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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3.13 싸움닭, 전쟁광으로 불린 미국 야전사령관 조지 패튼 장군 명언 (3)
  2. 2016.03.12 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명언 (8)
  3. 2016.02.27 극진가라데(공수도) 창시자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최영의) 명언 (5)
  4. 2016.02.21 관세음보살의 화신, 티베트 불교의 정치 종교 지도자 달라이라마 명언 (5)
  5. 2016.02.20 인류애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 명언 (9)
  6. 2016.01.10 유럽대륙의 정복자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명언 (11)
  7. 2016.01.09 위대한 정복자 몽골제국 칭기즈칸(테무진) 명언 (11)
  8. 2015.11.27 흙수저를 금수저로 바꾼 아산 정주영 회장 명언 (7)
  9. 2015.11.22 셀마 행진의 주역,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루터킹 목사 명언 (3)
  10. 2015.11.21 빈자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 명언 (4)
  11. 2015.11.15 미얀마(버마) 민주화의 꽃 아웅산 수치 여사 명언 (2)
  12. 2015.11.14 싱가포르의 국부 & 독재자, 상반된 평가를 받는 리콴유(이광요) 수상 명언 (4)
  13. 2015.11.08 복싱의 전설, 영원한 세계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 명언 (5)
  14. 2015.11.07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명언 (4)
  15. 2015.11.01 천재발명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 명언 (1)
  16. 2015.10.31 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명언 (8)
  17. 2015.10.17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평화의 상징이 된 마하트마 간디 명언 (5)
  18. 2015.10.10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사회사업가, 헬렌켈러 명언 (4)
  19. 2015.09.20 대공황 타개책 뉴딜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명언
  20. 2015.09.19 마녀 &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前 영국 총리 명언 (7)
  21. 2015.09.06 인천상륙작전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명언 (3)
  22. 2015.09.05 영국 정치인이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윈스턴 처칠 총리 명언 (3)
  23. 2015.08.30 인생역전의 성공 신화를 만든 글로벌 여성 리더 오프라 윈프리 명언 (6)
  24. 2015.08.23 혁신경영의 귀재,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명언 (6)
  25. 2015.08.15 자기계발의 달인, 세계적인 성공학의 대가 브라이언 트레이시 명언 (5)
  26. 2015.08.14 도전과 창조,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잡스 명언 (7)
  27. 2015.08.08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과 추앙을 받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명언 (5)
  28. 2015.08.02 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힐러리 클린턴 명언 (4)
  29. 2013.02.27 증산도 - 월간개벽 2013년 3월호 발간

싸움닭, 전쟁광비판과 미국 역사상 최고의 야전사령관이란 찬사를 동시에 받는

조지 패튼 장군 명언

 

 

 

 

 

 

 

 

 

 

 

 

2차 세계대전에서 맹활약한 미국의 조지 패튼 장군은 전장에서 불같이 저돌적인 성격과 거침없는 돌출행동, 무수한 기행으로 싸움닭과 전쟁광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독일군에 맞선 연합군으로 기갑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이었지만 조지 패튼 장군은 전장의 후미에서 작전을 지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장의 최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중 가장 위험한 사나이로도 불렸고, 미국 역사상 최고의 야전군 사령관으로 평가받는 조지 패턴 장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아프리카 2 기갑 사단장으로 참전하게 된다.

 

 

 

 

 

 

 

 

 

 

 

패튼 장군은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대장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독일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롬멜 신화를 만든 사막의 여우 독일군 에르빈 롬멜의 최강 기갑부대를 격파하여 용장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조지 패턴 장군은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독일군의 후미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코브라 작전과 벌지 전투에서 맹활약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큰 공을 세우며 연합군 최초로 독일 본토에 진입했다

 

 

 

 

 

 

 

 

 

 

 

미국인 중에는 다혈질의 조지 패튼 장군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멕시코 내전에 참전하여 반란군 장군을 권총으로 사살하여 차에 매달고 달리기도 했다. 막말과 욕설, 통제가 안 되는 과격한 성격과 돌출행동은 많은 사람 입방아에 오르게 되었고 독불장군 고집불통의 조지 패튼 장군 언행은 통제되지 않았다.

 

 

 

 

 

 

  

 

 

 

적이 예상치 못하는 대담한 발상과 신속하고 공격적인 과감한 공격 전술은 독일군에게 아이러니하게도 연합군보다는 적군인 독일군에게 더 인정받게 된다. 조지 패튼 장군은 싸움닭, 전쟁광 등의 비판과 함께 비상한 전략과 공격적인 전술을 펼치며 전장의 지휘관으로서 확고한 지휘철학을 가진 최고의 야전사령관이란 찬사를 동시에 받고 있다.

 

 

 

 

 

 

 

 

 

 

조지 패튼 장군은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과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은 미국 육군사관학교 동문이며 맥아더 장군의 6년 후배이며 아이젠하워 사령관의 6년 선배다.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독일 바이에른 지역 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된 조지 패튼 장군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인 1945년 12월 9일 트럭과의 교통사고를 당해 12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조지 패턴 장군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불거지며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조지 패튼 장군의 죽음을 조종한 배후로 지목되기도 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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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03.13 07: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지패튼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뉴론♥ 2016.03.13 07: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싸움닭이라 왼지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는데 도생님은 어디 사세요

  3. 유라준 2016.03.13 18: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차대전때의 유명한 장군중의 한명이죠.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사상 최대의 작전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명언

 

 

 

 

 

 

 

 

전쟁은 인류 문명이 만들어 낸 비극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연합군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마지막 총력전을 벌인다.

 

그 시작은 사상 최대의 작전으로 남아 있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의 진두지휘 아래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오마하 비치 해안에서 펼쳐진 작전명 오버로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사상 최대의 작전이며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의 기세를 꺾고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 상륙작전이었던 만큼상징성으로 그동안 영화, 소설 등의 소재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독일군은 노르망디보다 더 북쪽에 있는 파드칼레 해안으로 연합군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연합군이 집결한 영국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프랑스 파드칼레 해안으로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린 연합군의 기만전술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 아래 8개국이 참여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원래 6월 5일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하루 늦은 6월 6일에 감행되었다. 

 

유럽의 서부전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6월 6일에 감행되었고, 유럽의 동부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 중이던 소련군은 6월 22일에 독일군에 대규모 공격을 시작한다.

벨라루스 공세(바그라티온 작전)로 독일군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극대화 시켰다.

 

 

 

 

 

 

 

 

 

 

 

전쟁 전문가들은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항복하는 데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던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있지만, 모든 면에서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 영향이 더 컸다고 한다.

 

실제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며 만들어진 동부전선에 1942년 260개의 독일군 최정예 사단이 배치되었고,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던 서부전선에는 그보다 전투력이 약한 59개의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부전선은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소련 침략으로 시작하여 1945년 5월 9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4년간 전쟁을 마치게 된다. 동부전선을 독소전쟁, 대조국전쟁이라고도 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사상자와 포로 등 피해의 대부분이 소련과의 동부전선에서 나왔고 소련도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2차 세계대전 사상자가 최대 약 5천 만 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중 약 3천 만 명의 사상자가 동부전선에서 나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사상 최대의 상륙작전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승전국과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독일과 소련의 전쟁은 사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홍보 효과에 묻혀 버렸다.

 

동서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사상 최대의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2차 세계대전을 종식하는데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890년 미국 텍사스 데니슨에서 태어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했다.

 

아이젠하워는 한때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참모도 했었다. 그는 평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남보다 진급도 더뎠다. 중령 계급을 20년간이나 달았을 정도로 드러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 대신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아이젠하워를 1943년 2차 세계대전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상군 총사령관은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맡았고 아이젠하워 장군이 연합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 육군참모총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퇴역한다.

1948년 퇴역하여 컬럼비아 대학의 총장을 하다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현역으로 다시 복귀하며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NATO)에 오른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한국에 극비에 방문하였다.

 

1953년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국전쟁을 종식하지는 못했지만, 휴전협정을 이끌어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1960년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미국 대통령에 재선한 아이젠하워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1969년 사망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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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훈잉 2016.03.12 08: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르망디 상륙작전 총사련관.. 명언들이 너무 좋습니다
    한번씩 읽어보면 다들 도움이 될거같네요

  2. 아쿠나 2016.03.12 08: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훌륭한 리더는 생각부터 다르군요~
    좋은 명언 잘 보고 갑니다 ^^

  3. 뉴론♥ 2016.03.12 1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상 살아가면서 전쟁이란 단어가 없으면 좋겠는데 항상
    생기는 일이네요

  4. 뉴클릭 2016.03.12 12: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잘 알아 갑니다 ^^

  5. 행복생활 2016.03.12 15: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세요~

  6. 세컨드잡스 2016.03.12 16: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언 이야기 잘 보구 갈게요~

  7. 죽풍 2016.03.12 18: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저녁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8. 유라준 2016.03.12 19: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당시 소련의 역할이 크게 주효했죠.
    아마 소련이 없었다면, 연합군의 반격 역시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무술로 세계를 제패한 한국이 낳은 무도인, 극진가라데(공수도) 창시자,

전설이 된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 (최영의, 大山培達 오오야마 마쓰다츠) 명언

 

 

 

 

 

 

 

 

 

 

 

 

일본의 공수도(가라데)는 오키나와 지방 무인들이 중국 남권을 기반으로 만든 무술로 20세기 초 일본 공수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나코시 기친에 의해 일본 본토에 전수되었다고 한다. 후나코시 기친은 가라데(공수도)를 가르치는 송도관 공수도(松濤館 空手道)를 만든다.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무도인으로 전설이 된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최영의)는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최배달(최영의)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조종사의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나시 소년 항공학교에 입학하였다.

 

 

 

 

 

 

 

 

 

 

 

최배달은 소년 항공학교 재학 중이던 1939년 일본 송도관 공수도에서 가라데에 입문하여 무도인의 첫발을 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과 일본 패망은 일본 국민뿐 아니라 최배달에게도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내게 한다. 

 

그 어려운 과정에서도 최배달은 전일본 가라데 선수권대회를 제패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일본 여인에게 행패를 부리는 미국 군인을 폭행하는 바람에 미군에게 쫓기는 등 최배달의 삶은 극에 몰리게 된다. 

 

 

 

 

 

 

 

 

 

 

최배달은 지바현 남부 기요즈미 산으로 입산하여 약 20개월 동안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가며 피나는 훈련을 한다.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의 전설적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에 대한 내용이 담긴 오륜서를 읽으며 무도인으로서 무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열망은 극진가라데라는 모습으로 태어난다. 50여 마리의 황소와 격투를 벌여 황소 뿔을 꺾어 버리고 그 중 3마리는 즉사할 정도로 바람의 파이터 전설을 만들어 나갔다.

 

 

 

 

 

 

 

 

 

 

최배달(최영의)는 자신의 무예에 온 힘을 다하였다. 자신이 창시한 극진가라데로 이른바 도장 깨기로 일본의 가라데 10대 문파를 모두 격파하고 나서 세계 무술인과의 100여 차례 대결에서 모두 승리하여 무패의 기록으로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파이터가 된다.

 

 

 

 

 

 

 

 

 

 

1953년 최배달은 도쿄에 오야마 도장을 열었고 1957년에야 비로소 극진(極眞)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처음 나오게 된다.

1964년 국제가라데연맹 극진회관을 창설하여 극진가라데를 지구촌으로 전파하여 140여 나라에 천만 명에 육박하는 수련생이 있다고 한다. 최배달은 무도인으로는 드물게 62권의 많은 책을 썼다.

 

 

 

 

 

 

 

 

 

 

최배달은 일본의 전설적인 유도왕이며 유도의 귀신이라 불린 기무라 마사히코의 소개로 유도를 배우며 무술의 기본기를 익히기도 하였다. 기무라 마사히코는 유도를 바탕으로 프로레슬링으로 입문하였고 역도산에게 패배하게 된다. 

 

일본 유도계에는 '기무라 전에 기무라 없고, 기무라 후에 기무라 없다.'라는 말이 회자하였는데

기무라 마사히코는 최배달에 대해 "최배달 앞에 최배달 없고, 최배달 뒤에 최배달 없다."라고 하며 최배달(최영의)을 최고의 무도인으로 인정했다.

 

극진가라데 창시자이며 세계 최고의 파이터 최배달은 1994년 향년 72세로 전설의 파이터가 되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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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훈잉 2016.02.27 09: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62권의 책이라 대단하네요.
    공수도라니..신기합니다

  2. 행복생활 2016.02.27 14: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알아 갑니다 ^^ 좋은 하루가 되세요!!

  3. 유라준 2016.02.27 1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배달이 무술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수양까지 굉장히 훌륭하네요.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4. Deborah 2016.02.27 21: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설의 파이터 최배달씨의 이야기를 보니 아주 진념을 가지고 있는 분이네요

  5. 죽풍 2016.02.28 08: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배달이 이야기가 전설적인 이야기군요.
    잘 보고 갑니다. ^^

티베트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는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주이며 정치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명언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한민국 국민 5천만 명 중에 약 1천만 명이 불교 신도로 추산되고 한다.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된 지 약 1천5백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많은 고승 나왔고 훌륭한 불교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달라이 라마는 우리와 인접한 일본만 해도 수십 번을 방문하였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은 방문을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중국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아직도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아 입국이 불허되고 있다.

해인사의 팔면대장경을 참배하고 싶다는 달라이 라마의 열망은 언제 이루어질지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을지 미지수로 남아 있다.

 

 

 

 

 

 

 

 

 

 

 

 

현 달라이 라마는 2살 때 라마의 환생으로 지명되어 '제춘 잠펠가왕 놉상 예셰 텐진 가초'의 법명을 받았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정치적 지도자이며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지주로서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는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가쵸, 81세)를 티베트인들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믿고 있다.

