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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조선 12대 왕 인종대왕(비운의 왕) 이호

by 도생(道生) 2016. 9. 16.

근세조선 12대 왕 인종(仁宗)대왕(비운의 왕) 이호

 

 

 

 

 

 

 

 

 

 

 

 

 

 

조선의 11대 왕 중종대왕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는 조선의 12대 왕이 되는 인종대왕 이호(1515~1545)를 낳고 7일 만에 승하한다.

 

 

조선의 12대 왕 인종대왕 이호는 6살이 되던 1520년(중종 15)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로 책봉된 이호는 당대 최고의 인재들로부터 성군이 되기 위한 왕세자 교육을 한다.

1524년(중종 19)에 박용의 따님 반남 박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인종대왕 이호는 문정왕후가 친모(親母)가 아니지만, 친모 이상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효도했다. 

그러나 정작 인종대왕을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정성을 다해 효도했던 중종대왕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였다.

 

 

 

인종대왕이 비운의 왕이 될 것이란 징조는 세자시절 머물던 동궁 전에 원인 모를 불이 나는 등 숱한 위험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던 인간 이호의 삶이 증명하고 있다.

 

세자를 미워한 문정왕후의 소행임을 알았지만, 이렇게 죽는 것이 문정왕후(계모)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불타오르는 동궁 전에 가만히 있었다. 급기야 세자이 "이런 행동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될지 모르겠지만, 부왕에게는 불효와 불충이 된다."라고 하며 왕세자의 손을 잡고 밖으로 몸을 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543년(중종 38)년 중종대왕이 병석에 누우면서 대리청정을 시작한다.  

6살에 세자로 책봉되어 25년간 왕세자로 지내왔던 인종대왕 이호는 1544년 중종대왕이 승하하기 하루 전에 선위하면서 조선의 12대 왕으로 등극하며 가장 짧은 재위를 기록한 비운의 왕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인종대왕은 부왕(父王, 중종)께서 승하하자 몸가짐을 조심하고 음식을 가리는 등 정성을 다해 장례를 치르느라 옥체가 많이 상했다. 조선의 12대 왕으로 등극한 인종대왕 이호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현량과(賢良科)를 부활시켰다.

또, 기묘사화로 죽거나 유배되었던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을 복권하였다. 

 

 

 

인종대왕이 등극하면서 윤임비롯한 외척 세력 대윤(大尹)이 득세하여 명종(문정왕후)의 외척 세력 소윤(小尹)의 윤원로와 윤원형 등을 조정에서 밀어낸다. 

대윤(大尹) - 중종대왕의 두 번째 왕비 정경왕후의 형제 윤임, 윤여필 등

소윤(小尹) - 중종대왕의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의 형제 윤원량, 윤원로, 윤원형 등

 

 

 

 

인종대왕은 뛰어 학식에 지극한 효성, 어진 성품과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했다.

조선의 12대 왕 인종대왕 이호는 성군(聖君)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519년의 조선왕조 역사에서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인 8개월 보름 남짓 만에 승하한다.

인종대왕은 31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며 비운의 왕이 된다.

 

묘호는 인종(仁宗)이며, 시호는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인종대왕과 인성왕후 사이에 소생은 없다.

 

 

 

 

인종대왕이 승하하기 전에 이복동생이며 문정왕후의 아들(명종)에게 선위(禪位, 살아있을 때 왕위를 넘겨줌)한다.

문정왕후의 끝도 없는 정치에 대한 과욕, 독단적인 성격, 문정왕후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온 인종대왕의 지난 삶과 승하 직전의 정황은 500여 년이 지난 현재도 문정왕후의 인종대왕 독살설이 회자되고 있다.  

 

 

 

 

 

 

 

 

 

 

 

 

 

 

인종대왕 이호는 세자시절 회재(晦齋) 이언적, 하서(河西) 김인후 등 당대 최고의 학자를 스승으로 하여 학문을 배웠다.

 

 

 

 

회재(晦齋) 이언적은 조선의 성리학 체계를 확립한 인물이다.

성리학(주자학)을 창시한 주자(주회암朱晦庵)의 학문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호를 회재(晦齋)라 하였다.

 

회재 이언적이 확립한 조선의 성리학 체계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퇴계 이황의 학문과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명종대왕이 즉위하고 외척 세력 윤원형 일파가 조작한 '양재역 벽서 사건'에 무고하게 연류되어 유배지에서 병사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재주와 글솜씨가 비상한 천재였다.

김인후는 과거에 급제하고 9살 연상이었던 퇴계 이황과 함께 당대 성리학을 이끌었다.

하서 김인후는 조선의 12대 왕 인종대왕 이호가 승하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평생 후학을 기르며 살았다.

 

 

 

 

현재 성균관 문묘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지덕(智德)을 겸비한 39인의 성현 위패가 모셔져 있다.

39현인(賢人)의 위패 중 18현이 우리의 선조이며 조선왕조시대 14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국(東國)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사옹, 한훤당), 정여창(일두), 조광조(정암), 이언적(회재), 이황(퇴계), 김인후(하서), 이이(율곡), 성혼(묵암), 김장생(사계), 조헌(중봉), 김집(신독), 송시열(우암), 송준길(동춘당), 박세채(현석, 남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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