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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효종의 북벌정책(1, 2차 나선정벌)

by 도생(道生) 2016. 12. 13.

숭명배금(崇明排金)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

대명(大明) 의리론과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복수 - 효종의 북벌정책

청나라의 파병 요구로 나선 1, 2차 나선정벌(러시아)

 

 

 

 

 

 

 

 

 

 

 

 

 

 

 

조선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겪고 오랑캐라 무시하던 청나라에 치욕을 당하고 군신(君臣)관계를 맺는다. 

조선의 임금과 대명(大明) 사대주의자들은 오랑캐 야만족(청나라, 1636~1912)에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렸다.

그러나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마음속으로 이미 멸망한 명나라(1368~1644)를 숭상하고 있었다.

 

 

 

병자호란에서 치욕을 당한 것도 모자라 조선 왕자 세 명을 비롯하여 50만 명이 넘는 조선 백성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서양의 새로운 문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지만, 봉림대군(효종)은 마음속으로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1645년(인조 23) 2월에 현세자, 5월에 봉림대군(효종)이 조선에왔다. 

 

 

 

조선 16대 왕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은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의 둘째 아들이다.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1612~1645)가 갑작스럽게 의문사하면서 둘째 아들 봉림대군(효종)이 왕세자가 되어 보위에 올랐다.

 

 

인조와 효종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 대다수가 대명(大明) 사대주의였다.

효종은 즉위하고 북벌정책을 준비하는 한편, 친청(親淸)파로 분류되는 조정 신료들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유배된 김자점이 역모를 모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효종의 제일의 국정목표는 북벌정책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북벌 논의에 공감하면서도 북벌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조정 대신은 거의 없었다.

 

효종은 이완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임금을 호위하는 금군과 한양과 경기권 경비를 담당하는 수어청, 어영군, 훈련도감군 등을 강화하며 확충해 나갔다.

 

 

 

효종은 북벌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예병 10만 명을 양성하여 청나라를 기습하면 된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적으로 병사로 지원하는 백성도 없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재정도 뒤를 받쳐주지 못했다.

대명 사대주의를 표방했던 조정 신료들조차 효종의 북벌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청나라 국경지역을 조총으로 무장한 러시아가 침범하자 청나라는 조총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말이 요청이지 청나라와 조선은 병자호란(1637년) 때 군신(君臣)관계를 맺었다.

효종의 북벌정책으로 평가받는 1, 2차 나선정벌은 천자(황제)의 나라 청나라가 신하의 나라 조선에 명령한 것과 다름없다.

 

 

 

1654년(효종 5) 150여 명을 파병하여 1차 나선정벌에 참여해 승리했고,

1658년(효종 9) 300여 명을 파병하여 2차 나선정벌에서도 승리했다.

 

 

 

 

 

 

 

 

 

 

 

 

 

 

조선은 청나라를 지원하는 소수의 병력이었으며, 조선이 나선(러시아)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소수병력을 파병하여 지원한 것이다.

효종의 나선정벌(러시아 정벌)도 청나라가 일방적으로 파병 요청을 하고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청나라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효종과 사대주의 조종 신료들은 청나라에 복수를 다짐하며 북벌정책을 준비하였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효종의 북벌정책을 추진하며 양성한 군대는 청나라의 파병 요구를 받고 러시아 군대와 전투했고 1, 2차 나선정벌로 끝났다.

 

 

 

 

 

효종의 북벌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는 1, 2차 나선정벌이 결정적으로 효종의 북벌정책과 전혀 상관없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나온다. 효종은 나선(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조차 모르고 청나라의 파병 요구에 조선 군대를 파병했다.

효종의 나선정벌이란 청나라를 침범한 러시아군대를 물리친 것이며, 조선의 처지에서는 파병이다.

 

 

 

청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던 효종의 북벌정책은 초기 실현 준비단계에서 끝나버렸다.

그래서 효종의 북벌정책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내부결집을 위한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효종실록』 12권, 효종 5년 2월 2일(1654년)

 

청차(淸差)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편전에서 접견할 적에 대신들도 역시 입시 하였는데, 거원이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바쳤다.

 

그 자문에 이르기를,

"조선에서 조창(鳥槍)을 잘 쏘는 사람 1백 명을 선발하여, 회령부(會寧府)를 경유하여 앙방장(昂邦章)의 통솔을 받아 가서

나선(羅禪)을 정벌하되, 3월 초 10일에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하시오."하였다.

거원이 자리를 피하여 절을 하자,

 

상(효종)이 위유하고 이어 차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나선은 어떤 나라이오?"

하니, 거원이 아뢰기를,

"영고탑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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