 

티베트인은 관세음보살을 수호신으로 여긴다. 달아이 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 것은 5대 달라이 라마(롭상 갸초)가 자신을 포함해서 역대 달라이 라마 모두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였다.

 

달라이는 가쵸(지혜를 가진 영혼)와 함께 '바다'라는 의미이며 라마는 '영적인 스승'을 뜻한다. 달라이 라마는 '바다와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티베트를 중국으로 편입하였으나 티베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은 1950년 티베트를 무력으로 강제점령하였다.

 

 

1959년 중국은 티베트 사원을 파괴하고 대학살 자행하였다. 제14대 달라이 라마(텐진 가쵸)는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50여 년 넘게 망명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촌을 다니며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한편 티베트의 독립 지지를 호소하고 비폭력으로 평화를 위해 노력하여 달라이 라마는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티베트 불교에는 정치적 종교적 최고지도자 달라이 라마 다음으로 판첸 라마로 불리는 두 번째 종교적 지도자가 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1995년 6세의 겐둔 치아키 니마를 제11대 판첸 라마로 지명했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가택 연금 상태에서 기알첸 노르부르를 판첸 라마로 내세웠다. 중국 정부가 인정한 제11대 판첸 라마(기알첸 노르부르)는 줄곧 베이징에 머물고 있다.

 

 

 

 

 

 

 

 

 

 

 

서열 2위의 판첸 라마는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달라이 라마가 환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년을 찾아내 새로운 달라이 라마로 결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은 티베트 종교적 이인자인 판첸 라마를 자기의 뜻대로 내세운 것이다.

 

 

 

 

 

 

 

 

 

 

 

 

영국 인디펜던트는 다음과 같이 티베트 망명정부 총리의 발언 기사를 실었다.

"그것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내가 차기 교황을 정할 테니 모든 가톨릭 신자는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최후의 달라이 라마가 되는 것이 낫겠다며 달라이 라마 제도를 끝내자는 의미의 발언 했다.

"우매한 달라이 마라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이런 슬픈 상황을 생각하면 전통을 끝내는 게 낫다."라고 하였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롭상 상가이 총리는 달라이 라마 환생제도를 반드시 존속시킬 것이며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입적한다면 새로운 달라이 라마의 환생은 중국이 아닌 망명지라고 하였다.

 

중국은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뭐라 하든 달라이 라마 혈통 단절과 환생에 대한 결정권, 중국 중앙정부의 권리는 부정될 수 없다.'라며 달라이 라마 사후 제15대 달라이 라마 지명을 직접 행사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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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훈잉 2016.02.21 10: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사람의 기대하는 것보다 더 많이 기뻐해줘라 ..이말이 가장 마음에 드네요

  2. 뉴클릭 2016.02.21 13: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멋진 주말이 되세요!

  3. Deborah 2016.02.21 14: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시죠. 대단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로 알고 있네요

  4. 행복생활 2016.02.21 16: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좋은 명언 잘 보고 갑니다 ^^

  5. 유라준 2016.02.21 1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달라이 라마도 정말 대단한 분같습니다.
    그런데 중국 정부는 좀 너무한 것 같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20세기 성자, 밀림의 성자,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며

인류애를 실천한 평화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명언

 

 

 

 

 

 

 

 

 

 

 

우리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가 지구촌 근현대사 남긴 발자취가 얼마나 큰지 증명하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의학분야에서 그의 봉사정신 닮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어느 지역의 슈바이처, 대한민국의 슈바이처, 어느 대륙의 슈바이처 등으로 부르고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선교를 위한 목적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의료환경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의사 신분을 가지고 순수하게 인도주의적으로 헌신하며 인술을 펼치기 위해 아프리카에 건너갈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선교사로서 선교를 통해 아프리카 주민을 기독교로 개종을 시키기 위해 의학을 배워 아프리카로 들어가기로 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 지역 알자스 카이제르스부르크(당시 독일령)에서 목사의 아들로 1875년에 태어났다. 슈바이처 박사가 태어난 알자스는 프랑스 영토에서 독일의 영토로,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된 곳이다. 그래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국적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꾸게 된다. 

 

 

 

 

 

 

 

 

 

 

 

교회에서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한 슈바이처는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고,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흐에 대한 연구로 바흐 음악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오르간 연주는 유럽에 머물 때면 아프리카 선교와 병원 건립에 필요한 돈을 모금하기 위하여 연주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독일군에 복무하면서 대학교 공부를 병행 하였고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와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회의 목사와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슈바이처는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결혼 후 부인 헬레네 브레슬라우는 간호학을 공부하여 면허를 취득했다.

 

슈바이처 부부는 자신들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1913년 프랑스령 아프리카(가봉) 랑바레네에서 선교와 의료봉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1965년 사망하기까지 52년 동안 선교와 의료 비용(약제 구매, 병원 건립 등)을 조달하기 위해 10여 차례 유럽을 가며 강연회와 출판, 연주회 등으로 모금하였다. 그는 약 37년간을 아프리카에서 머무르며 의료봉사를 했다.

 

 

 

 

 

 

 

 

 

 

 

종교적 신념을 갖고 선교를 목적으로 시작한 의료봉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를 초월하여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으로 발전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류애를 실천하고 핵무기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자가 되어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철학자로서 생명에 대한 외경 사상과 기독교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기독교 교리에 논란이 되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철학자, 신학자, 음악가 등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세상 사람의 눈에는 당시 지구촌 문명의 오지 아프리카에서 희생과 봉사의 의술을 펼친 아프리카의 성자, 밀림의 성자, 20세기 성자,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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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6.02.20 09: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진리와 성실성에 대한 의지 맘에 와닿네요 ^^
    잘보고 가요~

  2. 훈잉 2016.02.20 1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슈바이처의 일화들은 많이 읽어봣습니다ㅎㅎ
    요즘은 너무 마음아픈현실이네요

  3. 뉴론♥ 2016.02.20 11: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분들이 많이 나오면 좋은데요
    도생님도 아는 정보가 많네요 .

  4. 뉴클릭 2016.02.20 13: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좋은 하루를 보내세요 ^^

  5. 청결원 2016.02.20 15: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언 잘 보고 가네요

  6. 행복생활 2016.02.20 16: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간답니다 ^^
    행복 가득한 하루를 보내세요~

  7. 죽풍 2016.02.20 18: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실한 인간이라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겠죠.
    잘 보고 갑니다. ^^

  8. 유라준 2016.02.20 1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런데 국적이 바뀐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네요.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9. Deborah 2016.02.21 14: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훌륭한 분이시죠

유럽대륙의 정복자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라르트 1세 명언

 

 

 

 

 

 

 

 

 

 

유럽대륙의 지배자로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라고 자부하였던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

 

나폴레옹 보나라르트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점령권이 넘어간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 파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나폴레옹은 포병 소위 임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무소불위의 절대왕정, 귀족과 성직자 등의 폭정과 호의호식, 부정부패는 급기야 프랑스 시민혁명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민초들의 주식이었던 빵이 흉년으로 가격이 폭등하고, 반드시 섭취해야 하는 소금에는 소금세를 부과하게 된다.

시민혁명대는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풀어주는 것을 시작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갔다. 

 

 

 

 

 

 

 

 

 

 

프랑스 혁명 이후 국민 간에 이념이 대립하고 더구나 외세의 잦은 침입은 혼란을 더 가중시키게 되며, 급기야 나폴레옹이라는 희대의 정복자를 세상에 불러내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생긴 급진파 정당 자코뱅파를 지지하는 글을 썼다가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던 나폴레옹은 1793년 툴릉 항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 시위를 진압하며 24세의 나이에 장군이 된다.

 

 

 

 

 

 

 

 

 

 

1795년에도 왕당파의 봉기를 부대를 이용하여 진압한 나폴레옹은 파견군사령관에 임명되고, 1796년 조세핀과 결혼한다.

1797년 오스트리아군과 전투에서 대승한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 원정길에 나선다. 지지부진하던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1799년 프랑스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새 헌법을 만든다.

 

 

 

 

 

 

 

 

 

 

3명의 통령이 있었으나 실제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이 30세의 나이에 10년 임기의 프랑스 제1통령으로 취임하며 프랑스 정권을 잡는다. 1802년 종신 통령을 거쳐서 1804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프랑스 황제에 등극하며 나폴레옹 1세가 된다.

 

 

 

1805년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는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 동맹과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해군에게 트라팔가르에서 패배를 한다. 악전고투 끝에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군대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후 나폴레옹 황제는 영국과 프로이센, 러시아와 스페인 4국 동맹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폴란드와 스페인을 점령한다.

1809년 영국과 오스트리아 동맹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명실공히 유럽대륙의 정복자로 우뚝 선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은 모스크바까지 함락하였으나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퇴각한 러시아군의 전술과 혹한의 추위에 떨며 퇴각을 하게 된다. 37만 명의 병력이 사망하고 10만 명 넘는 군인이 포로가 된 러시아 원정은 정복자 나폴레옹 황제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1813년 프랑스의 힘이 약회된 틈을 타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아일랜드 등 연맹과의 전투에서 프랑스군대는 참패를 당하고 파리까지 점령당하며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유배를 당한다.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 황제는 재집권하였으나 약 100일 만에 프로이센과 영국 웨링턴 공작이 이끄는 연합군과 벨기에 남부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남대서양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파란만장한 정복자의 삶을 뒤로하고 51세의 젊은 나이에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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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6.01.10 08: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명언 역시 훌륭하네요 ^^

  2. 뉴론♥ 2016.01.10 09: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 보니가 멎지네요
    그 시대의 영웅이자 도생님도 명언을 한마디 해주세요

  3. 훈잉 2016.01.10 10: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인이죠 ㅎㅎ.

    칭키즈칸, 나폴레옹 뭔가 비슷하지 않나요

  4. ☆Unlimited☆ 2016.01.10 1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명언이 참 많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

  5. Shinny 2016.01.10 12: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6. 유라준 2016.01.10 19: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명언을 보면, 그의 생애를 잘 압축해 놓은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7. 뉴클릭 2016.01.10 21: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의 명언에 대해 잘 알아 갑니다 ^^

  8. 행복생활 2016.01.10 2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언들 잘 보고 갑니다 ^^
    좋은 하루를 보내세요~

  9. 세컨드잡스 2016.01.10 2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폴레옹 이야기 잘 보구 갈게요~

  10. 죽풍 2016.01.10 23: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들렀다 갑니다.
    좋은 밤 보내시기 바랍니다. ^^

탁월한 지도력으로 세계를 제패한 위대한 정복자 몽골제국 칭기즈칸(테무친) 명언

 

 

 

 

 

 

 

 

 

 

현재의 몽골에서 과거 몽골제국 영화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몽골 초원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나 아시아와 유럽,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 칭기즈칸을 위대한 정복자라 말한다.

 

20년 전 미국의 위싱턴 포스트 지와 타임 지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난 1천 년간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고, 인류 역사를 바꾼 인물로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테무친)을 꼽았다.

 

 

칭기즈칸을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일삼은 정복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몽골제국이 아시아와 유럽을 제패할 당시만 해도 몽골제국에는 글자가 없었다. 후대에 몽골제국에 점령 당한 주변국의 역사기록에 칭기즈칸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정복자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계를 제패한 정복자 몽골제국 칭기즈칸은 솔선수범의 자세와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다.

포용력과 통솔력과 인재 발탁에는 인종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능력이 있는 부하는 신뢰와 함께 권한도 주었다.

 

엄정한 공덕 평가는 부하들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조직력을 극대화하였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부하들과 함께 공유하였고, 철저한 현실주의 감각과 날카로운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제국 칭기즈칸이 세계를 제패하며 정복한 땅은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다. 말을 타고 적진을 헤쳐나가는 유목민 특유의 적의 허를 찌르기동력과 필사의 결의, 그리고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황색공포라고 표현한다.

 

 

칭기즈칸의 몽골군대는 상대방과 전투에 일하기 전 약한 적이든 강한 적이든 주도면밀하게 탐색하여 적군에 대해 세심하게 정보를 파악하였다. 또 몽골군대는 상호 부대 간 유기적인 배치와 함께, 보급 체계와 무기체계의 단순화는 원거리 원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정복하는 나라와 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고 주변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몽골제국이 초기 정복에는 약탈에 가까운 습격의 개념에 가까웠다고 한다.

여러 문제점이 생기는 것을 본 칭기즈칸은 개인적 약탈을 금지하고 전쟁 전리품을 군사들의 전투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도록 한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지휘관 누구도 호의호식을 금지하고, 칭기즈칸을 포함한 모두가 급에 관계없이 이름을 부르도록 하는 평등의 원칙을 세웠다.

 

이는 전체구성원을 하나로 결속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전쟁 중에 전사한 몽골군은 반드시 시체를 찾아와 죽어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고, 군사들은 사력을 다해 전쟁에 임했다.

 

 

 

 

 

 

 

 

 

 

칭기즈칸은 유라시아대륙 점령지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였다.

몽골군 편성과 행정을 하나로 하여 10명을 한 단위로 묶고, 10단 위를 또 한 단위로 묶는 특유의 방식을 사용하였다.

또 백호장 천호장 제도를 두어 점령지를 체계적으로 묶어 나갔다. 1~2억 정도의 유라시아 점령지를 불과 4~10만 몽골 기병들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을 후대의 역사가들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내 자손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

칭기즈칸의 이 말은 그대로 적중했다.

