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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암행어사 대명사 박문수

by 도생(道生) 2016. 12. 19.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별견(別) 어사 박문수

 

 

 

 

 

 

 

 

 

 

 

 

 

 

 

기은(耆隱) 박문수(1691~1756) 하면 떠오르는 말은 암행어사 박문수와 꼬마 어사 박문수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임명된 적도 없고, 어린 나이에 어사로 임명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1727년(영조 3) 영남과 호남 지역에 흉년이 들자 임금(영조)은 박문수를 특별히 영남지역 별견 어사(御史)를 파견했다.

 

 

임금으로부터 특별히 명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어사(御史)를 암행어사라 하고,

지방에 특별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왕명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 지역의 문제를 감독하고 해결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어사를 별견어사(別遣御史)라 한다. 어사 박문수는 암행어사의 왕명을 받지 않았고, 영남지역의 별견어사로 파견되었다.

 

 

 

 

박문수가 영남 별견어사(別遣御史)로 임명된 1727년 당시 37세였다.

어사 박문수를 꼬마 어사라고 하는 것은 당시 좌의정 조태억이 영남 별견 어사로 박문수를 천거하자 영조가 나이가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긴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사 박문수는 소론의 영수 이광좌(1674~1740)의 제자로 33세가 되던 1723년(경종 3)에 문과에 급제하며 조정에 출사하여 세자시강원설서, 병조정랑의 관직에 있었다.

 

 

 

 

 

 

 

 

 

 

 

 

 

 

영조가 즉위하고 예문관검열로 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영조 재위 초기 노론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소론과 남인 등은 조정의 중심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박문수는 1727년(영조 3) 세자시강원에 속한 도서를 담당하는 사서(정 6품)와 사헌부 지평(정 5품)을 거친다.

1727년(영조 3) 호남과 영남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영조는 별견어사를 파견한다.

박문수는 좌의정 조태억의 추천으로 영남 별견어사로 임명되고, 1728년(영조 4)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 관직을 제수받았다.

 

 

 

 

1728년 이인좌의 난(무신난)이 일어나자 정국을 주도한 노론뿐만 아니라 탕평책으로 등용된 소론의 온건파가 전면에 나서서 반란군 진압에 앞장섰다. 어사 박문수도 이때 종사관으로 반란군 진압에 활약했다.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가 3월 15일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박문수는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이인좌의 난은 불과 10여 일 만에 진압됐고, 박문수는 역모의 남은 세력을 소탕하였다.

 

반란군 소탕 중 영남 감사 황선이 갑작스럽게 죽자 영조는 박문수를 영남 감사(監司)에 제수한다.

이인좌의 난에서 전공을 세운 박문수는 분무공신 2등으로 영성군(靈成君)에 봉해졌다.

 

 

 

 

 

박문수는 별견어사, 감진어사, 진휼사, 균세사 등 조선 팔도에 재난과 흉년 등 큰일이 있을 때마다 영조의 특별 어명을 받고 파견되었다. 

 

경상도관찰사, 선혜청당상, 예조참판, 호조참판, 충주 목사, 병조참판, 함경도 관찰사, 어영대장, 경기도관찰사, 황해도수군절도사, 판윤, 세손사부(사도세자의 큰아들 의손세자), 예조판서, 우참찬(정 2품) 등의 관직을 거쳤으나 정승에는 오르지 못했다.

 

 

 

1755년(영조 31) 소론 일부가 나주벽서사건을 일으켜 소론 온건파까지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소론 출신 박문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박문수가 영조에게 사직 상소를 올리자 영조는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에서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영조 재위 시 문관으로 활동했던 박문수는 1755년(영조 32)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실록』 13권, 영조 3년 9월 25일(1727년)

좌의정(左議政) 조태억(趙泰億)이 아뢰기를,

"영남(嶺南)의 흉년도 호남(湖南)과 다름이 없으니 특별히 어사(御史)를 보내어 흩어져 떠도는 백성을 안집(安集) 시키게 하고....

 

이어 박문수(朴文秀)를 어사(御史)로 천거하니, 임금이 박문수는 나이가 젊어서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어렵게 여겼다.

조태억과 김동필(金東弼)이 모두 박문수가 두루 통달하고 사무에 연달(鍊達)한 것을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박문수를 어사(御史)로 삼았다.

 

 

 

 

『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4월 19일(1756년)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영조실록』 87권, 영조 32년 4월 24일(1756년)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졸(卒)하였다.

박문수는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이미 임금이 알아줌을 받았으며, 무신년 역변(逆變) 때에 조현명(趙顯命)과 함께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를 도와 개가를 아뢰고 돌아오니 임금의 권우(眷遇)가 날로 융숭하여 벼슬이 숭품(崇品)에까지 이르렀다.

 

나랏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해이하지 아니하여 병조, 호조 양부(兩府)에서 이정(釐正)하고 개혁한 것이 많았으며, 누차 병권(兵權)을 장악하여 사졸의 환심을 얻었다.

 

러나 연석(筵席)에서 때때로 간혹 골계(滑稽)를 하여 거칠고 조잡(粗雜)한 병통이 있었다.

또 이광좌(李光佐)를 사표(師表)로 삼아 지론(持論)이 시종일관 변하지 아니하였으니, 그 때문에 끝내 정승에 제배되지 못하였다. 그가 졸함에 미쳐 임금이 슬퍼하여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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