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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청나라 황제 강희제와 백두산정계비

by 도생(道生) 2016. 12. 16.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황명(皇命)으로 세워진 조선과 청나라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君臣)관계를 맺는다.

청나라는 황제(천자)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조선은 신하의 나라가 되었다.

 

조선 19대 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의 재위할 때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강희제(1654~1722, 재위 1661~1772)가 다스리고 있었다.

 

 

 

 

조선과 청나라 국경을 표시한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진 것은 1712년(숙종 38)의 일이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영산이면서, 조선의 임금 숙종과 조정 신료들 처지에서도 조선을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활동했던 지역이라 그 의미가 깊다.

 

 

장백산(백두산)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여진족) 발상의 성지이기도 했다.

숙종이 재위 중일 때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청나라를 대제국으로 만들어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강대국이었다.

 

 

 

 

 

 

 

 

 

 

 

 

청나라 강희제는 장백산신(長白山神, 백두산신)으로 봉호하고 제(祭)를 올리게 했다.

청나라는 신성한 성지였던 백두산 일대를 봉금(封禁, 출입을 금함) 지역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살아가던 조선과 청나라 사람들끼리 잦은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이를 빌미로 조선과 청나라 경계에 있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 경계를 확정 짓는 조사하겠다고 조선에 요구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황명(皇命)에 의해 청나라와 조선이 조사를 벌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확정 지었다.

신하의 나라 조선은 천자(황제)의 나라 청나라가 요구하는 데로 할 수밖에 없었다.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지기 전부터 청나라는 황제 강희제의 명을 받아 세 차례 백두산을 답사한 상태였다.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을 확정 짓는 관측과 조사는 청나라가 주도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로 확정된 조선과 청나라 국경선 문제는 1885년, 1887년 두 차례 조선과 청나라 간에 간도 소유권(영유권) 문제를 가지고 담판을 했으나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성과 없이 끝났다.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2월 26일(1712년)

 

청나라 차사 오랄 총관 목극동 등이 장차 백두산을 심사하려 하여 의주로 나오니, 의주 부윤이 패문을 올려보냈다.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3월 24일(1712년)

 

접반사 박권이 사폐하여 아뢰기를

"청국의 성경지(盛京誌)에 '백두산 남쪽은 조선의 지경이다.'라는 말이 명백히 실려 있으니, 청컨대 행구속에 가지고 가서 쟁단이 있으면 이 글로 증거를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의논하는 자가 많이 말하기를

"성경지(盛京誌)는 금물입니다. 저 사람들이 만약 어디서 그득한 것인지를 힐문한다면 사고가 생겨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또 그 말을 따라 내보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청나라의 차관이 나오자 경계의 일이 극히 순조로와서 전혀 다툴 것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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