군=평양설(한사군의 한반도 북부 위치설)'과, 일제가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합리화시키기 위해 날조한 '임나일본부설(고대 한반도 남부 가야 지방 지배설)'과 함께 한··일 동양 역사상 3대 역사 조작극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작극은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역사를 날조한 본보기인 것이다.

 

 

기자는 상나라가 망한 후 고향인 하남성 서화(西華)로 돌아가 살다가 산동성 조현(曹縣)에 묻혔다. 따라서 문헌과 고고학 유물을 수용한다면 상나라 기내(畿內)인 하남성 중남부 지역에 살던 기자국의 후손 일부가 주나라를 피해 북경과 요서 지역으로 이동, 정착하여 고조선의 제후국이 되어 왕 노릇을 하였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

 

 

 

 

 

 

 

 

 

 

 

 

 

 

 

 

퇴계 이황

만약 단군 시대라면 아득한 태고시대라 증명할 수 없고, 기자가 처음 봉해지고 나서야 겨우 문자는 통했으나 삼국 이전은 대개 논할 만한 것이 없다.

(『대동야승大東野乘』)

 

 

율곡 이이

단군이 맨 먼저 출현한 것은 문헌상 상고할 수가 없다. 삼가 생각건대, 기자께서 조선에 이르시어 우리 백성을 천한 오랑캐로 여기지 않으시고, 후하게 길러주시고 부지런히 가르쳐서...

우리나라는 기자에게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기자실기箕子實記』)

 

 

퇴계와 율곡은 중국(명나라)을 본조(本朝)와 아황조(我皇祖)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우리의 조정이고 우리의 황제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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