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개벽중

영조의 경종 독살설과 즉위 - 이인좌의 난

by 도생(道生) 2016. 12. 18.

왕세제(영조)의 경종 독살설과 영조의 즉위로 일부 소론과 남인의 반란 - 이인좌의 난

 

 

 

 

 

 

 

 

 

 

 

 

 

 

 

왕실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조정에 출사를 하지 못한 이인좌(1695~1728)등이 영조 4년(1728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이인좌의 난은 붕당정치의 폐해가 낳은 반란이며, 왕세제(영조)의 경종 독살설과 영조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은 일부 강경파 소론과 남인의 반란이다.

 

 

흔히 이인좌의 난을 이인좌가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조실록의 내용을 보면 이인좌를 반란을 주모(主謀)한 우두머리 괴수(魁首)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괴수(魁帥)는 난을 일으킨 반란 무리의 장수를 의미하며, 괴수(魁首)는 반란을 주도한 역적의 가장 우두머리를 말한다. 

 

 

 

 

 

이인좌의 난은 박필현, 정희량, 이인좌 등이 전라, 경상, 충청, 경기(한양) 등 각 지역에서 동시 다발로 난을 일으킨 역모사건으로 영조실록에서는 다수의 역모 관련자에게 괴수(魁帥)와 괴수(魁首)를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라 하여 무신란(戊申亂)으로 불리는 역모사건은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어 마치 이인좌가 역모의 주동자인 것처럼 알려졌다.

 

 

이인좌의 난이 갑자기 역모가 진행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노론과 소론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과 분쟁 속에 중앙에서 축출된 인물들이 세력을 규합하여 오랫동안 준비한 역모사건이다.

 

 

 

 

 

영조실록 17권, 영조 4년 4월 22일(1722년)

 

이것이 모두 외방의 적도들로서 내응한 괴수(魁首)가 10명이었고 협박에 의하여 따라붙은 자들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품은지가 오래되었으니, 실상은 적신의 부도한 말에서 시작된 것이고 역도들은 배포한 것이 갈수록 컸으니, 복법(죄를 받아 죽은)된 죄인들의 후손인 자들이 많게 되었다.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서인은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됐다.

노론은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영조)을 지지했고, 소론은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을 지지했다.

 

 

 

조선 19대 왕 숙종(1661~1720)이 1724년(숙종 46)에 승하하고, 장희빈의 아들 경종(1688~1724)이 20대 왕으로 즉위했다.

숙종이 46년간 재위하여 경종은 1720년 33세의 나이에 보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이 된 경종은 몸이 허약하였고, 더욱이 후사가 없었다.

 

 

 

 

숙종은 1717년(숙종 43) 좌의정 이이명을 불러 독대하였다. 이른바 정유독대다.

사관을 물리친 숙종은 병약한 세자(경종)가 후사도 없으니 연잉군(영조)로 하여금 뒤를 잘 잇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경종은 보위에 오른 지 1년 만인 1721년 8월에 노론이 강력하게 주장하여 연잉군(영조)이 왕세제(王世弟)가 된다.

1722년 노론이 병약한 임금을 대신해 왕세제(영조)가 대리청정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1722년 남인 서자 출신 목호룡이 노론이 임금을 시해하고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탄핵하여 관련자가 죽거나 유배됐다. 

 

 

이른바 '삼급수 사건'으로 알려진 목호룡의 경종 시해 모의와 역모사건 배후에 연잉군(영조)이 거론됐다.

경종과 소론 온건파의 보호 아래 연잉군은 무사할 수 있었다.

 

 

 

 

 

 

경종실록 6권, 경종 2년 3월 27일(1722년)

목호룡이란 자가 상변하여 고하기를

"역적으로서 성상(경종)을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이나 독약으로 한다고 하며, 또 폐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중에 동궁(왕세제, 영조)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하는 자가 있습니다.

역적의 정상을 구명해서 누명을 씻어 국본을 안정시키소서."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은 피 터지는 다툼으로 노론이 숙청당하는 신축옥사와 임인옥사가 이어졌다. 경종은 대리청정과 친정체제를 몇 차례 반복하다가 1724년 37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왕세제(영조)가 보낸 게장과 생감을 먹고 경종은 흉통과 복통에 이어 설사에 시달렸고, 비록 병약한 몸이었지만 갑자기 승하했다.

