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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도전道典

스승과 제자의 도리 우암 송시열을 배신한 소론 영수 명재 윤증

by 도생(道生) 2022. 7. 22.

스승과 제자의 도리를 벗어나 불의한 행동을 하면 배사율(背師律)을 받는다.

아버지와 동문수학한 시남 유계, 우암 송시열을 배신한 소론 영수 명재 윤증 

 

 

 

 

 

 

사계 김장생(1548~1631)의 아들 신독재 김집(1574~1656)의 문하에는 동춘당 송준길(1606~1672), 우암 송시열(1607~1689), 시남 유계(1607~1664), 초려 이유태(1607~1684), 미촌 윤선거(1610~1669) 등 쟁쟁한 제자들이 많았습니다. 사림(士林)은 조선의 선비 집단을 지칭하는데 선조 8년 사림이 동서(동인과 서인)로 분열합니다.

 

 

고산 윤선도(1587~1671), 미수 허목(1596~1682), 묵재 허적(1610~~1680), 백호 윤휴(1617~1680) 등은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이며, 우암 송시열(1607~1689), 명재 윤증(1629~1714), 남계 박세채(1631~1695) 등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입니다. 명재 윤증은 어려서 아버지 윤선거와 시남 유계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 아버지의 스승인 신독재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후 김집의 권유로 우암 송시열 문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고 조정에 출사합니다. 

 

 

윤선거와 송시열은 김집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벗입니다. 명재 윤증은 1669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스승인 송시열에게 묘갈명(墓碣名, 비석에 새기는 글)을 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윤선거의 묘갈명에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있었던 이야기까지 씁니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 간 윤선거는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를 점령할 때 아내는 자살했고 자녀를 놔두고 강화도를 탈출했습니다. 이후 부끄러움에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명제 윤증의 스승은 네 명으로 윤선거, 유계, 김집, 송시열입니다. 1680년 경신환국 후 남인에 대한 치죄 문제를 놓고 노론 내부에서 대립이 있었고, 1683년 우암 송시열의 노론과 명재 윤증의 소론으로 분열됩니다. 송시열과 윤증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는데 정치적 이견도 있었지만, 윤증이 개인적 감정에 치우친 나머지 사제지간의 도리를 벗어나 스승을 배신하고 분당으로 소론의 영수가 됩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윤선거의 묘비글에 없었던 일을 쓴 것도 아니고, 소론의 영수 윤증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과거사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또한 윤증은 스승인 시남 유계가 유언한 <가례원류>를 고의로 간행하지 않았습니다. 명재 윤증은 송시열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함과 원망 등 개인적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스승과 제자의 도리를 헌신짝처럼 내던집니다.

 

 

1905(을사)년 증산 상제님께서 충청도 노성(魯城)에 가셨을 때 마을 유생들이 윤증의 사당을 짓기 위해 희사금을 받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쓰셨습니다. 상제님께서 "망기사지윤증호(忘其師之尹拯乎)아, 스승을 저버린 윤증이 아닌가."라는 글을 쓰신 이후 희사금이 들어오지 않아 윤증의 사당을 짓는 일을 포기합니다.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 있는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1629~1714) 사당은 조선 영조 20년(1744) 명재 윤증을 따르던 후학들이 주도하여 세운 유봉 영당입니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선천(先天)에는 도수(度數)가 그르게 되어서 제자로서 스승을 해하는 자가 있었으나, 이 뒤로는 그런 불의를 감행하는 자는 배사율(背師律)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이었나니 배은망덕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는다.", "서양 사람에게 재주를 배워 다시 그들에 대항하는 것은 배은망덕줄에 걸리나니.......... 일본 사람이 미국과 싸우는 것은 배사율을 범하는 것이므로 장광(長廣) 팔십 리가 불바다가 되어 참혹히 망하리라."라는 상제님 말씀처럼 개인이 됐든 국가가 됐든 스승과 제자의 도리를 벗어나서 배신하는 행위는 천지에서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55권(숙종 40년) 1월 30일>

"행 판중추부사 윤증이 졸(卒)하니, 나이 86세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애도함이 지극하였고, 뒤에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렸다. 윤증은 이미 송시열을 배반하여 사림(士林)에서 죄를 얻었고, 또 유계가 편수한 예서(禮書, 가례원류)를 몰래 그 아버지가 저작한 것으로 돌려놓았다가 수년 전에 그 사실이 비로소 드러나니, 유계의 손자 유상기가 이를 노여워하여 편지를 보내 절교하였다. 윤증은 젊어서 일찍이 유계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윤증이 전후로 두 어진 스승을 배반했으니, 그 죄는 더욱 용서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개벽문화 북콘서트: 부산편 3, 4회>

https://www.youtube.com/watch?v=1CiXGEGST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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