 

 

최근 고구려학술대회에서 세계를 제패한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칸이 대진국(발해)의 대야발 후손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야발은 아버지 대중상과 함께 대진국(발해)을 세운 대조영의 동생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記 편에는 4세 오사구 단군께서 단군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蒙古里汗'에 봉하였으며 지금의 몽골족은 그 후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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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6.01.09 06: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즈칸의 대해 잘 보고 가네요

  2. 뉴론♥ 2016.01.09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거 영화로도 출시가 되었는데 그 시절에 불로장생을 꿈꾸던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어짜피 시간되면 갈걸 욕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ㅎㅎ

  3. 죽풍 2016.01.09 1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스칸은 영화로 한 번 봤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4. 훈잉 2016.01.09 1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즈칸은 정말 위대한 인물이였습니다 ㅎㅎ.
    옜날에 위인전을 볼때 저희나라 위인들을 포함해서 칭기즈칸은 절대 빠지지 않았죠.
    영화에서도 칭기츠칸을 정말 무서워했구요

  5. 뉴클릭 2016.01.09 11: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좋은 하루가 되세요~

  6. 행복생활 2016.01.09 11: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테무친 만화를 재밌게 보고 있는데 말이죠 ^^
    잘 보고 갑니다 ^^

  7. ☆Unlimited☆ 2016.01.09 11: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세월이 지나도 명언은 살아있네요. 잘 보고 갑니다~

  8. Shinny 2016.01.09 1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칭기츠칸 정말 대단하네요. 흥미있게 읽어보았습니다

  9. 아쿠나 2016.01.09 12: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명언들이네요~
    즐건 주말되세요 ^^

  10. 유라준 2016.01.09 20: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11. Deborah 2016.01.09 20: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한 사람입니다. 선견지명이 있었던것 같아요.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자손에게 금수저로 바꿔 물려준 아산 정주영 회장 명언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나 격동의 대한민국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맨몸으로 부딛히헤쳐나가다 2001년 3월 21일 자손들에게 금수저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했다.

 

 

고향에서 소 한 마리를 끌고 나와 대한민국 굴지의 그룹을 만든 그의 열정, 창조적 도전과 개척정신은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정주영만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前 현대그룹을 이끌었던 아산 정주영 회장의 86년 인생은 한 개인의 삶을 넘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격동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함께 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이 누구나 그러하듯 정주영 회장도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정주영 회장은 무모하리만큼 넘치는 자신감과 일을 성사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뚝심,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부딪혔던 시련과 난관에도 일을 이루어내겠다는 그의 집념은 마치 멈추지 않는 기관차와 같았다. 그런 도전 정신이 성공한 CEO 인간 정주영을 만들었다.

 

 

별 볼 일 없던 청년을 회사의 요직에 앉혀 대한민국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으나, 결국 뒤통수를 맞기도 하였다. 공과(功過)를 떠나 자신의 꿈을 이룬 인간 정주영의 86년 삶에서 나온 명언들을 살펴본다.

 

 

 

 

 

 

 

 

 

故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명언

 

1976년 - 우리 어깨 위에 민족의 생사가 달려 있고, 그래서 우리는 실패할 수 없다.

 

1978년 - 우리 기업인들은 부강한 나라, 문화의 나라를 만드는 기초로서의 기업의 힘, 경제의 힘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1983년 - 가장 큰 자산은 신용이다. 공신력을 갖고 있어야만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

 

1984년 - 부의 근원은 근검이다. 사람이 부지런히 일하면서 저축하면서 자연히 신용이 생기고 자신도 모르게 성취감이 쌓여가서 사람이 크게 되고 나중에는 기적같이 큰일도 다 이루어낼 수 있다.

 

1985년 - 기업은 이익이 우선이긴 하지만 국가에 도움이 되는가를 항상 염두에 두는 정신자세가 필요하다. 즉 최고경영자가 자신이 하는 일이 국가발전 성취에 이바지하는 것인가를 올바로 생각한다면 설혹 일시적인 패배가 있을지라도 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1990년 - 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주, 북한과 남한, 그리고 일본 열도를 잇는 번영의 고리가 완성되면 21세기 인류의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크게 열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1991년 - 하고 싶은 일을 하려 할 때엔 결코 돈이 장애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해내려는 신념이 있고 그 일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다면 만사형통할 수 있다.

 

1993년 - 효(孝)란 가정에서는 화목이 되지만, 사회로 확산하면 공경과 봉사정신이 되고, 국가로 확산하면 충(忠)이 되는 것이다.

 

 

 

 

 

 

 

 

기타 아산 정주영 회장 명언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로 완벽한 100%를 채우지, 안될 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단 1%도 끼워 넣지 않는다.

 

방법은 찾으면 나오게 되어 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은 방법을 찾으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람이다.

 

나는 생명이 있는 한 실패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나가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이것은 실패가 아니다. 낙관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요만큼, 요정도'라는 말은 내게 있을 수 없다. 더 할래야 할 게 없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하는 정신, 이것이 내 인생을 엮어온 나의 기본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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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1.27 0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2015.11.27 07: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3. 비키니짐(VKNY GYM) 2015.11.27 09: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온르도 덕분에 좋은 포스팅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금요일 하루 되세요^^

  4. 아쿠나 2015.11.27 09: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훌륭한 말씀들 잘보고 가요 ^^

  5. *저녁노을* 2015.11.27 1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갑니다.^^

  6. 유라준 2015.11.27 19: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대단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7.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5.11.27 20: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주옥같은 말씀이네요
    잘배우고 갑니다.

미국 인종차별에 맞서 셀마 행진을 주도하여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평등을 외친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명언

 

 

 

 

 

 

 

 

 

인도에서 비폭력 무저항 정신을 주도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은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비폭력 투쟁으로 미국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 20세기 가장 유명한 명연설 중의 하나인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는 워싱턴 대행진으로 불리는 1963년 8월 28일 흑인 20만 명이 운집한 링컨 기념관 앞에서 시작됐다. 

 

 

 

 

 

 

 

 

워싱턴 대행진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인권법안과 차별 금지 법안이 통과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된다.

 

1870년 미국의 수정헌법 제15조에 명시된 흑인 투표권은 근 100년이 지난 1960년대 당시에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1965년 3월 7일 미국 흑인의 참정권 쟁취운동 1차 셀마 행진이 시작되었다.

미국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시작하여 앨라배마 주 행정수도인 몽고메리까지 행진하는 이른바 셀마 행진은 600여 명이 동참하였다.

 

주지사와의 면담을 위한 셀마 행진은 에드먼드 페투스 다리 위에서 경찰들 앞에 멈춰 섰고 무장한 경찰들의 무자비한 폭력은 많은 부상자가 속출한다. 이날을 '피의 일요일(블러드 선데이)'이라고도 한다.

 

 

 

 

 

 

 

 

1차 셀마 행진에 참여하지 못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틀 뒤 3월 9일에 2차 셀마 행진을 주도하였다. 2차 셀마 행진도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 폭행으로 한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지며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월 21일 제3차 셀마 행진이 시작되자 린든 존슨 대통령이 직접 연방군을 파견하여 셀마 행진 행렬을 호위하게 하였고 2만 5천 명의 대규모 시위 행렬은 앨라배마 몽고메리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셀마 행진은 1965년 9월 9일 흑인 투표권이 보장되는 '투표권리법'이 통과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에 이어 자신까지 침례교 목사가 된 집안에서 태어났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권운동가로 주목받으며 흑인 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1955년 백인들이 앨라배마 몽고메리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이 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려는 움직임에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하여 1956년 미국 연방 최고 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받아낸다.

 

정부의 체포, 수차례의 기소와 투, 백인 우월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살해 협박과 흑인의 권리와 인권을 되찾고자 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묵고 있던 숙소와 킹 목사의 집을 폭파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비폭력 저항 운동을 주도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64년 10월 14일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킹 목사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하였고, 학교와 노동현장 등 미국 내에서 존재하는 인종 차별 철폐에 앞장섰다.

 

1968년 4월 4일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백인 우월주의자 제임스 얼레이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암살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을 계기로 1968년 인종과 피부색, 종교에 대한 증오범죄 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된다.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983년 11월 2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일(1월 15일)을 기념하여 공휴일로 정하는 법안에 서명한다. 1986년부터 미국 최초로 일반 국민의 이름으로 국가 공휴일이 시작되었다. (1월 셋째 주 월요일)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 저항을 주도한 흑인 인권운동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표절과 킹 목사의 주변 사람들의 증언, FBI 도청으로 나온 문란한 성생활이 논란거리가 되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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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11.22 05: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틴루터킹 명언 잘 보고 가네요

  2.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5.11.22 1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말씀 잘알고 갑니다

  3. 유라준 2015.11.22 20: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 대단한 인물인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빈자의 성녀, 가톨릭 복자(福者)로 시복(諡福)된 마더 테레사 수녀 명언

 

 

 

 

 

 

 

 

 

가난한 자의 벗이며 빈자들의 성녀로 추앙받는 마더 테레사는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지구촌의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종교적 신념에서 시작된 사랑과 봉사였지만 한 생애를 인류애 실천에 헌신한 마더 테레사 수녀에 대한 존경심은 지구촌 특정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고 있다.

 

 

 

 

 

 

 

 

2003년 로마 가톨릭 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가톨릭 복자(福者)로 시복된 마더 테레사 수녀(1910 ~ 1997)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멸망한 오스만 제국의 스코페(舊 유고슬라비아, 現 마케도니아)에서 알바니아계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이며 가톨릭 신자로 어릴 때 받은 세례명은 '아녜스'다.

 

1928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로레토 수녀원에 입회하였고, 1929년 인도 다르질링의 수녀원으로 간다. 1931년 정식 수녀가 되어 수녀원에서 운영하던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여 센트메리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다.

 

 

 

 

 

 

 

 

1945년부터 인도에서 빈민촌을 보고 하늘에서 자신에게 소명한 현장이라고 생각하여 본격적으로 빈민구제에 헌신한다. 1950년 인도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하여 인도에 귀화하여 로마 교황청 인가를 얻어 '사랑의 선교 수녀회'를 설립하였고 이후 교황청 직속 수녀회가 된다.

 

 

1952년 캘커타(現 콜카타) 시청에서 제공한 건물을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으로 불리었다. 검은 수녀복을 벗고 인도에서 가장 미천한 여인들이 입던 흰색 사리를 입는다.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위해 헌신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마더(Mother)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후 한센병(문둥병) 환자를 위한 평화의 마을도 만들었다.

 

 

 

 

 

 

 

 

인도 캘커타에서 평생을 빈민과 고아 등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며 빈자의 성녀가 되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1975년 알버트 슈바이처 상과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빈자의 성녀이며 가난한 자의 벗이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가 세상을 떠난 1997년 9월 5일 인도 정부는 국상일로 선포하여 마더 테레사를 추모했다. 마더 테레사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는 그녀의 숭고한 의지를 받들어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마더 테레사 효과라는 말도 있다.

자신이 직접 봉사와 선행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남이 하는 선행과 봉사를 보기만 해도 우리 몸의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된다고 한다.

 

 

가톨릭 복자로 시복된 빈자의 성녀 마더 테레사 수녀의 편지 40여 통으로 만들어진 책에는 인간 마더 테레사 수녀의 고뇌가 담겨 있다. 50년 동안 가난한 자들의 곁에서 끊임없이 헌신 봉사해온 그녀의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같았을 것이다. 국가가 나서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 문제, 종교적 이상과 신념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봉착한 한 인간의 존재론적 고백이 들어 있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사후(死後) 가톨릭 복자(福者)로 시복될 당시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는 선의의 비판자 '악마의 대변인' 역할을 맡은 사람이 가톨릭 성직자가 아닌 무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있었다. 

 

그는 마더 테레사 수녀를 비판한 책 '자비를 팔다(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의 저자다. 그는 책에서 '사랑의 선교 수녀회' 기금 운영 등 여러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빈자의 성녀, 가난한 사람들의 벗 마더 테레사의 봉사 삶을 담은 영화 <마더 테레사>가 지난 2003년 올리비아 핫세의 주연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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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론♥ 2015.11.21 09: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더 테래사 수녀에 대해서 처음 알게되는데 오늘도 좋은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2. 비키니짐(VKNY GYM) 2015.11.21 11: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도 덕분에 좋은 포스팅 잘 보고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3.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5.11.21 1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유용한 내용 덕분에 너무 잘보고 갑니다.

  4. 유라준 2015.11.21 20: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사랑이 뭔지를 몸소 보여주신 분이 아닌가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53년 군사독재국가 미얀마(버마)의 민주화의 꽃 아웅산 수치 여사 명언

 

 

 

 

 

 

 

 

 

미얀마(버마)는 불교 국가로 국민의 절대다수가 불교도이며 지구촌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 중의 하나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기부와 자원봉사를 하는 나라 1위로 국민의 91%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의 '세계 기부 지수 2015' 보고서가 발표됐다. 이는 불교를 신앙하는 국민 다수가 승려와 사원에 기부하는 문화 때문이라고 한다.

 

 

 

 

 

 

 

 

약 5,500만 명 국민 중 90%가 불교도이고 약 70%가 버마족이며 나머지가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소승불교 국가, 130여 개의 민족과 100여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나라 미얀마(버마)는 민족과 종교 갈등이 심하다.

 

특히 이슬람을 신앙하는 미얀마(버마)의 소수민족 로힝야족의 탄압과 인권문제에 국제사회가 주목하고 있으나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미얀마의 종교와 민족 갈등의 중심에는 미얀마(버마)의 승려이며 불교 극단주의 세력 마바타(인종 종교 수호협회)의 대표적인 인물 위라투가 있다.