 

 

 

 

왕세(영조)의 경종 독살설은 삽시간 퍼져 나가며 곳곳에 벽서가 나붙기까지 했다.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조선 21대 왕으로 즉위한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고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주도하여 노론을 탄핵한 김일경을 비롯한 소론을 숙청됐고, 영조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갔던 목호룡도 처형됐다.

 

 

 

 

영조는 1727년(영조 3) 당쟁의 폐해를 바꾸기 위해 소론 온건파를 대거 등용하며 탕평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시작 1년 만에 큰 난관에 부딪혔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인좌의 난을 무신란(戊申亂) 또는 무신년의 역변(逆變)이라 한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 영조가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일부 이탈자가 생겼고,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변한다.

일부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은 고변으로 역모가 발각되자 미리 약속한 데로 각지에서 동시 다발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인좌는 반란의 명분을 경종의 독살설과 숙종의 친아들이 아닌 연잉군이 임금으로 있으니 영조의 즉위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인좌는 소현세자의 고손자 밀풍군 이탄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경상도를 거점으로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20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에는 양반, 화적떼, 노비 등 다양한 계층이 반란세력에 합세했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정희량과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 등은 경상도 안음, 거창, 함양, 합천 등지를 점령했다가 관군에게 토벌되었고, 박필현, 김영해, 박필몽 등도 반란에 가담했으나 시작도 못 하고 끝났

 

 

 

 

이인좌는 1728년 3월 15일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반란이 시작됐고, 그러나 3월 24일 안성에서 관군에 대패하여 한양으로 압송된다. 자칭 대원수라 칭했던 34살의 이인좌는 3월 27일 역모죄로 능지처참 된다.

이인좌는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이며, 남인의 거두 윤휴의 손자사위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15일(1728년)

적(賊)이 청주성(淸州城)을 함락시키니, 절도사(節度使) 이봉상(李鳳祥)과 토포사(討捕使) 남연년(南延年)이 죽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權瑞鳳) 등이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兵器)를 실어다 고을 성(城) 앞 숲 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으니,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兵使)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4일(1728년)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이 적을 격파하고 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 등을 함거(檻車)에 실어 서울로 보냈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5일(1728년)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하기를,

"천금(千金)을 상으로 내걸어 망명한 적의 괴수 박필현 등을 잡아야 합니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6일(1728년)

신의 이름은 본래 현좌(玄佐)였는데 (이)인좌로 고쳤습니다.

신이 봄에 동성(同姓) 5촌(寸)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박필현은 재작년 상주(尙州)로 이사할 때 보아 잘 압니다. 모의(謀議)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刺客)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7일(1728년)

백관(百官)이 군기시(軍器寺) 앞길에 차례로 서 있는 앞에서 역적의 괴수 이인좌(李麟佐)를 참하고 노적(孥籍)을 법대로 하였다.

 

 

 

『영조실록』 16권, 영조 4년 3월 28일(1728년)

"이인좌가 정세윤과 함께 모의하기를, ‘영남의 군사가 마땅히 16만은 된다.’라고 하기에 신이 그 허망함을 책망하였더니, 이인좌가 말하기를, ‘일찍이 상소한 소유(疏儒)가 1만여 명이나 되었으니, 각기 가정(家丁)을 거느리면 족히 12만은 되며, 괴수(魁首)는 정씨(鄭氏) 성을 가진 사람이다.

 

 

 

『영조실록』 17권, 영조 4년 4월 26일(1728년)

죽산(竹山) 사람 신길만(申吉萬)에게 특별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신길만을 곧 죽산의 농민(農民)인데, 마을 사람 24인과 함께 역괴(逆魁) 이인좌(李麟佐) 등을 사로잡아 바친 사람이다.

상으로 은(銀) 1천 냥을 지급하고 2품의 관직으로 뛰어 올려 제수하라고 명하니,

 

대사간(大司諫)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마땅히 역마(驛馬)로 불러올려서 사람들을 용동(聳動)시키게 해야 합니다." 하자, 허락하였다.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절의 중이 실제로 역적을 체포한 것인데, 신길만이 대신 바치고 공을 받았다고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