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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개벽중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 참배

by 도생(道生) 2017. 6. 11.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神社)이며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 된 야스쿠니 신사(정국신사靖國神社)

 

 

 

 

 

 

 

 

 

 

 

 

 

1868년 에도막부 정권(무신정권) 무너뜨린 일본 왕 명치는 일본 천황이 되어 근 700년 만에 왕정복고를 선언한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은 본격적인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간다.

 

 

일본 왕 메이지는 1869년 왕정복고를 위해 에도막부 정권과 싸우다 죽은 3천 5백여 명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동경 초혼사(東京招魂社)를 세운다. 동경초혼사는 1879년 야스쿠니 신사(정국신사靖國神社)로 이름을 바꾼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국교(國敎)인 신도(神道)와는 전혀 관련 없으며, 종교 추모 시설이 아닌 군사 시설이었다.

신사의 관리 주체는 일본군으로 일본 육·해군의 예산으로 운영되었고, 신사의 최고 신관인 궁사(宮司) 역시 일본 육·해군의 대장이 맡았다.

 

정국신사(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왕(천황)이 직접 참배하는 천황의 신사이면서, 일본 군국주의 정신의 발원지다.

 

 

 

 

 

 

 

 

 

 

 

 

1868년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이 성공하기까지 일본의 왕을 도와 공을 세운 인물을 유신 3걸(3명) 유신 10걸(10명)이 있다.

오오무라 사스지로는 유신 10걸 중 한 명이다.

 

 

1871년 '일본 근대 군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는 일본 왕(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 근대 육군이 창설한다. 오오무라 사스지로는 야스쿠니 신사를 만드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도쿠가와 막부정권을 쓰러트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근대 일본 제국주의 육군을 창설한 오오무라 마스지로는 자신의 고향이며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의 중심인 조슈번에서 사무라이의 습격을 받고 치료를 받던 중 상태가 악화하여 사망했다.

 

 

메이지 일본 왕은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을 야스쿠니 신사를 건립하여 '일본의 신'으로 모시고, 일본 근대 육군을 창설한 오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을 세웠다.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는 8만 개가 넘는 신사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신사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상징과 같은 오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과 전쟁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유슈칸(1882년 개관, 유취관)에는 전쟁에서 사용한 각종 무기와 가미카제 특공대의 유서와 사진 등의 사료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비석도 세워져 있는 등도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누가 봐도 일본 군국주의 상징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야스쿠니 신사(정국신사靖國神社)는 나라를 안정시킨 신사라는 뜻 그대로 일본 왕 메이지와 아들 요시히토, 손자 히로히토는 일본 왕에게 충성을 다한 이들을 '일본의 군신(軍神)'으로 안치하여 직접 참배했다.

 

일본 왕을 위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간 일본인들은 살아서는 '천황의 충신'으로, 죽어서는 '일본의 군신'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일본 왕실(황실) 옆에 세워진 야스쿠니 신사는 근대에 만들어진 신사임에도 일본 왕(천황)이 직접 참배했다.

 

 

일본 왕(천황)은 일본 국민에게 살아있는 신(神)으로 추앙받는 존재이며, 일본 천황이 곧 국가라고 생각했던 일본인은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신'으로 안치되어 일본 천황에게 직접 절을 받는다.

 

침략전쟁에 미친 일본 왕과 군국주의자들에게는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강력한 충성심과 더 많은 희생자가 필요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일본 천황의 군대, 곧 황군으로 참여한 전쟁을 침략전쟁이 아닌 '성전(聖戰)'으로 미화했고, 전쟁에서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신'으로 안치되는 영광을 보장했다.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강제로 참배를 강요당한 일부 일본인을 제외하고, 어린아이부터 학생, 군인,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일본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올리며 황국신민, 즉 일본 천황의 백성임을 다짐하였다.

 

야스쿠니 신사(정국신사靖國神社)는 창건 때부터 이미 호국신사(護國神社)이며 황국신사(皇國神社)로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다.