 

 

 

 

 

 

 

 

아웅산 수치(1945년 ~ ) 여사는 강인한 공작새, 민주화의 꽃, 철의 난초, 여성 만델라 등의 수식어가 붙는 미얀마(버마)의 민주화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 버마(미얀마) 독립의 아버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보죠케 아웅산(1915 ~ 1947) 장군과 장관과 외교관으로 인도 대사를 지낸 어머니 킨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웅산 수치는 불과 세 살 때 영국의 식민지에서 버마(미얀마)의 완전 독립(1948년)을 목전에 둔 1947년 아버지 아웅산 장군이 암살당하게 된다.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는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간 아웅산 수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하며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나 형제를 낳는다.

 

 

 

 

 

 

 

 

1988년 4월 어머니 킨치 여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귀국한 아웅산 수치 여사는 군사독재정권의 총칼 아래 수천 명이 무참하게 희생되는 조국의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버마(미얀마)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던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운동'을 계기로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어 민족민주동맹(NLD)을 결성한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50만 명의 민주화 시위대가 운집한 가운데 1988년 8월 26일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딸로서 버마(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할 수 없다며, 이 위대한 투쟁은 온전한 민주주의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강렬하고 깊은 열망에서 시작됐다는 연설과 함께 그녀는 버마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1989년 7월 20일 1차 가택연금을 당한 아웅산 수치 여사는 버마를 떠나면 자유를 주겠다는 군부독재의 조건을 단호히 거절한다.

1990년 버마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이 압승을 거두지만 군부독재 정권은 선거를 무효화시킨다.

군사정부는 나라 이름을 버마에서 과거에 사용하였던 미얀마로 바꾼다.

 

1991년 아웅산 수치 여사는 미얀마(버마) 민주화 운동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나 가택연금으로 직접 수상하지 못한다.

 수치 여사의 남편은 마이클 에어리스는 부인을 대신하여 노벨평화상과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는다.

 

 

 

 

 

 

 

 

1995년 1차 가택연금 해제가 되었다가 2000년 9월 2차 가택연금이 되었고, 2002년 5월 2차 가택연금 해제 후 1년이 지난 2003년 5월 3차 가택연금을 당한다. 2007년 8월에 버마(미얀마)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고, 2009년 8월 18개월의 가택연금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2010년 11월 13일 가택연금 선고가 종료된다.

 

1999년 3월 1일 남편이 영국에서 사망하였을 때 출국하면 버마의 민주화 상징이 된 수치 여사는 입국이 거부당할 것을 우려해 남편의 장례식도 참여하지 않았다. 수치 여사는 "나는 항상 내 바람을 이해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진정 행복한 여자였다. 그 무엇도 내게서 남편을 빼앗아 갈 수는 없다."라고 남편이 사망한 날 일기에 썼다. 또 지난 2010년 7년간의 가택연금에서 벗어나 10년 동안 미얀마(버마) 입국을 거부당한 아들 킴 에어리스와 10년 만에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기도 했다. 

 

 

 

 

 

 

 

 

미얀마(버마) 대통령 선출은 상원과 하원, 군부에서 각 1명씩을 대통령 후보를 추천하여 최고 득표자가 대통령에 선출되고 나머지 2명은 부통령이 되는 구조다.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미얀마(버마) 제1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군부의 166석을 포함한 전체 664석 가운데 과반(過半, 절반 이상) 의석을 확보하며 미얀마(버마) 제1당으로 단독정부 구성과 대통령을 배출에 필요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 여사는 현행 미얀마(버마) 헌법상 대통령이 될 수 없다. 2008년 미얀마(버마) 군부에 의해 개정된 헌법 59조는 외국인 배우자나 외국 국적 자녀를 둔 사람이 대통령이나 부통령이 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수치 여사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헌법을 개정해야 하는데 헌법 개정은 의원 정족수 75%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미얀마 군부는 2008년 국회 664석 가운데 군부가 선거와 관계없이 25%인 166석을 의무적으로 배정하게 헌법을 개정했다.

더욱이 국가의 핵심 부처인 국방과 내무, 국경 경비 장관에 대한 임명권을 군부가 갖고 있어서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다. 

 

 

 

 

 

 

 

 

미얀마 민주화의 어머니 아웅산 수치 여사가 대표로 있는 민주주의 민족동맹이 총선에서 승리하였지만, 미얀마의 실질적인 정치력은 군부가 쥐고 있기 때문에 그리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근 30년 가까운 민주화 투쟁과 국민의 희생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미얀마의 봄이 밝아 오고 있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 여사가 미얀마의 이슬람교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의 인권 탄압, 민족과 종교 차별 문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이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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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론♥ 2015.11.15 08: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탐임지에 도생님 캐릭터도 포스팅 되면 멋질거 같네요

  2. 유라준 2015.11.15 1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제 버마가 민주화가 되었으니, 앞으로 나라를 잘 이끌기를 바랍니다.

가포르의 국부(國父) & 장기집권 독재자 상반된 평가를 받는 리콴유(이광요李光耀) 수상 명언

 

 

 

 

 

 

 

 

 

19세기 대영제국 동인도 회사가 무역항을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현재의 싱가포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말레이시아 침공으로 일본에 점령당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영국이 다시 싱가포르를 통치하였고, 1957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59년 영국 식민지 자치정부 총리로 취임한다.

 

1963년 말레이시아 연방과 합병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되어 있다가, 인종과 이념적 갈등 등 잦은 마찰로 1965년 분리 독립을 하게 된다. 1965년 8월 9일은 인민행동당이 50년 장기집권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리콴유(이광요, 1923 ~ 2015) 수상은 동방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객가인의 후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싱가포르에 돌아와 변호사로 일하다 친영국적 색채를 가진 진보당에서 정치를 시작한다.

 

리콴유는 1954년 공산주의자 림친 시옹과 함께 인민행동당을 창당하였으나, 추후 림친 시옹은 인민행동당을 탈당하게 된다.

1959년 인민행동당이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하며 집권하게 된다.  

 

 

 

 

 

 

 

 

리콴유(이광요) 총리가 실제 총리로서 집권한 것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1959년 영국 식민지 자치정부 시절부터 공식적으로 퇴임한 1990년까지 31년간이었다. 그러나 리콴유(이광요) 총리는 퇴임한 후에도 원로 장관, 고문 장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싱가포르 국정운영에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청렴하고 깨끗한 나라,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무원에게 일반 기업보다 많은 임금을 주었다.

질서를 넘어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하며 아직도 남아 있는 태형 제도를 만든다.

 

 

 

 

 

 

 

 

싱가포르 국내총생산(GDP)이 2014년 5만 6천 달러가 넘어가며 아시아 1위(세계 8위)의 경제부국으로 만들었다.

싱가포르를 비즈니스 허브로 만들어 아시아 최고의 금융 및 정보통신 등 7천여 개의 다국적 기업이 포진해 있다.

장기집권, 권력 세습의 부정적인면과 함께 대한민국이 쉽게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일궈냈다.

 

 

 

싱가포르는 국민의 대다수(약 80%)가 중국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1965년 창당한 인민행동당(PAP)은 지난 50년간 17번의 총선에서 한 번도 집권 여당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일당집권으로 싱가포르를 장기집권하고 있다.

 

 

 

 

 

 

 

 

리콴유(이광요) 수상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작은 섬나라, 가난한 도시국가 싱가포르를 집권 기간에 국민소득을 약 100배 이상 올려놓으며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계적인 경제부국으로 만든 리콴유를 싱가포르의 국부로도 부른다.

 

또, 권력과 부(富)를 리콴유 총리 일가와 일부 계층에 편중된 것과 경제 개발의 명분으로 장기집권한 것, 집권기간에 집회와 언론의 자유, 지나친 인권 통제, 권위주의적인 강력한 리더십 문제 등으로 독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더욱이 아들 리센룽이 싱가포르 총리 자리에 오름으로 권력 세습과 리센룽 총리의 부인 호칭은 국부펀드의 최고경영자로 있으며, 리콴유의 가족이 정계와 재계의 요직을 차지하자 나라를 기업처럼 운영한다는 오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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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11.14 06: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리콴유 명언 잘 보고 가네요

  2. 뉴론♥ 2015.11.14 10: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언이란 시간이 지나도 오랜시간 남는거 같습니다.
    오늘도 비가내리는데 감기 조심하셔요

  3.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5.11.14 17: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군요
    덕분에 너무 잘배우고갑니다

  4. 유라준 2015.11.14 19: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과가 모두 있는 인물이죠.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살아 있는 복싱의 전설, 영원한 세계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 명언

 

 

 

 

 

 

 

 

 

 '영원한 강자는 없다.' 라는 말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국가 간이나 사회 여러 분야에서 그대로 적용된다.

살아 있는 복싱의 전설로 영원한 복싱 세계 챔피언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무하마드 알리도 현역시절 무패의 행진을 하지 못했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 벨트도 여러 차례 뺏기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의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은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된 현재도 남아 있다.

1942년 미국 켄터키주에서 출생한 무하마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Marcellus Clay, jr - 백인 기독교인 농장주의 이름을 딴 노예 이름)였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무하마드 알리가 살던 지역은 흑인에 대한 멸시와 조롱이 유독 심했던 지역으로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것이 계기가 되어 복싱을 시작한 알리는 전설적인 백인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로키 마르시아노의 경기를 보고 오직 복싱 세계 챔피언을 향한 꿈을 키운다. 무하마드 알리는 학교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복싱에서만큼은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올림픽을 포함하여 아마추어 통산전적 100승 5패의 좋은 기록을 쌓았다.

 

 

전국대회 우승과 로마 올림픽(1960년)에 미국 라이트헤비급 복싱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는데, 그것은 무하마드 알리가 권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던 자전거 도둑을 맞은 지 6년 만이었다.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로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없어지지 않았다. 미국 내에 뿌리를 깊게 내린 인종차별에 환멸을 느낀 알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강에다 버리고 만다.

 

 

 

 

 

 

 

 

프로복싱에 데뷔한 알리는 19전 전승으로 1964년 당시 철권(鐵拳)으로 불리던 세계 챔피언 소니 리스튼 경기에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경기에서 승리하며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다.

 

3년여 동안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는 모든 도전자를 물리치며 승승장구하던 무하마드 알리는 자신의 부모님도 모두 기독교 신앙을 한 개신교 국가 미국에서 흑인 노예이름 캐시어스 클레어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름도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하게 된다.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은 흑인 인권조직 '이슬람 민족'의 창시자 엘리야 무하마드가 지어준 이름이다. 단순한 종교 개종이 아닌 흑인 인권운동을 향한 첫발자국이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흑인에 대한 멸시와 조롱, 저주와 욕설 등 미국 사회 인종차별의 불의와 맞선다.

 

베트남 전쟁의 징집영장이 발부되자 당시 흑백갈등이 첨예했던 미국사회에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았다. 그들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라는 말을 한다.

 

그는 양심적 징집거부로 기소되어 권투선수 자격 박탈과 함께 챔피언 벨트를 뺏기게 된다.

그리고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엘리야 무하마드는 종파의 칙령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슬람에서 제명한다.

 

 

 

 

 

 

 

 

알리는 명예로운 복싱 세계 챔피언의 타이틀을 빼앗기며 시련과 좌절의 길로 들어섰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는 끈기와 집념으로 영원한 챔피언의 길로 들어선다. 

 

3년 5개월의 법정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사회는 반전(反戰)운동이 거세지게 되고, 미국 대법원은 무하마드 알리에게 무죄를 선고하게 되고 알리는 링에 복귀한다. 최전성기 상승가도를 달리던 현역 복싱선수, 그것도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게 3년 5개월이란 공백은 너무나 큰 걸림돌이었으나 무하마드 알리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제2의 전성기를 만든다.

 

 

 

 

 

 

 

 

1976년 이종격투기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경기가 열렸다.

복싱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 일본의 레슬링 선수 안토니오 이노끼와의 세기의 대결은 큰 관심을 끌었던 시합이었다.

 

1974년 조지 포먼을 누르고 두 번째 세계 챔피언(킨샤사의 기적)에 오르고, 1978년 리언 스핑크스를 누르고 세 번째 세계 챔피언에 오른다. 프로 통산전적 61전 57승(37KO) 5패, 세 차례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무하마드 알리는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챔피언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복싱의 전설, 영원한 세계 챔피언으로 남아 있다.

 

 

 

 

 

 

 

 

 

복싱에서 은퇴한 알리는 파킨슨병을 앓고 있음에도 지구촌을 다니며 인권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하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예전에 '알리는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의 평론문에서 무하마드 알리의 노력과 용기있는 행동이 자신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다며 열렬 팬임을 증명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멘토로 여겼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올림픽 성화 최종 점화자는 파킨슨병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던 무하마드 알리엮다.

 

오랜 투병생활로 자신의 몸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모습으로 올림픽 성화에 점화하는 모습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특히 장애인에게 큰 용기를 준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 성화 점화였다. 지난 2005년에는 민간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훈장인 자유훈장을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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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11.08 0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알리 명언 잘 보고 가네요

  2. 아쿠나 2015.11.08 08: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선수의 멋진 명언들이네요 ^^

  3. 행복생활 2015.11.08 1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삶에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
    덕분에 잘 보고 갑니다~

  4. 뉴론♥ 2015.11.08 1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이 항상 그때처럼 영원하지 못하죠 지금은 노인네에 지나지 않죠

  5. misoyou 2015.11.08 15: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너무 멋진분이시네요 ㅎ

농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명언

 

 

 

 

 

 

 

 

 

현재 미 프로농구(NBA)팀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 마이클 조던은 살아 있는 농구의 전설이며, 농구의 신(神), 농구의 황제로 불리는 세계 농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한 묘기와 신기에 가까운 농구 실력을 선보인 마이클 조던은 자신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미국 프로농구(NBA)도 지구촌이 관심을 두는 스포츠로 만들어 미국 프로농구(NBA)의 부흥기를 이끌게 된다.

