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식민 지배하기 시작한 1905년
망국적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대한제국 충정공 민영환 자결과 혈죽(血竹)
프랑스 출신의 뮈텔(1854~1933) 대주교는 1880년 11월 조선 황해도에 들어왔으며 1925년 대주교가 됐고 1933년 80세를 일기로 선종(善終)했습니다. 뮈텔 대주교는 1890년부터 1933년까지 약 43년 동안 일기를 기록했습니다. 일기에는 가톨릭 업무 외에 개인적 생활과 조선의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문제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뮈텔 대주교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895년 가톨릭 학교에 입학한 후 가톨릭을 신앙한 안중근(1879~1910) 의사와 인연이 있습니다.
후일 안중근 의사가 가톨릭교회에서 학교를 운영해 백성들을 계몽시키자고 건의했지만, 뮈텔 대주교가 거절하면서 안중근 의사가 사재를 털어 직접 학교를 설립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자 가톨릭 신자 자격까지 박탈했고,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이 투옥됐을 때 빌렘 신부의 접견도 불허했습니다. 빌렘 신부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당하기 직전 종부성사를 했다는 이유로 2개월 성무집행금지 조치까지 내립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 등 독립운동가들이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 계획을 빌렘 신부로부터 듣고 조선총독부에 밀고해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투옥되는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600여 명이 체포 투옥됩니다. 뮈텔 대주교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해 자결한 대한제국 충정공 민영환의 집에 혈죽(血竹)이 피었다는 말을 듣고 직접 가서 보고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은 뮈텔 대주교가 대일항쟁기 한국 가톨릭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간단히 살펴본 것처럼 한국인에게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뮈텔 대주교는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요즘 말로 '폴리스라인'까지 넘어가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피 묻은 옷을 놓아두었던 자리에 올라온 대나무, 즉 혈죽(血竹)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자기 생각을 일기에 기록했습니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친아버지 민겸호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입니다. 다시 말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고모부이며 조선 26대 임금 고종과는 4촌 형제입니다. 민영환 선생은 큰아버지 민태호가 자식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습니다. 민씨 집안의 족보를 살펴보면 흥선대원군의 장인 민치구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습니다.
민치구의 큰딸은 여흥부대부인 민씨(1818~1898, 흥선대원군의 부인), 큰아들 민태호(1828~ ?, 민영환의 양부), 둘째 아들 민승호(1830~1874), 셋째 아들 민겸호(1838~1882, 민영환의 친부), 둘째 딸 여흥민씨(1859~1942)입니다. 고종의 왕비 민씨(후일 명성황후 추존)의 친부는 민치록입니다. 민치록은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으나 모두 죽고 민자영(1851~1895, 후일 명성황후)만 남아 11촌인 민치구의 둘째 아들 민승호를 양자로 들입니다.
충정공 민영환(1861~1905) 선생과 조선 26대 왕 고종은 진짜 4촌 형제간이고, 민영환 선생과 고종의 왕비(민자영, 1851~1895,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인 여흥 민씨는 양자로 들어간 민승호(1830~1874) 때문에 3촌(고모와 조카)의 관계가 된 것으로, 양자 입적 관계를 배제하면 실제 민영환과 민자영은 13촌 간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촌수를 따지면 고종 임금과 더 가깝습니다.
1878년 문과(병과)에 급제하고 출사했지만,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병조판서인 친부(親父) 민겸호가 살해당하자 사직합니다. 수년 후 다시 출사하여 여러 요직을 거치고 1895년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지만, 조선의 왕비가 일본 낭인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면서 사직합니다. 이듬해 러시아 특명 전권대사에 임명되면서 일본, 중국, 캐나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귀국합니다.
다음 해에도 유럽 6개국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외국을 둘러 보고 서양의 근대화된 선진 문물과 제도를 보고 돌아옵니다. 서구 문물과 제도로 근대화와 자주민권 자강운동을 추진한 독립협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내무대신과 학부대신과 외무대신 등을 맡았었지만, 친일 내각과 충돌로 고종 임금을 호위하는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합니다.
1905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압적으로 빼앗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뜻을 같이하던 동지들과 함께 을사오적 처형과 을사늑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고종 황제의 답이 내려오기도 전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 해산됩니다. 일제는 고종 황제를 압박하여 민영환 선생을 왕명 거역죄로 체포해 재판소로 보냅니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은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하고 고종 황제, 2천만 동포,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각각 한 통씩 유서를 쓰고 1905년 11월 30일 자결합니다. 증산 상제님께서 1905(을사)년 늦가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구릿골 김자현 성도님의 집에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순절 명부공사를 집행하시면서 만장을 쓰셨습니다.
순절(殉節)은 충성스러운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것이고, 만장(輓章)은 죽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지은 글입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시세(時勢)를 짐작해 보건대,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 한칼로 몸을 가름에 천하 사람의 마음이 있느라)으로 세상일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민영환 선생의 자결 이후 자주독립을 향한 의병항쟁이 활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합니다.
일제가 무력을 동원하여 협박 속에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을 체결한 것에 항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자결 이후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등 전현직 대한제국 관리와 일반 백성 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전국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의 의병전쟁과 계몽활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개벽문화 북콘서트: 대구편 5, 6, 7회>
https://www.youtube.com/watch?v=pC_q1i507T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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