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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허초희)

by 도생(道生) 2016. 11. 27.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불리는 허난설헌(허초희)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 누나 허난설헌(허초희)의 아버지 초당 허엽(1517~1580)은 사림(선비)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할 때 참여하였고, 후에 동인의 영수가 된다. 허엽은 종2품의 경상도 관찰사와 동지중추부사까지 지냈다.

소금 대신 바닷물을 간수로 하여 만든 초당 두부를 초당 허엽이 처음 만들었다고 전한다.

 

 

허균(1569~1618)과 누나 허난설헌(허초희, 1563~1589)은 허엽의 둘째 부인 강릉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과 셋째 아들이다.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불리는 허난설헌 허초희와 교산 허균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했다고 전한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의 천재성은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초당 허엽도 동인의 영수로 뛰어난 학문을 가졌지만, 당시 한시(漢詩, 특히 당나라 詩)의 대가로 알려진 손곡 이달(1539~1612)에게 허난설헌과 허균 남매의 공부를 부탁했다. 허난설헌의 스승 손곡 이달은 오빠 허봉의 친구다.

 

 

 

 

 

 

 

 

 

 

 

 

 

 

 

허난설헌 허초희는 15세가 되던 1577년 김성립과 혼인하였으나 남편의 외도와 시어머니와의 갈등으로 원만하지 못한 결혼생활이 계속됐다. 불행한 결혼생활에 1580년 아버지 허엽의 객사와 아들과 딸의 요절, 1588년에는 오빠 허봉까지 객사하는 등 불행이 연속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짓누르던 삶의 무게를 어렵게 견디던 허난설헌 허초희는 1589년 27살 젊디젊은 나이에 굴곡진 인생의 마침표를 찍는다.

 

 

 

 

 

허난설헌 허초희가 자살했는지 병사했는지 사인은 알 수 없다.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허초희는 1577년(선조 10) 27살에 요절했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그동안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작품을 불태우고, 친정에 있던 모든 글을 불태우라고 유언을 남겼다.

 

 

 

누나 허난설헌의 유언에도 동생 허균은 누나의 글을 모아서 『난설헌집』을 냈고, 서애 류성룡(1542~1606)과 호곡 남용익(1628~1692)을 비롯한 당대와 후대의 많은 학자와 문인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명나라와 일본까지 전해진 허난설헌의 글을 보고 명나라 주지번과 오명제, 청나라 황제 강희제를 비롯하여 중국의 유명한 시인 탕현조(1550~1616), 탕현조(1550~1616), 반지항(1556~1622), 종성(1574~1624), 도망령(1562~1609) 등도 허난설헌 허초희에 뛰어난 글을 보고 감탄하며 칭송했다.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불린 허난설헌 허초희의 작품은 표절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중국 여류시인 유여시(1616~1664)를 비롯하여 지봉 이수광(1563~1628), 상촌 신흠(1566~1628), 서포 김만중(1637~1692), 현묵자 홍만종(1643~1725), 형암 이덕무(1741~1793) 등과 현대의 몇몇 학자는 허난설헌 허초희가 중국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표절 또는 모방했다고 주장한다.

 

 

 

 

 

허난설헌 허초희가 쓴 시와 수필 등의 많은 작품을 보고 당대에 이미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으로 인정받았다.

27세의 짧은 인생을 끝으로 그녀의 작품이 모두 사라질 뻔했으나, 동생 허균에 의해 조선을 넘어 명나라와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동생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죽으면서 허난설헌과 그녀의 작품은 한동안 세상 사람들에게서 잊혀했다.

 

 

조선 최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이 쓴 시와 수필, 산문 등 200여 편이 남아 있고, 그녀의 작품에 대한 결론 없는 표절 또는 모방 시비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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