 

 

 

 

 

 

 

 

 

뉴욕에서 태어난 마이클 조던은 농구를 잘하던 형 래리 조던을 닮고 싶어 농구를 시작하였다.

농구의 전설이 된 마이클 조던도 고등학교 때는 후보 선수였었다.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조던은 주전 선수들을 위해 물을 떠다 주는 조건으로 감독에게 허락을 받고 선수로 뛴 경험이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재학시절에는 뛰어난 실력으로 전미 최고 대학 선수로 뽑히게 된다.

 

 

 

 

 

 

 

 

 

1984년 시카고 불스에 입단한 조던은 프로농구 입단 초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상 등으로 말미암아 슬럼프를 겪다가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신들린듯한 맹활약으로 '신(神)이 마이클 조던의 모습으로 변장하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공격과 수비에서 조던의 농구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숱한 진기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건강한 육체와 함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절대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에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전설을 만들어낸 것이다.

 

 

 

 

 

 

 

 

 

1984년 미국 프로농구(NBA)에 입단하여 1993년 아버지가 강도를 만나 살해되는 과정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자신의 팬이었던 10대 소년이 마이클 조던의 신발을 얻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조던에게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을 갖게 하였고 결국, 조던은 농구 코트를 떠나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야구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1995년 다시 코트에 복귀한 마이클 조던은 친정팀 시카고 불스에 돌아와 코드의 악동 데니스 로드맨과 멋진 활약을 펼치다가 1999년 두 번째 은퇴를 선언한다. 2001년 또다시 코트에 복귀한 조던은 워싱턴 위저즈에서 활약하다가 2003년 마지막 은퇴를 하게 된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몇 번의 은퇴를 거듭하다 지난 2003년 완전히 은퇴하였다.

 

마이클 조던이 은퇴한 지 12년이 지났지만 2014년 한 해 광고로 벌어들인 소득이 무려 1억 달러(한화 1,2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금액은 마이클 조던이 미국 프로농구에 데뷔(1984년) 때부터 은퇴한 2003년까지의 현역시절 전체연봉 9,400만 달러보다 많은 액수의 돈을 한 해에 벌어들였다.

 

 

 

 

 

 

 

 

2015년 9월 21일 유럽남자농구선수권대회 결승전 하프타임 때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세계 농구를 빛낸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농구연맹(FIBA) 명예의 전당에 헌액(獻額,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로운 자리에 올려짐)자로 소개됐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본인이 소속된 팀 시카고 불스를 6회 우승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본인도 현역시절 10회 시즌 동안 득점 1위, 정규시즌 MVP 다섯 번, 파이날 MVP 여섯 번이나 차지하는 등 농구의 신화를 만든 조던은 이 밖에도 수많은 진기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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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론♥ 2015.11.07 08: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깨가 딱 벌어지고 키가 크니까 마이클 형님이왼지 보기가 좋군요 얼마전에 사이몬이란 사람이 제 블로그에 오기도 햇었네요

  2. 행복생활 2015.11.07 08: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멋진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
    멋진 하루를 보내세요~

  3. 유라준 2015.11.07 20: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왜 황제라 불리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4. 토토로이웃 2015.12.13 17: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습니다~~ 제 블로그에서 스포츠 경기 분석글 제공하고있습니다~ 놀러오세요~~

세상을 바꾼 천재발명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 명언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후 최대의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어둠을 밝혀주는 인류의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은 인공적인 불 '전구'의 발명일 것이다. 전구를 발명하지 않았지만, 인류 역사는 전구를 발명하였다고 알고 있는 시대를 바꾼 천재발명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1847 ~ 1931)

 

토마스 에디슨이 발명한 제품은 무려 1,000여 가지 이상의 제품에 이르며 이런 제품은 에디슨이 직접 발명하거나 개량하여 특허를 등록하였다. 물론 먼저 발견한 제품을 개량하여 특허를 등록한 것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에디슨의 노력으로 인류의 생활이 크게 바뀐 것도 사실이다.

 

 

 

 

 

 

 

 

백열전구와 같은 일부 제품은 에디슨의 독창적인 개발은 아니지만, 또 그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에디슨과 같이 실행하였을 것이다. 제품의 발명이 아닌 모방과 개량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창조적 모방이라 할 수도 있다.

 

현대문명 속에 지구촌 절대 대다수는 에디슨과 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삶이 윤택하여졌고 그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에디슨의 말처럼 그가 발명한 제품은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없다. 반복되는 실험과 검증을 통해 만들어진 노력의 산물이었다.

 

 

 

 

 

 

 

 

토마스 에디슨은 어려서부터 호기심과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이였다. 일례로 달걀을 품어 부화가 되기를 시도하였던 일화는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선천적인 장애와 어릴 때 앓은 질병으로 약간의 청력 장애가 있었고, 난독증(難讀症, 글을 정확하게 읽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학습 장애)과 주입식의 틀에 박힌 학교 수업에 적응하지 못한 에디슨은 출석일 수가 불과 3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은 상태에서 초등학교 중퇴로 정규학교 교육을 그만두게 된다.

 

많은 책을 읽고 기차에서 신문과 잡지 등을 팔며 생활하던 에디슨은 기차에 치일뻔한 역장의 아들을 구해준 인연으로 철도 전신기사로 일하게 된다. 

 

 

 

 

 

 

 

 

20살이 넘어 에디슨은 전기투표기록기를 발명하게 된다. 자신이 만든 최초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실용적인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게 된다. 이런 상황은 에디슨이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제품을 발명하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된다.

 

30살이 된 토마스 에디슨은 그의 발명의 산실이 되는 멘로파크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

1876년 설립한 뉴저지의 멘로파크 실험실은 에디슨의 발명품 대부분이 만들어진 곳이다.

 

 

 

 

 

 

 

 

에디슨의 발명품은 그가 1868년에 최초로 발명한 (국회) 전기토표기록기를 비롯하여 주식시장 표시기, 인자 전신기, 전동타자기, 4중 전신기, 탄소전화기, 축음기, 백열전등, 전구용 필라멘트와 소켓과 스위치, 영사기, 에디슨 축전기, 에디슨 녹음기, 에디슨 라디오, 축음기, 에디슨 다리미, 전기기관차, X선 투시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에디슨이 특허출원한 백열전구와 소켓, 퓨즈, 전기 스위치 등 발전과 송전, 배전 등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었다.

어둠을 밝혀줄 전기제품에 발명으로 말미암아 1882년 미국 뉴욕에서 세계 최초의 중앙발전소가 가동되었고, 에디슨 전등회사가 만들어진다.

 

 

 

 

 

 

 

 

에디슨의 '백열전구' 발명은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후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인공적으로 전기를 만들어 어둠을 밝히는 제품으로 인류의 생활문화가 상전벽해 하는 분기점이 된다.

 

에디슨은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창업주이기도 하다.

1,000여 가지 이상의 많은 물건을 발명한 천재 발명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을 혹자는 다른 사람의 발명품을 모방하거나 사업주로서 직원이 개발한 발명품을 도둑질하였다고도 한다.

 

이런 세간의 말을 누구보다도 에디슨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산업과 상업에서 누구나 남의 것을 훔치기 마련이다. 나 자신도 많은 것을 훔치면서 살았다. 하지만 난 어떻게 훔치면 좋은지 그 방법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에디슨은 업적을 인정받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노벨상은 받지 못하고 만다.

 

 

 

 

 

 

 

 

백열전구 발명 특허

 

1878년 에디슨은 투자자들을 모집하여 에디슨 일렉트릭 라이트 컴퍼니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탄소 필라멘트를 사용하는 백열등을 발명(특허 출원)하였다.

 

이보다 앞서 물리학자인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볼타 교수가 1800년에 최초로 빛나는 전선을 만들었었고,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이비는 인류 역사 최초의 전구 '데이비 램프'를 만들었으나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산업용 등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헨리 우드워드, 매슈 에번스, 모자스 파머, 윌리엄 소여, 워런 드 라뤼, 윌리엄 그로브, 존 웰링턴 스타, 하인리히 괴벨, 등이 백열전구를 만들었으나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구로는 실용화시키지 못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여 특허를 출원한 1878년 에디슨보다 10개월 앞서 영국의 조지프 스완도 백열전구 개발에 성공한다.

조지프 스완은 에디슨이 자신이 만든 전구를 도용했다고 고소하였으나 패소하고 만다. 이후 에디슨은 조지프 스완의 특허권을 사들여 백열전구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고 개량하여 상업화에 성공한다.

 

19세기 동시대에 창조적인 생각을 시작으로 세계의 여러 사람이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모방하고 보완하여 위대한 발명품 '백열전구'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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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라준 2015.11.01 20: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천재성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E=mc^2)을 발표한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명언

 

 

 

 

 

 

 

 

 

2015년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지 110년이 되는 해이며, 2016년은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지 110년이 되는 해이다. 독일에서 출생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유대인 탄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난민 출신의 과학자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가톨릭을 신앙한 부모와 함께 17세까지 독일에서 살며 학교에 다녔다.

다섯 살에 아버지가 준 나침판이 한곳만을 일정하게 가리키는 것을 보고 자연의 신비적인 힘에 이끌렸던 소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어린 시절 반유대주의로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인슈타인은 가족의 이탈리아 이주와 함께 위스 아르고비안 주립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한다. 당시 17세의 아인슈타인은 '만약 빛의 속도로 달리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라는 상상을 하였다고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 수학과 과학부에 입학하면서 같은 학부 출신의 네 살 연상 부인 밀레바 마리치를 만난다. 

학교를 졸업한 아인슈타인은 무직자로 있다가 어렵게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고 가정교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스위스 베른의 특허 심사관으로 취직하며 안정된 생활 속에서 본격적으로 물리학 연구에 몰두하며 논문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아인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 밀레바 마리치와 1902년 첫 번째 아이(딸 리제)를 낳고 1903년 결혼하였다. 1904년 둘째 아이(아들 한스 알베르트)를 낳고 1910년 셋째 아이(아들 에두아르트)를 낳았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고 1919년 이혼하게 된다.

 

 

 

 

 

 

 

 

천재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고전역학과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들어놓은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는 불과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과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에 깊이 관여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이유는 초기 논문에 아인슈타인과 마리치 두 사람이 공동저자로 되어 있는 것이 논란이 되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부인 마리치와 별거 중이던 시기에 사촌 누이 엘자 뢰벤탈과 동거를 시작하여 이혼과 함께 두 번째 결혼을 한다.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노벨상 상금 전액을 첫 번째 부인과의 이혼 위자료와 양육비로 지급한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교수, 프라하 찰스 대학교와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서 교수,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교환교수, 미국 프퍼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를 역임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프린스턴 대학교 고등연구소 교수로 재직하다 은퇴한다. 

 

 

 

 

 

 

 

 

평화주의자였으며 사회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은 미국 반공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대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유대교 야훼를 부정하였던 무신론자였으나 1945년 자신의 달라진 가치관을 담은 내용의 편지를 친구에게 보낸다.

 

 "나는 자연과 인간 존재에 대한 우리의 지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에 겸손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믿는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동료 과학자 가이 래너에게 보냈다고 한다.

 

 

 

 

 

 

 

 

세 살 때까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고등학교 중퇴에 대학은 재수해서 들어가고 물리학 공부는 대학 학부시절이 전부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재과학자, 혹자는 예수 이후 가장 위대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죽거든 자신을 화장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뿌려달라고 유언하였으나 죽어서 자신의 뇌를 도둑맞는지개벽하는 사건이 당하게 된다.

 

토마스 하비 박사는 아인슈타인의 유가족들 모르게 고인의 뇌를 훔쳐 달아나 뇌를 촬영하고, 240조각으로 잘라 연구용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뇌를 훔쳐 달아나 연구한 것이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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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10.31 06: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언 잘 보고 가네요

  2. 뉴론♥ 2015.10.31 07: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슈타인은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위대한 인물중에 한사람이었네요
    학자로써도 이만한 사람은 다음에도 안 나올거 같죠

  3. 여행쟁이 김군 2015.10.31 11: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인슈타인이 지금껏 살아있음 정말 대단한 일들이 많이 일어날듯 한데
    대단한 분인듯 합니다

  4. 아쿠나 2015.10.31 16: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느나이때가 될때.. 책을 많이 읽으면.. 창의성이 사라지는군요~
    제가 그래서 창의성이 좋은듯? ㅎㅎ
    잘보고 가요~

  5.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5.10.31 17: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그렇군요
    덕분에 너무 잘알고 갑니다 ^^

  6. 유라준 2015.10.31 19: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류 과학상 참 큰 업적을 남긴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7. misoyou 2015.10.31 21: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대단한 분이죠
    잘보고 갑니다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평화의 상징 된 위대한 영혼으로 불린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 명언

 

 

 

 

 

 

 

 

 

마하트마 간디(1869 ~ 1948)는 인도의 정신적, 정치적 지도자로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비폭력 운동으로 평화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부유한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사밀러스 대학교에 입학하고 영국 유학을 하여 런던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지내면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그곳에서 차별 대우를 받는 인도인을 보면서 인종차별 반대운동 단체를 결성한다.

 

인도인의 권리를 찾고자 한 마하트마 간디는 국제사회에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널리 알리며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하기 위해 나탈 주(州)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기도 한다.

 

 

 

 

 

 

 

 

간디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머무르는 기간(1893년~1915년) 동안 인도인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그러한 행동을 하는 와중에 흑인을 일방적으로 비하하고 흑인들의 삶이 인도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발언을 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고향 인도로 귀국한 간디는 인도의 독립운동과 노동운동에 전념하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독립을 약속한 영국을 지지하였던 간디는 인도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도 독립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영국에 대한 저항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인도 점령국 영국에 대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영국이 만든 상품을 불매하고, 영국 정부에 대한 납세를 거부하며 인도를 점령한 정부의 공직에서 사퇴하는 등을 인도 국민에게 호소하며 비폭력으로 불복종하며 저항하는 운동을 펼쳐나갔다.