 

 

일본 천황이 직접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일본군, 즉 '일본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일본군대의 사기를 양양하고, 일본 천황의 신격화와 군국주의를 고무시켜 충성 경쟁을 요구하는 한편 절대 충성을 강요하여 일본 군국주의의 발원지이면서 군국주의의 상징이 된다.

 

 

 

 

 

 

 

 

 

 

 

 

사쿠라(벚꽃은) 일본의 국화이면서 봉건시대 사무라이 무사도의 상징이었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명 가미카제 자살특공대원들은 '벚꽃처럼 피었다가 벚꽃처럼 지자', '사쿠라의 고향 야스쿠니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군가를 외치며 목숨을 버렸다.

 

야스쿠니 신사의 벚꽃은 충성스러운 일본 군인과 희생의 상징이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메이지 유신 과정부터 여러 침략전쟁 중에 죽은 사람을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했다.

일본군이 가장 많이 죽은 전쟁은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눈치를 보다가 1978년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A급 전범 14명을 합사(合祀)했다.

 

1945년 패망 후 일본 천황과 총리가 사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였고, 일본 패망 후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가 내각 수반 자격으로 처음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1991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일본 정부의 수반으로서 공적 참배로 이는 일본 헌법에 위반되다고 판결했다.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 일본 총리 역시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가 정교(政敎)를 분리한 일본 헌법 위반라고 판결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인 일본군과 군무원(군속), 민간인 등과 조선인으로 강제연행되어 일본군대와 군무원, 강제징용(강제노역)에 끌려갔던 사람들 2만여 명까지 합하여 총 246만 6천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연행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은 2만여 명의 한국인 원혼들을 일본 정부가 주도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연행(강제징용, 강제징병)되어 타국에서 원통하게 세상을 떠난 조선인 희생자를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한 일을 두고 일본 측은 당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조선인도 일본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황국 신민이라고 하였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조선인 희생자들은 강제징병이 아닌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용병으로 등록하기도 했고, 살아 있는 사람을 전사자로 합사하기도 했고, 한국인뿐만 아니라 대만인 2만여 명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 대한민국과 대만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일본 군국주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 합사 취소소송을 했지만, 2008년과 2011년 일본 법원은 야스쿠니 신사가 종교시설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고 전적으로 야스쿠니 신사가 결정할 문제라고 했다.

 

 

 

 

 

 

 

 

 

 

 

 

혹자는 1978년 태평양전쟁 당시 국제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된 14명을 안치하고 나서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스쿠니 신사는 설립 초기부터 이미 일본 왕(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무사(군인)와 일본 근대 육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을 세우면서부터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다.

 

 

 

 

 

 

 

 

 

 

 

 

 

일본은 군대를 보유할 수 있는 나라,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탈바꿈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군국주의 국가 회귀를 준비하고 있는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공식적인 내각 수반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였다.

 

일본 법원은 일본 아베 총리 야스쿠니 신사참배 손해배상 소송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손을 들어줬으며, 헌법 위반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

 

 

 

 

 

 

 

 

 

 

 

 

1874년 메이지(명치) 일본 왕이 처음 야스쿠니 신사를 건립하고 참배한 이래로 아들 요시히토 일왕, 손자 히로히토 일왕까지 수십 차례 참배하였다. 야스쿠니 신사는 신(神)과 동격인 일본 천황이 직접 참배하는 성지로 일본의 호국영령을 안치한 성역이 되었다.

 

 

왕정복고 과정과 내전 중 사망자,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 등 전쟁에서 사망한 246만여 명을 합사하면서 군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전쟁 중에 사망한 군인뿐만 아니라 전쟁으 소용돌이 속에서 폭격 등으로 사망한 갓난아이부터 학생과 여성, 노인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 안치되어 있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상징답게 야스쿠니 신사 건립 당시의 목적과 가장 많이 합사된 것은 일본 왕(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일본군이다.

 

 

전쟁에 눈먼 나라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왕(천황)이 직접 참배하고 일본 육·해군이 관리한 국가 시설이었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정교(政敎)분리에 의해 1946년 종교법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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