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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안용복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땅

by 도생(道生) 2016. 12. 15.

노비출신으로 조선의 영토를 지켜낸 안용복 -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땅

 

 

 

 

 

 

 

 

 

 

 

 

 

 

 

조선 왕조는 신분사회로 노비는 선말 신분제가 폐지될 때까지 최하위계층이었다.

관청 등 공적 기관에 예속된 공노비(公奴婢)와 양반계층, 즉 개인에게 예속된 사노비(私奴婢)가 있었다.

 

 

사노비(私奴婢)출신 안용복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조선 시대 노비였던 안용복을 현대에는 안용복 장군으로 부른다.

그의 활약을 기려 안용복 장군이란 칭호를 붙인 것은 불과 수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 경상도 남동해안은 왜구의 노략질과 어업활동으로 충돌이 잦은 지역이다.

안용복은 경상도 동래(부산)출신이다.

 

1693년(숙종 19) 초봄 동래 울산 지역의 어부 40여 명이 울릉도 근방에서 고기잡이하던 중 일본 어부와 충돌하였다.

조선 측 대표로 나섰던 안용복과 박어둔이 일본 어부에게 납치되었다.

 

 

 

일본에 납치된 안용복은 '울릉도는 조선땅이고 자신은 조선인으로 자기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데 왜? 끌고 왔느냐.'라고 항의한다.

이 문제는 일본 막부 정부에까지 올라갔고, 막부 정부는 '울릉도는 조선땅이다.'이라는 서계(書契, 조선과 일본의 공식외교문서)를 써주며 안용복을 조선으로 보내주었다.

 

이때 일본 막부 정부로부터 받은 공식외교문서(서계)에 울릉도는 조선땅임을 명시했고, 울릉도는 그 속도(屬島, 부속 도서)인 우산도(독도)를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안용복이 조선으로 송환되는 도중 대마도주에게 서계(공식외교문서)를 뺏겼다.

 

 

 

 

 

대마도주는 한술 더 떠서 조선 어부가 죽도(竹島, 울릉도의 일본식 표현)에서 조업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담은 서신도 함께 보냈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충돌을 우려해 흐지부지 넘어간다.

 

대마도는 세종 때 이종무, 최윤덕 장군이 정벌하여 조선영토에 예속한 바가 있다.

안용복과 박어둔은 허가 없이 일본에 간 죄로 곤장을 맞고 풀려난다.

 

 

 

 

 

 

 

조선 정조 9년, 1785년 일본 지리학자 하야시 시헤이가 그린 조선팔도지도,

목판지도 임자평도(林子平圖)에 울릉도와 독도를 하나의 큰 섬으로 그렸고, 동해를 표기하는 등 조선의 영토라고 명시했다.

 

 

 

 

 

 

 

1694년(숙종 20) 숙종의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조정은 일본과 강경하게 맞선다.

1696년(숙종 22) 초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땅이며 일본 어부가 조업하지 못하도록 결정하였다.

 

 

 

1696년(숙종 22) 초봄 안용복은 다시 동료와 울릉도로 조업을 나갔다.

그러나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어선이 정박해 있었다.

 

안용복은 일본인에게 돌아가라고 요구하였고, 일본인은 자기들이 송도(松島, 독도의 일본 표현)에 살며 조업을 위해 울릉도에 왔다고 했다. 안용복은 일본에 직접 들어가 자신이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고 관원을 사칭하여 일본인이 조선의 영토에 들어와 조업하고 있음을 따졌다.

 

 

 

 

 

1694년 일본 막부 정부의 서계(공식외교문서)와 1696년 막부정부의 공식인정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땅임이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불법조업을 승복한다.

 

1699년(숙종 25) 조선과 일본 사이에 공식문서가 오가며 울릉도와 독도는 우리 땅임을 확고히다. 

조정에서는 안용복을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남구만 등이 유배를 보내자고 하였다.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공식외교문서로 만들게 한 안용복은 관리를 사칭하고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었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간다.

 

 

 

 

 

 

 

 

 

 

 

 

 

 

 

숙종실록 26권, 숙종 20년 2월 23일(1694년)

 

사신(史臣)은 논한다.

왜인들이 말하는 죽도란 곳은 곧 우리나라의 울릉도인데, 울릉이란 칭호는 신라(新羅)·고려(高麗)의 사서(史書)와 중국 사람의 문집(文集)에 나타나 있으니 그 유래(由來)가 가장 오래되었다.

 

섬 가운데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또한 죽도란 칭호가 있지마는, 실제로 한 섬에 두 명칭인 셈이다.

왜인들은 울릉이란 명칭은 숨기고서 다만 죽도에서 고기 잡는다는 이유를 구실로 삼아서, 우리나라의 회답하는 말을 얻어서 그 금단(禁斷)을 허가받은 후에 이내 좌계(左契)를 가지고서 점거(占據)할 계책을 삼으려고 했으니, 우리나라의 회답하는 서계에 반드시 울릉이란 명칭을 든 것은, 그 땅이 본디 우리나라의 것임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해 여름에 남구만(南九萬)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보고에 왜인이 또 말하기를, ‘조선(朝鮮) 사람은 우리의 죽도에 마땅히 다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데, 신(臣)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니, 왜놈들이 의죽도(礒竹島)를 점거(占據)했는데, 의죽도는 곧 울릉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신라 때 이 섬을 그린 그림에도 또한 나라 이름이 있고 토공(土貢) 을 바쳤으며, 고려 태조(太祖) 때에 섬사람이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리 태종(太宗) 때에 왜적이 침입하는 근심을 견딜 수가 없어서 안무사(按撫使)를 보내어 유민(流民)을 찾아내 오게 하고는, 그 땅을 텅 비워 두게 했으나, 지금 왜인들로 하여금 거주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조종의 강토를 또한 어떻게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3월 27일(1697년)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안용복(安龍福)은 법으로 마땅히 주살(誅殺)해야 하는데, 남구만(南九萬), 윤지완(尹趾完)이 모두 가벼이 죽일 수 없다고 하고,

또 도왜(島倭)가 서신을 보내어 죄를 전(前) 도주(島主)에게 돌리고, 울릉도(鬱陵島)에는 왜인의 왕래를 금지해 다른 흔단이 없다고 하면서 갑자기 자복(自服)하였으니, 까닭이 있을 듯하므로, 안용복은 앞질러 먼저 처단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대체로 왜인의 기를 꺾어 자복시킨 것을 안용복의 공(功)으로 여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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