 

 

간디는 인도의 신분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불가촉천민을 '하리잔(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1932년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 정부가 선거권 자체가 없던 불가촉천민에 대하여 분리선거제를 실시하려고 하자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에 들어가기도 한다. 불가촉천민이 카스트 제도에서 분리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간디는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과 인도 내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였으나 인도는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리되었고 종교화합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1947년 8월 14일)이 분리 독립하였고, 힌두교 국가 (現)인도(1947년 8월 15일)가 영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였다.

 

분리 독립한 인도 내에서도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종교적 갈등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1948년 1월 30일 반 이슬람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단체 '라시트리아 세와크상가'의 나투람 고드세라는 총탄에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당한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 5차례나 올랐지만, 간디는 끝내 노벨 평화상을 받지 못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 정신으로 평화의 상징이 되었으며, 인도의 대문호 타고르가 그를 가리켜 위대한 영혼이라 칭송하기도 하였다.

 

 

 

 

 

 

 

 

때론 노동자보다 자본가들의 편에 섰던 것과 비폭력운동을 실천하면서 영국의 인도 독립 회유에 현혹되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과 부적절한 사생활과 모순된 언행, 간디 부자의 천륜이 끊어지는 지경까지 이른 그의 독단적인 태도, 부유한 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인도의 카스트제도 옹호와 (現)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인을 무시하고 비하한 언행은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하트마 간디가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평화의 상징이 되어 인도뿐만 아니라 지구촌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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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론♥ 2015.10.17 06: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폭력이란 언제나 존재하는 거라 그 시절이나 시간이 지나도 마하트마 간디의 명언은
    명언이 된거 같습니다.

  2. 청결원 2015.10.17 0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3. 뉴클릭 2015.10.17 11: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멋진 오늘을 보내세요~

  4. 행복생활 2015.10.17 13: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이야기 덕분에 잘 읽어보고 갑니다 ^^
    활기차게 하루를 보내세요^^

  5. 생명마루한의원 2015.10.17 23:5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읽었어요
    멋진 밤되세요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사회사업가, 빛의 여인 헬렌 켈러 명언

 

 

 

 

 

 

 

 

 

자신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장애, 어찌 보면 가혹하리만큼 혹독한 운명의 굴레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평생 장애인의 복지와 아동과 여성의 인권운동, 빈민과 노동자 위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세계인이 존경하는 여성사회사업가이며 사회개혁가로 장애를 극복한 기적의 여인, 빛의 여인이라 불리는 인간 승리의 상징이 된 헬렌 켈러.

 

그녀는 정치적으로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국 사회당 당원으로 미국의 자본주의와 인종차별 등을 비판하며 60년 동안 활발한 진보적 사회운동으로 보수주의자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헬렌 아담스 켈러(1880~1968), 그녀는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지는 않았다.

불과 19개월의 어린 나이에 성홍열과 뇌수막염에 감염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앞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시각, 청각(언어) 장애를 안고 살아갔다.

 

 

 

 

 

 

 

 

 

헬렌 아담스 켈러가 세상과 담쌓고 사는 장애를 가진 어린아이에서 기적의 여인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그녀의 영원한 스승이며 평생의 벗이고 동반자가 된 앤 설리번 선생님(가정교사)을 만나고부터였다. 물(Water)이라는 단어를 몸과 마음으로 완전하게 느끼게 하려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정성을 들인 것을 보면 두 사람의 가르침과 배움이 얼마나 소중하였고 성실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앤 설리번 역시 시각 장애를 가진 맹인학교 출신의 가정교사다. 5살 때 트라코마에 감염되어 시각에 이상이 왔고 두 번의 수술에서 시력이 더 나빠져 결국, 사물을 흐릿하게만 분별할 수 있는 시각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헬렌 켈러의 노력과 앤 설리번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보살핌으로 그녀는 퍼킨스 맹인학교를 졸업하고 시청각 장애인 최초로 뉴욕의 하버드 부속 레드클리프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템플대학에서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에서 여성 최초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녀는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40여 개국을 다니며 순회강연을 하였고 장애인을 위한 사회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헬렌 켈러는 여러 장애를 가졌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열등감을 가지지도 않았다.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특히 장애인(시각)을 위한 일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일에 평생을 다 받쳤다.

불편한 장애를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극복한 헬렌 켈러는간 승리의 상징이며 세상이 인정하는 기적의 여인이며 빛의 여인이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면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말한 헬렌 켈러는 1968년 앞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빛의 여인으로 남아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며 평생의 동반자요 벗이었던 앤 설리번의 곁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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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뉴론♥ 2015.10.10 0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헬렌켈러만큼 장애를 많이 극복한 사람도 없겠어여

  2. 아쿠나 2015.10.10 08: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슴에 담을 수있는 명언 잘보고 가요 ^^

  3. 죽풍 2015.10.10 11:3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의지만 있다면 장애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요?
    휴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

  4. 행복생활 2015.10.10 12: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세요!

세계 대공황 타개책(打開策)으로 뉴딜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 명언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1776년부터 240년 역사 동안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인물이 프랭클린 루즈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이다.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1933년 제3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며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기록에 남을 대사건인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대통령 재임 중에 모두 경험하며 제38대, 제39대, 제40대 대통령으로 4선 연임을 하며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웠으나,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얼마 앞두고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뉴욕 주지사로 재임하던 당시 세계 대공황이 일어났다. 

검은 목요일로 불리는 1929년 9월 24일 뉴욕 주식시장이 대폭락으로 촉발된 세계 대공황으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져든다. 주식시장의 붕괴와 함께 기업과 은행, 개인이 파산하고 노동자들은 직장을 잃고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 틈을 이용하여 일부 대자본가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 3%였던 도시 실업률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1933년에는 37%로 급등하였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근대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케인즈의 이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에 국가가 개입)을 받아들여 세계 대공황 타개책으로 뉴딜(New Deal)정책을 선언하며 대통령에 당선하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은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이 대중을 선동하였고 기업에 손상을 주는 급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제1차 뉴딜정책에 이어 제2차 뉴딜정책을 시행하며 미국 전체 국민에게 부(富)가 배분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국가가 직접 수요를 늘리는 역할을 하며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 재정지출에 적극적으로 임하였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개혁도 단행하였다. 

 

 

 

 

 

 

 

부유한 집안에서 명석한 머리로 명문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40세 나이에 찾아온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되었으나 불굴의 의지와 당당한 자신감으로 뉴욕 주지사를 거쳐 민주당 진보 대통령으로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번 연임을 하는 대통령이 되어 인간승리의 진기록을 만들고 재임 중 돌연 사망한다.

 

그가 암울했던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국민에게 보여준 리더십은 7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국민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래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함께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크게는 국가 경제의 재건이었고 작게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노동자와 실업자, 서민을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적정한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완전하게 살아나지는 못했다. 이러한 때 2차 세계대전의 발발하면서 미국과 세계 각국이 세계 대공황에서 탈출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미국의 군수산업은 뉴딜정책과 맞물려 미국 경제를 다시 살려냈다.

 

 

 

 

 

 

 

 

테네시 강 유역 개발 사업으로 대표되는 뉴딜 정책의 대규모 프로젝트는 고용창출과 공공개발을 동시에 이루어냈다.

연방예금보험공사, 연방긴급구호청, 민간환경보호대, 농업조정청, 노동진흥청 등을 설립하였고, 최저임금법, 산업간 비경쟁법, 생산제도 등을 도입하는 국가산업회복법을 제정하였다. 

 

지금은 모든 나라가 시행하는 제도지만 당시 법원에서 헌법위반이라는 판결을 받기는 했으나 세계 대공황의 촉발지 월스트리트를 감독하는 증권거래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국가노동관계법을 제정하여 노조의 조직권, 단결권, 행동권을 보장하였고, 빈민층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보장법을 제정하였다. 

 

 

 

 

 

 

 

 

영국, 미국, 소련은 1943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이집트 카이로와 이란 테헤란에서 개최된 카이로 회담과 테헤란 회담에서 일본의 식민지(대한민국) 문제가 언급되고 전후 전범국 일본에 대한 처리 문제가 일부 결정되게 된다. 

 

 

대통령으로서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된 것과 4선 연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만들어 미국의 전통과 관행을 깬 것, 그리고 공산주의 소련에 너무 호의적인 것이 공산국가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소련 스탈린 서기장은 1945년 2월 4일부 11일까지 소련 크리미아반도 얄타에서 열린 소위 얄타 밀약에서 대한민국(조선) 신탁통치에 관해 밀약하는데 4월 12일 루즈벨트 대통령이 돌연 사망하게 된다.

 

얄타 회담 다음으로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포츠담 회담에서 대한민국(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에 대하여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영국 처칠 총리, 소련 스탈린 서기장과 중국 총통 장개석이 서명한다.

그리고 1945년 12월 16일에서 25일까지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3국 외상회담에서 대한민국(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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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마녀' & '철(鐵)의 여인', 비난과 찬사를 받으며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리는 

마가렛 대처 前 영국 총리 명언

 

 

 

 

 

 

 

 

마가렛 대처(1925년~2013년) 前 영국 총리는 아버지가 남겨준 정치적(권력) 유산이나 금전적 유산도 없다. 

마가렛 대처는 영국의 링컨셔 주 그랜샘 지역 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소도시 그랜샘에서 시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영국 총리였던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간에 늘 따라다닌 말이 '식료품집 딸'이라는 수식어였다.

전자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의미의 칭찬하는 말로, 후자는 우습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업신여김이었다.

 

 

 

 

 

 

 

 

'철의 여인'이란 찬사와 함께 '악랄한 마녀'란 비난을 함께 받고 있는 마가렛 대처 前 영국 총리는 국민에게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영국을 일으키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녀의 오만적이고 독선적인 통치방식은 너무 많은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고 그로 인해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로에게 신념과 철학, 사회와 정치적인(보수주의적 사고) 영향을 받으며 자랐으며,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즘(전체주의)에 증오심도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녀 스스로도 인간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할 정도였다.

 

 

 

 

 

 

 

 

영국의 명문 대학 옥스포드를 졸업하고 26살에 성공한 사업가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고 29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

쌍둥이의 엄마와 한 남자의 아내, 가정주부로 살던 마가렛 대처는 34살에 영국 하원의원(보수당)에 당선된다. 

그녀의 정치 인생에서 여성적인 면보다는 강력하고 열정적인 면이 많아 보였다.

 

마가렛 대처 前 총리는 정치에 입문하고 불과 2년 후에 연금과 국가보험 차관, 노동부 장관, 교육부 장관, 과학부 장관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자신의 신념과 자신만의 철칙을 가지고 반대 세력의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의지로 밀어붙인다.

 

 

 

 

 

 

 

 

마가렛 대처는 만 50세가 되던 1975년 여성 최초로 영국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었고, 1979년 영국 총리에 당선된다.

식료품집 딸이 지구촌 여성 글로벌 리더로 세계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구(西毆) 최초로 여성이 국가를 통치하는 길을 활짝 여는 순간이었다.

 

인류 역사가 그랬고 당시도 지구촌 전역이 남성 중심의 정치사회였기 때문에 보통 능력과 강심장이 아닌 이상 쉽게 넘을 수 없는 금녀의 벽을 과감하게 허물고 드센 남자에게 절대 위축되거나 밀리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지난날 대영제국의 영화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고비용 저효율의 소위 영국병을 앓으며 암울한 경제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마가렛 대처 총리는 국유화를 민영화로, 복지정책을 포기와 공공지출 삭감, 기업의 활동자유 보장(규제완화)과 세금인하, 노동법 개정으로 파업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면 노조에 배상책임을 묻는 등 기업 친화적인 자유시장 경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한다.

 

변화가 필요했던 시기임에는 분명하였으나 독단적이고 봉건주의 시대 절대 군주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에 모교인 옥스포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수여가 학내의 반발로 무산되기도 하였다.

 

 

 

 

 

 

 

 

철의 여인으로서 마가렛 총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1982년 아르헨티나 앞에 있는 섬 영국령 포틀랜드 제도에서 벌어진 일명 포틀랜드 전쟁에서 잘 나타난다. 영국의 국가 수장으로서 영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 영국 총리로서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줬다.

 

마가렛 대처 총리가 집권하기 전 영국의 70년대 평균 경제성장률이 2.1%였고, 대처 총리가 집권한 후 십여 년 동안의 경제성장률은 2.46%였다. 그리고 대처 총리가 집권할 때 실업률이 5.5%인 반면 대처가 퇴임할 때는 실업률이 7.5%에 육박하였다.

 

 

 

 

 

 

 

 

마가렛 대처 前 총리가 사망하기 전에도 이미 분열된 영국 사회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또 한 번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마가렛 대처 前 총리에 대한 추도사 수위를 조절할 정도였다.

 

그녀를 '철의 여인', '영국의 위대한 지도자'라는 찬사를 보내며 칭송하는 사람도 많고, '악랄한 마녀', '쓰레기' 등으로 그녀를 증오하매 비난하는 영국 국민도 많다. 영국 총리로서 마가렛 대처 악랄한 마녀& 철의 여인으로 국민 사이에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갈린 영국의 여성 정치지도자였다.

 

 

 

 

 

 

 

 

집권 후반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주택보급률이 떨어지며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하며 노동자와 서민계층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고,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그녀가 시행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이 만능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가 시행한 영국 경제 재생 정책을 일명 대처리즘(대처주의)이라 한다.

 

 

 

 

 

 

마가렛 대처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끊임없는 노력, 자신의 소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빠른 판단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 글로벌 여성 리더였다. 

 

중산층의 지지를 받으며 여성으로서 영국 총리를 3선 연임하며 11년 6개월 동안 영국을 움직인 마가렛 대처 총리는 영국 보수당 새 당수 1차 표결에서 패하며 총리직을 사임하였으나 이후로도 뒤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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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죽풍 2015.09.19 0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갓바위로 가는 길이네요. ^^
    잘 보고 갑니다.

  2. 뉴클릭 2015.09.19 10: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게 읽어보고 갑니다 ^^

  3. 청결원 2015.09.19 14: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언 잘 보고 가네요

  4. 아쿠나 2015.09.19 15: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명언은 언제나 삶에 큰 힘을 줍니다 ㅎ

  5. 모나미.. 2015.09.19 15: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철의 여인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힘이 느껴져요 ^^

  6. 유라준 2015.09.19 20: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극과 극의 평가를 한몸에 받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7. ☆Unlimited☆ 2015.09.19 2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문구 잘 보고 갑니다

6·25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명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틀 후인 6월 27일에 유엔은 북한의 불법 남침 공격의 격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한국에 제공하기로 유엔안정보장이사회 결의안이 채택된다.

 

 

 

 

 

 

 

 

2015년 공개된 일급 비밀문서에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극동사령부 최고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에게 한국전쟁에서 전면적 무력사용을 승인하는 내용이 공개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 본토 군 수뇌부와 극동사령부 고위 지휘관들 간에 주고받은 문건들도 공개됐는데 극동사령부 지휘관들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의 군인은 북한군의 파상 공세에 적절한 저항능력이나 싸우려는 의지조차도 보여주지 못하여 북한군에게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비췄으며 대한민국의 완전 붕괴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였다고 한다.

 

 

 

 

 

 

 

 

1950년 대한민국 대통령이며 군 통수권자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4일 미국 극동사령부 최고 사령관이며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지휘권한을 이양하게 되며 맥아더 장군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미 제8군으로 넘긴다.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북한군에게 빼앗기고, 7월 하순에는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가 풍전등화에 내몰린 대한민국과 북한의 한국전쟁 판도를 뒤바꾼 대작전이 시작된다. 1950년 9월 15일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 크롬철광 작전), 인천 상륙작전이 팔미도 등대의 불빛을 신호로 월미도 지역에 엄청난 포격이 시작되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비교될 만큼 엄청난 물량이 쏟아진 상륙작전이었다.

 

미국의 군 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으로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은 것이다.

인천 앞바다 군함에서 월미도 지역에 가해진 엄청난 포격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북진한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중공(중국) 본토(만주)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군인으로서 맥아더 장군은 이미 시작된 한국전쟁을 끝을 내야 한다고 주장이었다.

 

 

 

 

 

 

 

 

인천상륙작전과 한국전쟁에서 독단적인 행동으로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의 불화로 결국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해임된다. 미국과 소련의 양대체제를 굳히고 정치적 안정을 선택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이미 한국전쟁 전쟁 전선의 크기를 정해놓고 있었다.

 

52년 간의 군 생활을 마친 맥아더 장군은 기업인으로 지내다 미국을 방문한 김종필 전 총리를 만나 한국전쟁 휴전은 미국이 잘못한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발군의 실력을 보이던 맥아더 장군은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초고속 승진을 하며 승승장구하여 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1918년 어깨에 별을 처음 달았고, 1919년에는 자신의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교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37년 퇴역하였다가 1939년 2차 세계대전에 다시 복귀하여 예편할 때까지 33년간 장군으로 지냈다.

 

 

 

 

 

 

 

2차 세계대전에 승전한 미국은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갑판에서 일본에게 항복문서를 받아내는데, 그 자리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서명하였다.

 

 

맥아더 장군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전장에서 승리하면 자신에게 모든 영광을 돌렸다는 소리를 들었고, 독단적이고 외골수적인 그의 행동이 결국 해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여러 장단점이 있었지만 52년간의 군 생활, 그리고 미 극동사령부 최고 사령관과 유엔군 총사령관을 지낸 것을 보면 남들보다 뛰어난 출중한 능력을 지닌 군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그리고 6.25 한국전쟁에서 뛰어난 판단력과 통찰력, 지도력 등 52년간의 군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국전쟁 전세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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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5.09.06 16: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맥아드장군의 유언..
    잘 보고갑니다.^^

  2. 유라준 2015.09.06 17: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러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일거에 전환시킨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3. ☆Unlimited☆ 2015.09.06 22: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맥아더 정보 잘 보고 갑니다

영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 명언

 

 

 

 

 

 

 

 

뚱뚱한 체구에 화가 잔뜩 난듯한 표정으로 뚫어질 듯 쳐다보는 부릅뜬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눈빛, 흡사 성난 불도그 같기도 하고, 성난 사자의 얼굴과 같은 사람. 언제나 손에서 시가를 놓지 않았던 골초 정치인. 

 

그는 항상 유머와 위트가 넘치면서도 청중을 휘어잡는 명연설가로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대한 정치인 중의 한 사람 바로 윈스턴 처칠 前 영국 수상(총리)이다.

 

 

 

윈스턴 처칠은 여러 정치가를 배출한 영국의 공작 집안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집안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난 처칠은 학창시절 공부를 못해 3년간이나 유급을 했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아버지가 정치적 위기로 집안은 몰락하게 된다.

 

 

 

 

 

 

 

 

학업성적이 좋지 않아 옥스포드나 캠브리지 같은 영국의 명문대학에 진학을 못하고 3수 끝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육사를 졸업한 후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보어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영국 하원의원과 해군, 통상부, 식민부, 육군, 공군 장관 등을 역임하며 정치가로서 입지를 굳혀서, 1940년에 영국 제42대 총리가 되었고, 1951부터 1955년까지 영국 제44대 총리를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다.

 

제44대 영국 총리로 재임 중이던 1953년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집필하여 195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었다. 

보수당과 진보당을 오가는 철새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들으면서도 처칠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며 나아갔다. 

 

 

 

 

 

1946년 미국을 방문한 처칠은 동서냉전 시대의 상징이었던 동독과 서독 간의 발트 해에서 아드리 해에 까지 걸쳐진 장벽을 '철의 장막'이라고 처음 말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공포와 불안으로 암울했던 영국 국민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며 열정과 용기, 날카로운 통찰력과 꿋꿋한 기개, 과감하면서도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영국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고 아직도 영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남아 있다.

 

혹자는 윈스턴 처칠을 빗대어 이름을 날리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전쟁광이라고도 하지만 지구촌이 곳곳이 전쟁의 포화 속에 갇혀 있었던 당시로써는 처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윈스턴 처칠은 어려서 공부도 못했고 어눌한 말주변 때문에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끊임없는 노력이 결국 그를 탁월한 정치 연설가로 만든 것이다.

 

군인에서 정치가로 영국을 이끈 총리와 노벨 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은 인물.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정치가로도 유명하며 18권의 연설문을 출간할 정도의 뛰어난 언변가였다.

 

 

 

 

 

 

 

 

윈스턴 칠 수상은 명문 옥스포드 대학의 졸업식 축사에서 불후의 명언을 남긴다.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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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09.05 12: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2.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5.09.05 13: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좋은글 너무 잘보고 갑니다.

  3. 죽풍 2015.09.05 18: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유명한 명언입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인생역전의 성공 신화를 만든 글로벌 여성 리더 오프라 윈프리 명언

 

 

 

 

 

 

 

 

25년간 자신의 이름을 딴 토크쇼 '오프라 윈프리 쇼'로 토크쇼의 여왕, 그녀는 부와 명예를 얻었고 인생역전의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오프라 윈프리 쇼의 마지막 게스트는 25년 방송을 진행해 온 그녀 자신이었다. 1만 3천여 명의 방청객과 인기 연예인, 그리고 각계의 수많은 스타가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와 마지막 고별방송을 함께했다.

 

 

 

 

 

 

오프라 윈프리는 세계 흑인 여성가장 부자(30억 달러) 1, 2위를 다투고 있고, 에미상을 47번이나 수상했으며, 유엔에서 주는 올해의 세계지도자상(2004년) 등 여러 상을 받았으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도 선정된 글로벌 여성 리더였다.

 

 

 

 

 

 

 

매일 감사의 일기를 적는다는 그녀의 감사 대상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 하늘을 바라보는 것, 밥을 먹는 것, 화를 참는 것, 책의 저자에게 감사하는 것 등 일상적인 삶 자체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다.

 

 

 

 

 

그녀의 어린시절과 방송이란 매체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최악, 어둠 그 자체였다.

1954년 가난한 10대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나 불과 9살 어린 나이에 사촌에게 성폭행을 당하였고, 마약에 손을 댔고 본인도 14살에 어머니와 같은 미혼모가 되는 기구한 운명의 길을 걸어간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으로 살아가던 그녀에게 아버지의 헌신적인 노력과 변화를 찾기 위해 보게 된 책 속에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는다. 이것이 그녀가 절망과 불행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녀는 마침내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7살에 지역 방송사 라디오 프로그램 '미스 블랙 화재예방 미인 선발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바로 오프라 윈프리의 인생역전의 첫발자국을 띠는 순간이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대학을 진학하고서도 틈틈이 지역 방송사에서 일하였다.  

 

그녀의 즉흥적인 감정 전달과 카리스마가 있는 진행은 시청자와 방송사에서 방송진행자로서 인정을 받아 저녁 시간 토크쇼 방송에서 낮시간 토크쇼로 방송시간을 옮긴다. 1983년 낮시간대 30분짜리 토크쇼를 진행하다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필 도너휴의 토크쇼를 넘어서며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한다.

 

그녀는 "자신은 진실을 믿었고,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 싶다.'라고 방송인이 되는 이유를 말하였다.

 

 

 

 

 

 

 

 

1986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딴 '오프라 윈프리 쇼'를 진행하게 된다.

토크쇼 진행을 맡은 그녀와 대통령부터 마약중독자에 이르기까지 3만여 명의 출연자가 함께한 진솔한 감정이 담긴 이야기는 25년간 지구촌 140여 개국의 수많은 사람에 전달되었다.

 

 

가난한 사생아, 흑인 여성,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 등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위대한 성공 신화를 이루어 인생역전에 성공하여 돈과 명예, 인기를 한몸에 받은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이 가진 부와 명예를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지구촌 이웃에게 기부와 봉사활동을 하며 약자들의 등불이 되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성공이 목표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가 그동안 쌓아온 사회적 명성과 명예, 인지도를 활용해서 사회를 변화시키기를 희망했다.

 

입지전적으로 자수성가하여 성공신화를 이룬 주인공으로 오프라 윈프리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모범적인 글로벌 여성 리더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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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08.30 07: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프라 윈프리 명언 잘 보고 가네요

  2. 아쿠나 2015.08.30 0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누구나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능력을 갖고 있다!!
    가슴에 팍 와닿는 군요 ^^

  3. 의료실비보험 비교사이트 2015.08.30 16: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말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죠.

  4. misoyou 2015.08.30 17: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배울점들이 너무 많은 분이죠
    잘알고갑니다.

  5. Shinny 2015.08.30 2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끊임없는 노력, 과감한 도전과 탁월한 결단력의 소유자

제곱 병법 창안으로 대박 신화의 주인공이 된 혁신경영의 귀재,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명언

 

 

 

 

 

 

 

 

일본 후쿠오카의 어느 허름한 건물 2층에서 25살의 젊은 청년이 이제 막 문을 연 컴퓨터 도매업체(유니슨 월드, 소프트뱅크의 전신) 전 직원 2명을 대상으로 일장연설을 하였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지만, 앞으로 30년 후에는 조(兆) 단위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이 될 것이라고..."

 

젊은 사장의 허풍과 같은 호언장담을 믿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러했겠지만, 그 직원들은 몇 달 후 그만두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자신의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19살에 자신의 50년 인생설계를 마친 손정의 회장에게 세상은 인생이란 대장정을 위해 펼쳐진 넓은 대평원이었다.

과감하면서도 거침없는 도전정신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앞에 두려움은 한낱 쓸데없는 관념에 지나지 않았다.

 

 

 

 

 

 

 

함께 일하던 직원마저 떠나버린 상황에서 주위의 시선 역시 걱정과 우려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끊임없이 노력하는 손정의의 열정과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알아본 당시 일본 최고 전자업체 샤프의 사사키 전무는 자신의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손정의에게 투자한다.

 

 

 

 

 

 

 

 

행복과 불행은 동시에 온다는 말이 있듯이 손정의에게도 만성간염으로 5년의 시한부 판정이 내려진다.

넘지 못할 것 같은 큰 병마의 산 앞에서도 손정의 회장은 손자병법 등 4천 여권의 책을 읽으며 자기 인생의 나침판이 될 '제곱 병법'을 만들어 낸다.

 

 

 

 

 

 

 

 

불굴의 의지로 병마와 치열한 사투 끝에 건강을 회복한 손정의는 과감한 도전정신과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한 안목과 결단력으로 창업 10년 만에 1,000억 엔의 매출을 기록한다.

 

한때 빌 게이츠를 누르고 IT 업계 최고 부자에도 올랐던 손정의 회장은 IT 버블 붕괴와 함께 위기를 맞았던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과감한 도전정신이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컴덱스 인수, 지프데이비스 출판사 인수, 야후 재팬 설립, 초고속 인터넷 사업과 중국 마윈 회장의 알리바바에 대한 투자, 일본채권신용은행 주식 매매, 닛폰텔레콤 인수, 보다폰 인수와 이액세스 이동통신사 인수, 스프린트넥스텔 이동통신사 등 일본 모바일 사업 투자, 로봇업체인 아슬라테크 등 소프트웨어, 출판, 금융, 이통사, 로봇, 태양광 등 다양한 분야에 투자하여 현재 756개 자회사와 105개 관련사를 거느리고 한 해 매출액이 80조원이 넘는 소프트뱅크 그룹은 거대 IT 공룡이 되어 있다.

 

 

특히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과 탁월한 결단력으로 중국 마윈 회장의 알리바바에 투자한 손정의 회장은 14년 만에 투자 원금의 4,000배의 수익률을 올리는 대박 신화를 올리며 투자의 귀재 웨렌 버핏이 울고 갈 새로운 투자의 귀재가 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0대에 이름을 알리고, 30대에 사업 자금을 모으고, 40대에 큰 승부를 걸고, 50대에 사업 모델을 완성해서, 60대에 다음 세대에 경영권을 물려준다.'라는 혁신경영의 귀재 스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인생설계는 어찌 보면 그의 인생계획보다 더 순조롭게 진행됐다. 물론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 철저하게 자기 관리하는 손 회장의 모습이 있었다.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기르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탁월한 결단력은 어느 한순간의 요행으로 대박 신화를 터트린 것이 아니라 대박을 만들기 위한 그의 대박 신화 창조의 인생설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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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5.08.23 07: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손정의 회장 명언 가슴에 새길만한 것들이 많군요
    잘보고 갑니다^^

  2. 행복생활 2015.08.23 1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멋진 명언 잘 보고 갑니다 ^^

  3. reene 2015.08.23 17:3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이야기가 많네요!

  4. 유라준 2015.08.23 19: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뛰어난 사람중의 한명인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5. Shinny 2015.08.23 20: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가요

자기계발의 달인, 최고의 경영 컨설턴트, 세계적인 성공학의 대가 브라이언 트레이시 명언

 

 

 

 

 

 

 

 

브라이언 트레이시 인터네셔널 CEO, 브라이언 트레이시 회장이 부유하거나 부족함이 없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성공을 이룬 인물이었다면 그의 성공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어렵고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그를 자기계발의 전문가, 성공학의 대가라 부른다.  

 

 

 

 

 

 

 

 

캐나다 동부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과 남들에게 뒤떨어지는 학업 성적 등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다.

어린 나이에 사회에 뛰어들다 보니 번듯한 직장을 가질 수는 없었다. 일용직과 요즘 흔히 말하는 3D업종 등을 전전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 인생을 살아간다.

 

 

 

 

 

 

 

 

50년 전, 20대 젊은 나이에 인생의 밑바닥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단돈 300달러를 손에 쥐고 친구들과 중고 자전거를 구입하여 캐나다 밴쿠버를 출발하여 영국과 프랑스를 거쳐 아프리카로 떠난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사하라 사막을 지나 남아프리카에 도착한다. 3년간의 악전고투와 우여곡절의 여행을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 자기계발을 이루어 목표를 이룬 계기는 방문 판매였었다.

A4용지에 지금까지 자기의 생활방식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도 어려운 목표를 설정하며 무작정 목표를 써나갔다.

 

실패하면 문제점을 파악하고 방식을 보완하여 새로운 목표와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기록하며 하루하루 자기계발을 하며 성공의 계단을 한발 한발 내디뎌 간다. 바로 자신의 실패 경험을 이용해서 성공하는 길을 찾은 것이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본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30대에 뒤늦게 공부에 뜻을 세우고 무역학사와 MBA 과정, 그리고 철학과 경제학, 역사학 등을 공부한다.

 

근 40년 동안 전 세계를 돌며 1,000여 곳의 기업체 등 수백만 명에게 강연을 하였으며, 50여 권의 그의 저서는 25개 언어로 번역되어 지구촌 50여 개국에 소개되었다.

 

 

 

 

 

 

 

세계적인 성공학의 대가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변화와 목표의식을 일깨우는 동기부여의 개척자로서 자기계발의 전문가이며 세계적인 비즈니스 컨설턴트로서 세계 최고의 경영 컨설턴트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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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쿠나 2015.08.15 07: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공을 위해서..심리법칙 잘 기억해야겠군요 ^^

  2. 비키니짐(VKNY GYM) 2015.08.15 14: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기계발은 정말 힘들고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거 같아요^^잘보고 갑니다

  3. ☆Unlimited☆ 2015.08.15 18: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명언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4. Shinny 2015.08.15 18:3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명언 잘 보고 갑니다

  5. 유라준 2015.08.15 21: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공이 예측 가능하다는 문구에서,
    대단한 자신감을 읽을 수 있네요.
    삶을 살면서 참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도전과 창조, 혁신의 아이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명언

 

 

 

 

 

 

 

 

도전과 창조의 아이콘으로 애플을 창업하였으며, 아이폰 출시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스마트폰 천국을 만들어 세상을 바꾼 사람,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그가 2011년 췌장암에 걸려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집한 것 중의 하나가 스마트폰의 크기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아이폰의 크기가 디자인과 편의성, 휴대성을 고려했을 때 최적의 크기였다고 본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크기에 대한 철학은 유훈(遺訓)이 되었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고 애플의 CEO가 된 팀 쿡은 잡스의 유훈을 버리고 아이폰 크기를 대화면으로 바꿔버렸다.

 

잡스의 걱정과 달리 대화면 아이폰은 크게 히트를 하며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고, 스티브 잡스의 스마트폰 크기에 대한 고집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티브 잡스를 묘사하는 말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많은 수식어는 양 극단을 오간다.

 

IT의 영웅, 신화의 창조자, 열정과 도전으로 시대를 앞서 간 창조의 아이콘, 스마트폰 혁명을 이룬 창조적인 천재, 독재자, 악마적 천재, 인간 착취자 등은 그를 미화한다거나 미워하는 말이 아닌 혁명적이고 창의적인 그의 도전과 열정을 상징하는 말들일 것이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창조, 혁신의 아이콘으로 살아생전 최고의 제품들을 선보였던 스티브 잡스는 20년 전 자신이 스카우트한 팀 쿡을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전 애플사 CEO로 임명하였고 현재의 애플사 최고경영자다.

 

 

 

 

 

 

 

 

인재 발굴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잡스는 1997년 애플에 복귀하면서 유능한 인재를 스카우트했다.

팀 쿡은 잡스처럼 창조적, 혁신적이거나 카스스마가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비록 일각에서는 팀 쿡이 스티브 잡스의 혁신을 이어가지 못했고, 그가 CEO를 맡은 다음에 출시된 제품에는 혁신은 없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소비자 위주의 스티브 잡스식의 혁신도 필요하지만, 공급자 위주의 탐 쿡식 혁신도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도전과 창조적인 인재,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재야말로 기업의 최고 자산이며 기업의 가치를 높여주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팀 쿡이 CEO가 되면서 혁신은 없었다. 그러나 시장의 변화에 맞춘 그의 기업 운영 역시 그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 혁명으로 세상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꾼 인물이다.

 

금세기 IT 분야의 최고의 작품, 이제 한동안 아이폰 신화를 뛰어넘을 혁신은 없을 것이며, 또 혁명 아이폰 신화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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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08.14 06: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가네요

  2. 아쿠나 2015.08.14 07: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잡스는 두말하면 잔소리인 인물이죠 ㅎ
    명언 또한 실질적이라 좋군요 ^^

  3. 행복생활 2015.08.14 13: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멋진 글 잘 보고 갑니다 ^^

  4. Hansik's Drink 2015.08.14 13:5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이야기 잘 보구 갈게요~

  5. 비키니짐(VKNY GYM) 2015.08.14 17: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단한 사람들은 자기만의 신조가 있는거 같아요^^잘보고갑니다.

  6. 유라준 2015.08.14 20: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람은 갔지만, 아직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7. 죽풍 2015.08.14 20: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앞으로 잡스같은 인물이 나올까싶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과 추앙을 받는

미국제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명언

 

 

 

 

 

 

 

 

미국 중북부의 사우스다코타주의 러시모어 산에는 미국의 대통령 네 사람의 얼굴이 조각된 '러시모어 산의 두상', 일명 큰 바위 얼굴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가장 오른쪽에 조각된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지구촌의 모든 리더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종합적이고 완벽에 가까운, 진정한 리더의 모습을 링컨 대통령에게는 있었다.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한 확신과 비전,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결단력과 설득력, 그리고 정치력, 넓은 포용력과 인간적인 모습, 따뜻한 인격과 열정의 소유자였다. 연방의 구원자요, 흑인 노예해방자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최초의 흑인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의 주인공이 되는 첫 단추를 끼웠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있어서 미합중국을 반석 위에 세운 인물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며 지도자였지만, 불운하게도 역대 미국 대통령 재임 중 암살된 첫 번째 대통령이다.

 

 

 

 

 

 

 

 

서양 문명이 시작됐다고 알려진 그리스, 2천 년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인류 문명의 걸작품, 파르테논 신전.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는 이 서양 문명사 최고의 걸작품 중 하나인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바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는 미국 제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기념관이다.

 

 

 

 

 

 

 

 

미국인들이 링컨 기념관 외형에 얼마나 큰 정성을 들였는지도 알 수 있지만, 기념관 내부 링컨 동상 뒤에 새겨진 문구 역시 미국인들 마음속에 각인된 링컨 대통령을 잘 나타내고 있다.

 

 

"In this temple, as in the hearts of the people for whom he saved the Union,

the memory of Abraham Lincoln is enshrined forever."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성은 그에 의해 구원된 미국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이 신전에 영원히 간직될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민주주의를 대변한 웅변가로서 끊임없는 존경을 받아왔으며, 그는 연방이 그 자체로도 구할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국민들에게 중요한 자치이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할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폄으로써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Posted by 일신우일신 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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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08.08 0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링컨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Shinny 2015.08.08 09: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문구네요 잘 보고 갑니다

  3. 행복생활 2015.08.08 14:2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
    멋진 하루를 보내세요~

  4. ☆Unlimited☆ 2015.08.08 17: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5. 유머조아 2015.08.08 23: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위대한 대통령의 위대한 명언입니다~~

미국 대통령 영부인에서 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는 힐러리 클린턴 명언

 

 

 

 

 

 

 

 

지구촌에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여성이 막강한 우먼파워를 발휘하며 약진하고 있다.

글러벌 시대의 선두주자로서 지구촌의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새 시대, 새역사의 장을 열어나가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옳던 그르던 지구촌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진 사람이다.

미국의 대통령이지만 지구촌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에 도전하는 여성 힐러리 클린턴(1947년생), 그녀가 최초의 미국 여성 대통령이 된다면 지구촌 역사는 새롭게 쓰일 것이다.

 

 

 

 

 

 

 

 

현재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중의 한 사람, 힐러리 클린턴

그녀는 미국 제42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으로 영부인이었다. (1993년~2001년)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 연방 상원의원에 선출되어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뉴욕주 민주당 상원의원을 지냈다.

지난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합에서 오바마 후보와 치열한 경합 끝에 패한 힐러리 클린턴은 오바마 대통령 정부에서 제67대 미국 국무부(외무부, 2009년 ~ 2013년) 장관을 지냈다.

 

 

 

 

 

 

 

 

평범하였지만 부족함 없이 자란 그녀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매사추세츠 주의 웨즐리 사립 여자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면서부터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명문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남편 빌 클린턴을 만났다.

 

 

 

 

 

 

 

 

남편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재임 중 도덕적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과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였다.

 

현재도 남편 빌 클린턴과 결혼생활이 지속하는 것을 보고 혹자는 전략적 동거라고 추측하기도 하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길은 없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하였고,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로서 미국뿐만 아니라 지구촌에서 그녀를 주목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과 남편 빌 클린턴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 부부가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에 들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 주유소 사장이 힐러리 클린턴의 옛 남자친구였다. 빌 클린턴은 주유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의기양양하며 "만약 당신이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쯤 주유소 사장의 부인이 되어 있어 있겠지?"라고 말하자 힐러리 클린턴은 웃음을 지으며 "아니지요, 저 남자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있을 거예요."라고 말하였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힐러리 클린턴 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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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청결원 2015.08.02 05: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힐러리 이야기 잘 보고 가네요

  2. Shinny 2015.08.02 08: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3. ☆Unlimited☆ 2015.08.02 1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멋진 여성이예요

  4. 파란거북이 2015.08.02 1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힐러리 정말 멋진거같네요

 

 

증산도 열어나가는 상생 후천개벽 !

 

 

 

 

월간개벽 2013년 3월호 목차

 

한달을 열며

계사년 종도사님 특별 메세지

이달의 명언

이달의 풍경

아름다운 이야기

수행의 신비

 

도훈道訓

증산도 태사부님(태상종도사님) 유훈遺訓

증산도 태사부님 말씀

증산도 사부님(종도사님) 도훈명상

증산도 사부님 말씀

 

안운산 증산도 태상종도사님 어천 1주기

화보로 보는 태상종도사님 생애

태상종도사님 가르침

태상종도사님 생애 어록

태상종도사님 추모글

 

화보

세계 지역문화 탐

전국 문화여행 답사

 

증산도 대학교

증산도 대학교 교육 - 오장육부 통제공부

명장의 리더쉽

증산도 대학교 레포트

구례도수 실천과제

 

환단고기 가이드

대한사관의 진실

나의 환단고기 독서기

민족사 뿌리를 밝힌 선구자들

환단고기 암송문 시리즈

 

도문道門

증산도 신앙

도전道典 진리 Q&A

진리를 만나는 기쁨

참신앙의 축복

내 마음이 열리는 순간

상생으로 읽는 소식

이달의 소식

영성을 깨우는 기도

 

교양

이달의 역사

예화로 배우는 우주변화원리

지구촌 개벽 뉴스

한국의 성姓씨

웰빙과 건강

새 책 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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